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굴구이·키조개·매생이…지천에 쏟아진 맛깔난 겨울, 장흥 별미 여행

서울에서 KTX로 2시간, 남도의 겨울 별미를 만끽할 수 있는 전남 장흥의 맛 여행!

경향신문

장흥의 겨울 별미 굴구이. 매년 11월부터 2월 말까지 장흥 해안에서 굴 잔치가 벌어진다. 노정연 기자

서울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두 시간, 나주역에 도착해 다시 차를 타고 한 시간여를 달렸다. 서울 광화문을 기준으로 정남(正南)쪽. 남도의 풍요와 온기를 품은 전남 장흥엔 겨울 먹거리 잔치가 한창이다. 드넓은 득량만이 내어놓는 싱싱한 갯것과 비옥한 산과 들의 기운을 듬뿍 담은 진미를 맛보며, 지금 가장 맛있는 장흥의 겨울을 만끽했다.

일년을 기다렸다, 장흥 굴구이

겨울에 진가를 발휘하는 별미가 한두 가지랴. 그중에서도 장흥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제철 굴은 알이 굵고 감칠맛이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매년 11월부터 2월 말까지 장흥 해안에서 굴 잔치가 벌어지는 이유다. 겨울 바다의 맛과 향을 듬뿍 담은 굴은 생으로 먹어도 좋지만 불에 구우면 풍미가 폭발한다. 장흥에서도 용산면 남포마을과 관산읍 죽청마을이 굴구이로 유명한데,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굴구이를 먹으러 인근 광주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며 작은 바닷가 마을이 북적인다.


죽청마을 해안을 따라 늘어선 굴구이집 가운데 ‘사계절 굴구이’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양철통을 뒤집어 불을 피운 화덕을 가운데 두고 삼삼오오 모여앉은 손님들이 굴 먹을 준비에 한창이다. 굴구이 조리법은 특별할 게 없다. 넓은 철판이나 석쇠에 싱싱한 석화를 잔뜩 올려 구운 후 껍데기가 열리면 탱글탱글하게 익은 알을 꺼내 먹는다. 커다란 철판 위에 우르르 쌓인 석화가 모락모락 김을 내며 끓고 있는 풍경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경향신문

장흥 고마리 해안 ‘사계절 굴구이’ 식당에서 화덕에 굴을 굽고 있는 모습. 노정연 기자

목장갑을 끼고 본격적으로 굴 먹기에 돌입했다. 어른 손바닥만 한 석화는 껍데기가 크고 두껍지만 잘 익으면 굴이 머금은 수분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며 입이 쩍 벌어진다. ‘타닥, 탁’. 벌어진 굴 껍데기 한쪽을 떼어내고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굴을 입에 넣으니 구수한 불맛과 향긋한 바다내음이 입안 가득 들어찬다. 바다에서 나온 것이 비린 맛 하나 없이 달기도 참 단 데다 간도 딱 맞는다. 굴과 ‘단짝’이라고 생각했던 초고추장도 잊힌 존재가 된다.


부드럽고 달콤한 굴 맛을 음미했다면 굴 껍데기에 찰랑이는 짭조름한 굴 ‘육수’도 후루룩 마셔줘야 한다. 여기에 장흥 막걸리나(장흥에는 ‘술도깨비’라는 아주 좋은 막걸리가 있다) 복분자주 한잔을 곁들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경향신문
경향신문

작은칼을 이용해 굴껍질에서 굴을 떼어낸 후 입에 넣으면 통통하게 살이 오른 제철 굴의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진다. 노정연 기자

장흥 굴구이는 3월 말까지 즐길 수 있다. “보통 설이 지나면 굴에 독소가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때가 굴이 제일 통통하고 맛있을 때”라고 주인장이 귀띔한다. 음력설이 지나고 한 달가량이 제일 맛있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경향신문

큼지막한 굴이 듬뿍 들어간 굴전과 싱싱한 생굴 . 노정연 기자

정신없이 굴을 집어 먹다 보면 어느새 앉은 자리에 껍데기가 수북이 쌓인다. 굴구이로만 배를 채우면 안 된다. 굴전과 생굴, 굴 떡국까지 푸짐한 굴 한 상을 맛봐야 하기 때문이다. 지구상 어디에도 이토록 호화로운 굴 만찬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없을 것이다. 굴 음식으로 가득한 메뉴판에 ‘옛날 짜장면’이 있어 물었더니 가족 단위 손님들이 많아 아이들을 위해 남겨놓은 메뉴란다. 추운 겨울날 가족, 친구들과 뜨거운 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구워 먹는 굴은 장흥의 겨울 바다가 선물하는 낭만이다.

들에는 소, 산에는 표고, 바다엔 키조개

경향신문

장흥한우와 표고버섯, 키조개 관자를 함께 먹는 ‘장흥삼합’. 노정연 기자

장흥 요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장흥삼합’이다. ‘한우삼합’이라고도 불리는데 장흥 갯벌에서 자란 키조개 관자와 숲속 참나무에서 자란 표고버섯, 장흥한우를 한 번에 먹는다. 산과 바다, 들판의 기운을 한입에 넣으니 맛이 없을 수 없다. 향긋하고 쫄깃한 장흥 표고와 고소한 맛이 일품인 장흥한우, 야들야들 부드러운 키조개를 구워 차례로 올린 후 입에 넣으면 세 가지 재료가 뒤섞여 복합적인 풍미를 선사한다.


한 가지만 먹어도 황송한 귀한 음식들을 한꺼번에 먹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최고급 한우 산지로 유명한 장흥은 사람보다 소가 더 많은 고장이다. 장흥 인구가 3만5000명인데 소는 5만8000여마리(1800여농가)가 산다. 장흥 들판에서 자라는 이탈리안 라이그래스가 소먹이인 데다 연중 따뜻한 기후로 소 키우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다 보니 1등급 한우 생산량이 전국 평균을 훨씬 웃돈다. 대표 한우 산지답게 장흥에는 한 집 건너라고 할 정도로 고깃집이 많고 유명한 소머리국밥집도 여럿이다.


경향신문

정동진 토요시장 한라국밥은 소머리국밥과 선지국밥으로 유명하다. 국밥을 토렴하는 모습. 노정연 기자

장흥은 표고버섯의 주산지로도 유명하다. 국내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 책임지고 있다. 장흥표고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공물로 국가에 공납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녔는데, 기름에 구우면 구수하고 진한 향이 배가되며 고기 맛이 나는 게 특징이다.


키조개 역시 장흥의 대표 특산물이다. 장흥 앞바다 득량만 갯벌에서 자란 키조개는 패주(관자)가 유난히 크고 영양이 풍부하다. 갯벌에서 자라 모래가 많은 곳에서 자란 키조개보다 육질이 부드럽고 감칠맛이 돈다. 산란기(7~8월)를 앞두고 탱글탱글하게 살을 찌우는 5월에는 안양면 수문항 키조개마을에서 키조개축제가 열린다. 지천에 나는 것이 버섯이고 조개고 소이다 보니 풍족하게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경향신문

장흥의 특산물인 표고버섯과 한우, 키조개. 노정연 기자

장흥 별미의 진수, 장흥삼합

경향신문

장흥삼합. 노정연 기자

장흥삼합을 맛보러 정남진 토요시장 인근에 있는 ‘황손두꺼비’ 식당을 찾았다. 장흥삼합은 재료를 한꺼번에 불판에 올리지 말고 몇 점씩 구워서 바로바로 먹어야 더 맛있다. 불판 위에 한우를 올려 육즙이 나오면 바로 표고버섯을 굽는다. 여기에 키조개를 살짝 구워 깻잎이나 쌈 채소에 싸 먹거나 장흥산 양파를 올려 먹는다. 양파의 알싸한 향취와 단맛이 삼합의 풍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알맞게 구워진 삼합을 젓가락으로 포개 입에 넣으니 부드러운 키조개 관자와 향긋한 표고버섯, 한우의 감칠맛이 어우러진다. 왜 따로 먹지 않고 함께 먹는지 수긍이 간다.


경향신문

장흥삼합. 노정연 기자

“아이고, 키조개가 다 쪼그라들겄네.” 삼합을 입에 넣느라 불판에 잠시 소홀해진 사이 식당 사장님이 집게를 들고 달려왔다. 장흥삼합은 기름기와 육즙이 많은 고기와 먹으면 맛이 더 좋다며 “살치살이나 토시살은 비싸니 차돌박이를 섞어 먹으라”고 여행객의 주머니 사정까지 살펴준다.


장흥삼합을 제대로 맛보려면 정남진 토요시장으로 가야 한다. 식당 메뉴판에 ‘장흥삼합’이 없더라도 당황하지 말자. 대부분 소고기를 따로 구매한 다음 음식점에서 세팅비를 내고 먹는 ‘초장집’ 시스템이라 그렇다. 음식점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고깃값을 제외하고 2인 기준 키조개와 표고버섯이 1만5000원, 상차림 비용이 8000~1만원 정도다. 토요시장에는 장흥축협 한우직판장을 비롯해 정육점과 정육식당이 30곳 가까이 되니 고기는 능력껏 취향껏 고르면 된다.


경향신문

키조개 대신 낙지를 올리면 낙지삼합이 된다. 노정연 기자

삼합의 무한변주, 3단계로 즐기는 주꾸미 삼합

장흥삼합은 철에 따라 낙지 등을 넣어 사합, 오합으로도 즐길 수 있다. 읍내 ‘신가네’ 식당은 낙지와 주꾸미 삼합이 주메뉴인데 먹는 방법이 독특하다. 불판에 구워 먹는 삼합과 달리 전골냄비 바닥에 삼겹살을 깔고 그 위에 미나리 등 채소와 키조개 관자, 낙지나 주꾸미 등을 푸짐하게 얹어 회로 먼저 먹고 익혀서 또 한번 먹는다.


경향신문

‘신가네’ 주꾸미삼합. 회로 먼저 먹는다. 노정연 기자

푸성귀 위에 관자와 주꾸미가 담겨 나오면 우선 주꾸미를 기름장에, 키조개는 묵은지에 싸 먹는다. 키조개를 묵은지에 싸 먹는 건 이 집 주인장 아이디어란다. 단맛을 품은 키조개 관자와 시금하게 톡 쏘는 전라도 묵은지가 만나니 입안에서 잔치가 벌어진다.


어느 정도 회를 먹다 보면 냄비 아래부터 올라온 열기로 관자와 주꾸미는 탱글탱글한 찜이 된다. 솔솔 돼지고기 익는 냄새가 나면 이제 재료들을 한데 섞어야 한다. 채소 아래 숨어 있던 빨간 양념과 돼지고기, 주꾸미가 끓어오르며 삼합은 곧 매콤한 ‘쭈삼’(주꾸미삼겹살)으로 변신한다.


경향신문

전골로 변신한 주꾸미삼합. 노정연 기자

여기서 끝이 아니다. 조금 더 지나니 재료에서 채수와 육수가 빠져나와 어느새 눈앞에서 펄펄 전골이 끓고 있다. 삼합을 회와 찜, 전골까지 3가지 요리로 즐기는 것이다. 이런 조리법을 생각해내다니 장흥 사람들은 맛에 있어 특출난 재능을 가진 게 틀림없다. 무엇보다 재료가 신선하기 때문에 가능한 조리법이라고 한다.


얼큰한 전골을 한 국자 떠 맛보니 쫄깃하게 익은 관자, 주꾸미가 씹히며 표고 향과 미나리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한 냄비를 금세 비우고 밥까지 볶아먹고 나서야 식사가 마무리됐다.

미운 사위에게 매생이국을 준다고?

경향신문

겨울이 되면 장흥 어디에서든 뜨끈하고 향긋한 매생이국을 맛볼 수 있다. 노정연 기자

장흥 겨울 별미를 이야기할 때 매생이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매생이 양식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 바로 장흥 대덕읍에 위치한 내저마을이다. 매생이는 파도가 잦아지는 곳,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곳에서 잘 자란다. 항아리 형태의 내저마을 앞바다는 매생이 양식에 최상의 조건을 갖췄다. 해마다 12월 중순에서 다음해 2월 말까지, 찬 바다에서 자란 매생이를 거둬들이는 겨울이 되면 장흥 어디에서든 뜨끈하고 향긋한 매생이국을 맛볼 수 있다.


여리고 가는 매생이는 국을 끓이면 연하고 부드러우면서 향기가 좋다. 재료를 참기름에 볶은 뒤 매생이를 넣고 끓이면 매생이국이 완성된다.


장흥에서는 국물이 안 보일 정도로 걸쭉하게 끓이는데, 입에 넣으면 씹을 것도 없이 후루룩 넘어가는 데다 뜨거워도 김이 올라오지 않아 무심코 먹다가 입천장을 데기 십상이다. 오죽하면 ‘미운 사위가 오면 매생이탕을 내놓는다’라고 했을까.


경향신문

매생이 굴떡국. 노정연 기자

개성이 강해 보이지만 매생이는 여러 재료와 잘 어울린다. 굴이나 조개를 넣고 끓인 매생이탕 외에도 매생이떡국, 매생이칼국수, 매생이전 등으로 다양하게 요리해서 먹는다.


식물성 고단백 식품으로 탄수화물, 무기질, 비타민이 풍부하고 특히 철분 함유량은 우유보다 40배나 많아 남녀노소에게 좋은 영양만점 별미이기도 하다.


장흥에서 1박2일, 따뜻했던 남도에서의 꿈같은 별미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고 유독 매생이가 생각나는 건 영하로 뚝 떨어진 매서운 추위 때문일까. 굴과 가래떡을 넣고 푹 끓인 매생이국 한 그릇을 후루룩 들이켜고 싶어졌다. 뜨거운 국물에 입천장을 홀라당 데더라도 말이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늘의 실시간
BEST
khan
채널명
경향신문
소개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다,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