왜 토마토·감자·땅콩이 기피음식이었지?
먹거리 세계에서 흙수저 중 최악이었던 토마토는 보조 식재료로 인정되어 최상위 귀족들로부터 단 한 번도 밀려난 적이 없는 사과, 포도 등에 필적하는 동급의 먹거리로 신분상승됐다. 이러한 음식의 역사는 인간의 인생사와 닮아있다. /셔터스톡 |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흙수저' '은수저' '금수저'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간혹 '다이아몬드 수저'라는 말도 등장한다. 그리 달갑지 않은 말들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음식을 먹는 중요한 도구에 빗대 말했을까? 계급을 나누거나 편을 가르는 사회학적 도구는 다양하다. 이를테면 자동차 계급이니, 아파트 계급이니. 더 폭넓게 보면 '코드'라는 말로 취향을 분류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정말 부당하다. 내가 어떤 차를 타고, 몇 평 아파트에 살며, 무슨 옷을 입는 것이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나의 실체를 피동적 구도로 세팅한다면, 나는 온전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일까? 나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이 나를 지배한다는 전제하에 가늠된다는 것은 참으로 굴욕적이다.
그런데 음식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계급 평가가 오래전부터 있었다. 먹거리 세계에도 흙수저, 은수저, 금수저가 존재했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때의 계급은 땅과 바다에 이르기까지 아주 광범위했다. 이러한 계급 평가는 특히 유럽에서 노골적이었다.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보여지는' 피상적 환경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평가에 적용됐다. 이 때문에 먹거리 자체의 본질을 인정받지 못한 채 식탁은 고사하고 사람들 주변에 나서지도 못했으니 얼마나 부당한가.
음식의 역사에서 대접받지 못한 대표적인 먹거리는 감자, 토마토, 땅콩이다. 이들이야말로 먹거리 역사에서 주저할 필요도 없이 '흙수저 3인방'으로 꼽힌다. 이유는 단순하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은 먹거리가 어떻게 자라는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자신들의 종교, 신화, 민담 등과 결부시켜 먹을 수 있는 먹거리와 먹을 수 없는 먹거리를 나눴다.
흙수저 3인방은 공통점이 있는데, 수확이 땅속에서 이뤄지거나 뿌리에 주렁주렁 달려 수확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먹거리는 태양 빛을 받으면서 자라 숙성을 거쳐 완전체가 될 때까지의 과정을 눈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감자와 땅콩은 모든 과정이 땅속에서 이뤄진다. 찬란히 빛나는 태양과 단절된 채 하늘과 먼 땅속에서 알 수 없는 과정을 거친 먹거리의 일생….
유럽인은 이러한 먹거리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죽하면 감자는 '악마의 덩이들'이라는 최악의 평가를 받으면서 소, 말, 돼지나 먹는 음식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척박한 땅에 대충 심어도 잘 자라고 대량 수확이 가능하니 '남는 장사'이긴 했다.
남미에서 포르투갈로, 다시 아프리카와 미국으로 떠돌던 땅콩도 마찬가지다. 땅콩은 최초의 영어식 이름이 'groundnut'이었는데, 자라는 환경 때문에 아무렇게나 붙인 이름이다. 그 후 20세기에 접어들어 원숭이에게 던져주는 먹거리로 체면치레하기 시작할 때는 'monkynut'이라고 불리며 조롱받았다. 오늘날 견과류 중에서도 가장 각광받는 땅콩을 생각하면 천양지차의 푸대접이다.
이름만 볼 때 토마토는 흙수저 3인방 중에서 최악이다. 'Lycoperscicum', 일명 '늑대 복숭아'다. 이 또한 남미에서 유럽으로 건너왔는데, 빨갛고 조그만 알맹이가 예쁘고 신기하기 때문이었다. 귀족이나 상류사회의 정원을 예쁘게 보이도록 하는 장식용 식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독성이 함유된 가지과 식물로 소문나면서 정원에서도 퇴출될 뻔했다. 오늘날 대다수 유럽인이 토마토를 익혀 먹는 이유는 이와 같은 초창기의 힘겨운 정착기와 잘 연결된다.
천대받던 감자, 홀대받던 땅콩, 학대받던 토마토가 겪은 춥고 길었던 겨울은 산업혁명과 계몽기가 역사의 시계추로 등장하면서 서서히 끝날 조짐을 보였다. 말 그대로 엄동설한을 이겨낸 보람의 시간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감자는 쉽게 요리해 많은 사람이 빨리 먹을 수 있는 먹거리로 공장지대나 항구, 대도시에서 크게 인정받았다. 먹거리의 산업혁명이라고 할 만큼 감자처럼 혁혁한 공로를 세운 감사한 존재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순간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난 유럽 대륙에서 감자가 아니었다면 누가 이들을 먹여 살렸을까? 오늘날엔 서구 어디를 가도 감자가 당당한 먹거리로 등장한다.
땅콩 또한 소량으로 양질의 영양을 보급할 수 있었고, 고기를 기피하는 채식주의자가 늘면서 특히 미국에서 혜성처럼 떠올랐다. 일례로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땅콩 버트 잼'은 토스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얼마 전 부인이 작고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99) 도 땅콩농장 주인이었다.
토마토는 보조 식재료로 인정받았다. 특히 가열하거나 삶아도 독특한 향과 맛이 그대로 남는 게 장점으로 여겨져 인기가 치솟았다. 이탈리아 음식의 대표선수가 된 파스타와 피자에도 토마토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토마토는 이제 음식의 역사에서 최상위 귀족들로부터 단 한 번도 밀려난 적이 없는 사과, 포도 등에 필적하는 동급의 먹거리로 어깨를 견준다. 이만한 신분상승이 또 어디 있을까?
음식의 역사는 인생사와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고난이 있었고, 수모가 있었고, 학대가 있었고, 천대가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이겨내는 먹거리들의 노력이 있었다. 생존 투쟁에서 이겼고, 엄동의 겨울과 동빙의 한설을 견디며 봄을 기다렸다. 우리 삶에서 승리란 이겨내는 사람이 움켜잡는 옵션이 아니다. 그 반대로 이겨내는 사람을 위해 응당 기다려야 하는 필수의 결과물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게 당연한 이치이고, 이는 절대자가 공평하게 만들어놓은 법칙이다.
봄을 기다리는 우리는 겨울 또한 행복하게 보내야 하지 않을까? 2023년이 힘든 한 해였다면 2024년은 희망으로 벅찬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정갑식 음식문화 칼럼니스트, 영국 Oxfordpookes 대학에서 박사과정 수학, 런던에서 Dinning, Eating out Trend 분석 전문가로 활동, 현재 Fashionfood21 Ltd 대표 /연합 |
정갑식 음식문화 칼럼니스트(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