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까지 맡기고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세요
[ESC]
서울 영등포구 이로도리의 모듬전채. |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을 때 생각나는 소설 ‘달팽이식당’. 20대 주인공 린코는 어릴 적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의 여러 식당 주방에서 요리를 배우며 살아간다. 요리를 정말 좋아했던 그녀가 인도인 연인과 함께 식당을 차릴 꿈을 꾸며 돈을 모으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함께 살던 연인이 그동안 모은 전 재산과 가재도구를 가지고 자취를 감춰버린 것. 남은 것이라곤 돌아가신 할머니가 남겨준 겨된장 항아리뿐이다. 너무나 큰 충격으로 말문을 닫아버린 린코는 산골 고향으로 돌아가 창고를 개조한 뒤 ‘달팽이식당’을 오픈하게 된다. 하루 한 테이블만 받는 이 식당은 특별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손님과 사전에 만나거나 미리 사연을 들은 뒤 그에 맞는 음식을 내어주는 것. 인생의 아픈 고비가 있거나 간절한 바람이 있는 사람들은 린코의 정성 어린 음식을 먹은 뒤 심신의 잔잔한 변화를 겪으며 교감하게 된다. 오로지 그날의 손님에게 맞춰 내어준 짧거나 긴 코스의 음식, 바로 린코가 전하는 위로와 응원의 ‘오마카세’다.
서울 마포구 소바쥬의 장어소바. |
일본말 오마카세에서 ‘오’는 단어 앞에 붙이는 높임 표현이고 ‘마카세’는 ‘당신에게 모두 맡긴다’는 뜻이다. ‘뭐 먹을까?’ 물으면 ‘알아서 시켜줘’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다. 수많은 선택지, 그리고 선택과 결정의 연속인 현대 사회에서 메뉴 고민 정도는 내려놓고 싶은 게다.
예전에 큰 일식당 오픈을 맡았던 적이 있다. 규모에 맞게 여러 취향을 만족시킬 일품요리를 다양하게 구성해 놓았다. 그런데 가오픈 2주를 지나며 초기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메뉴를 둘러본 많은 고객이 결국 “코스 없어요?”라는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정비했다. 메뉴별로 차가운 전채요리, 따뜻한 요리, 주요리, 식사, 디저트로 구분하고 이 중 한 개씩 선택해 ‘내 맘대로 코스’를 구성하도록 했다. 그래도 고객의 질문은 이어졌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먹어야 좋을까요?” 혹은 “뭐가 맛있어요?”
결국 ‘저희 맘대로 해드릴게요’라며 오마카세 코스를 만들게 됐다. 손님은 그저 준비된 대로 드시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은 자유로운 선택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의외로 고급 식당을 방문하면 주방장이나 식당이 의도한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고, 정해진 틀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또 여기서 지금만 즐길 수 있다는 한정성은 식사에 더욱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서울 용산구 작은수산시장의 제철회. |
달팽이식당에 나오는 린코의 코스처럼 고객이 바라는 오마카세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음식의 계절감, 가격 이상의 가치만족감 등은 당연하고 고객의 마음을 이끌어 줄 ‘기(氣)’를 전달한다는 것. 오너 셰프의 기(氣), 즉 정서와 에너지가 느껴지는 오마카세는 식당부터 고르기도 버거운 선택지 중에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한다. ‘가성비’가 좋고 특별한 기운을 발휘하는 오마카세 몇 곳을 소개한다.
이로도리
기본기를 지키며 전채, 찜, 구이, 솥밥 등 다양한 코스 요리를 구현하는 가이세키 형(작은 그릇에 다양한 음식이 조금씩 나오는 연회용 코스) 오마카세. 최승호 오너셰프는 매달 제철 재료를 활용해 아홉 가지의 요리를 준비한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방로69길 28 2층/0507-1357-2562/디너 코스 12만원, 런치 정식 3만5천원
소바쥬
홀보다 넓은 주방을 보며 즐기는 오마카세. 자가 제면한 소바가 여러 요리에 들어가 있다. 참치소바마끼, 제피잎페스토&소바 등 박주성 셰프의 개성적인 요리가 돋보인다.
서울 마포구 큰우물로 75 상가 지하1층 22호 /0507-1415-0476/디너 오마카세 8만원, 런치 오마카세 4만5천원
작은수산시장
전복으로 시작한 해산물 프로 채성태 셰프의 오마카세. 민어·전어·방어 등 계절을 알리는 수산시장 해산물을 빠르게 선보이는 풍성한 회코스. 그날의 종류는 셰프만 안다.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62가길 14 작은수산시장/010-4991-9286/오마카세 7만원
이윤화 다이어리알 대표/ ‘대한민국을이끄는외식트렌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