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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한겨레

달지도 짜지도 맵지도 시지도 않은, 전국 묵밥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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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마을’의 묵 음식. 박미향 기자

미향취향은?

음식문화와 여행 콘텐츠를 생산하는 기자의 ‘지구인 취향 탐구 생활 백서’입니다. 먹고 마시고(음식문화), 다니고(여행), 머물고(공간), 노는 흥 넘치는 현장을 발 빠르게 취재해 미식과 여행의 진정한 의미와 정보를 전달할 예정입니다.

잘 얼린 얼음이 동동 뜬 묵밥은 보기만 해도 더위가 달아난다. 폭염을 퇴치할 만한 먹거리는 많지만, 유독 묵밥에 애정이 가는 이유는 건강한 맛에서 뿜어 나오는 소박한 품격 때문이다. 달지도, 짜지도, 맵지도, 시지도, 새콤하지도, 짭짤하지도, 슴슴하지도 않은 묵밥. 화려한 미식을 자랑삼는 최근 외식 트렌드엔 맞지 않는 모양새지만, 먹을수록 속이 편해지는 재주를 부리는 음식이다.


묵밥은 채 썬 청포묵이나 메밀묵, 도토리묵 등에 육수를 붓고 밥을 말아 먹는 음식이다. 여름엔 찬 육수를, 겨울은 따끈한 육수를 붓는다. 묵은 곡식이나 열매에서 추출한 전분질을 끓인 후 굳혀 만드는 먹거리로, 녹두묵(청포, 황포), 도토리묵, 메밀묵, 올챙이묵(옥수수), 고구마묵, 우무묵(우뭇가사리) 등이 있다.


1970년대 가난을 상징했던 묵은 현대에선 저칼로리 식품으로 평가받으며 대표 ‘참살이 음식’으로 등극했다. 채식주의자도 환영하는 음식이 묵이다. 최근엔 뉴욕 등 국제적인 도시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묵 요리가 등장했다. 한식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자 한국인 요리사들이 탕평채 같은 묵 요리를 선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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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업묵집’의 메밀묵밥.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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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할머니묵집’의 묵밥.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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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리’ 음식. 박미향 기자

전국에서 이름난 묵밥집은 대략 두 종류다. 재료가 메밀인 집과 도토리로 맛을 낸 식당 등이다. 메밀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흔한 도토리로 차린 묵밥집이 단연 수가 많다.


한반도에서 메밀은 언제부터 재배되었을까.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고려시대 사람들이 메밀을 먹은 것만은 틀림없다.


2007년 충청남도 태안 지역 어부들이 한 신고로 마도 앞바다에 ‘보물선’ 탐사선(당시 문화재청 소속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단)이 떴다. 수색 작업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마도 해역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려청자운반선(태안선)이 발굴된 대섬 앞바다에서 북서쪽으로 4㎞ 정도 떨어진 바다다. 그리 멀지 않은 바다에서 진귀한 고려청자가 발견되었으니, 마도 앞바다도 기대에 찬 시선으로 보는 이가 많았다.


마침내 길이 10.8m, 너비 3.7m 규모의 마도1호선이 발견됐는데, 배에서 벼, 콩, 조, 메밀, 젓갈 등을 운반한 증거가 확인됐다. 마도1호선은 고려시대 전남 나주, 해남, 장흥에서 수확한 곡물을 수도 개경으로 옮기는 곡물 운반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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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전통묵집’의 묵밥.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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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묵집’의 음식. 박미향 기자

맛난 메밀묵밥을 경험할 만한 데는 어디일까

강원도 원주에 있는 메밀묵밥집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원주 시내에서 차로 5~7분 거리에 있는 ‘흥업묵집’이 주인공이다. 옅은 회색빛 메밀묵이 찰랑거리는 그릇만 봐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 젓가락을 들 때마다 숨바꼭질하듯 빠져나가는 메밀묵은 차가운 육수를 두른 채 손님을 맞는다. 메밀묵 특유의 미끌미끌한 식감은 입안 촉각을 깨운다. 들뜨게 한다.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란 글이 적힌 메모를 노트북 모니터에 붙여 놓았다는 파리 여름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 박효진의 초긍정적인 ‘효진적 사고’가 가게 전체에 퍼져있다. 먹다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흥업묵집’과 메밀묵으론 호각지세인 ‘순흥전통묵집’은 규모가 좀 더 크다. 경북 영주에 있는 이 집은 40년 넘은 역사가 허툰 시간이 아님을 증명한다. 갖은 고명이 올라간 메밀묵밥은 한여름 잠시 부는 솔바람처럼 먹다 보면 깊은 속까지 켜켜이 쌓인 더위를 쫓아낸다. 폭염에 달궈져 뜨거워진 쇠처럼 된 이가 서서히 식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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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전통묵집’의 묵밥.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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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리’ 음식. 박미향 기자

시인 박목월은 시 ‘적막한 식욕’에서 메밀묵을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음식으로 추앙했다. 그는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쓸쓸한 식성.’이라고 적었다. 인생의 참맛을 깨달은 이만이 아는 고요한 맛이다.


메밀묵 예찬에만 빠져들면 도토리묵이 성낸다. 묵계의 쌍벽을 이루는 게 메밀묵과 도토리묵이 아니던가. 도토리묵밥도 메밀묵밥 못지않게 소탈하고 수수한 맛을 자랑한다.


도토리도 가난 시절 주린 우리네 배를 채워졌던 고마운 구황작물이었다. 가을에 도토리가 익어 나무에서 떨어지면 사람들은 부지런히 주웠다. 흉년이 들거나 먹거리가 부족할 때를 대비한 것이다. ‘가을에 떨어지는 도토리는 먼저 먹는 것이 임자다’란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도토리는 쓸모가 많은 식재료였다. 밥, 죽, 떡, 국수, 수제비뿐만 아니라 장, 전, 묵, 다식, 술 등의 재료로 쓰였다. 떫은맛을 우려내고 만든 도토리묵도 밥, 나물, 전, 장아찌, 튀김, 조림 등으로 옷을 갈아입고 여러 가지 맛의 변주를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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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삼묵밥’의 음식.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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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마을’ 묵밥.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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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할머니묵집’의 음식. 박미향 기자

전국에 가 볼 만한 도토리묵밥집에 ‘묵마을’(충북 제천), ‘초정묵집’(충북 청주), ‘구읍할매묵집’(충북 옥천), ‘산밑할머니묵집’·‘원조솔밭묵집’(대전 유성구), ‘원조할머니묵집’(경기도 파주), ‘콩리’(경기도 양평), ‘고삼묵집’(경기도 안성) 등이 있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주천묵집’은 메밀묵밥과 도토리묵밥 다 판다. 경북 문경에 있는 ‘소문난 식당 새재묵조밥’은 청포묵과 도토리묵 두 가지가 메뉴다.


묵밥집 미식 여행이 엄두가 나진 않는 이들은 ‘오아시스 마켓’이나 ‘네니아’ 등을 이용해 직접 만들어 먹어도 좋다. ‘오아시스 마켓’엔 ‘치자청포묵’부터 ‘우무묵’까지 다양한 묵 식품이 판매되고 있다. ‘즉석 도토리묵사발’도 있다. 조리하기에 어렵지 않은 요리가 묵밥이다. 취향에 맞게 육수만 잘 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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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마켓’에서 파는 ‘즉석 도토리묵사발’. ‘오아시스 마켓’ 누리집 갈무리

묵밥은 궁극의 ‘무미’(無味)다. 맛이 없는데, 맛이 있다. 이는 실로 도달하기 어려운 맛의 경지다. 만듦새가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모자란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단단한 맛이다. 간소하고 검박한 맛이자 담소하면서도 순소한 맛이다. 싱검털털한 맛에서 긴 세월 명맥을 이은 비결을 발견한다. 묵에서 인생을 배운다. 더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참고문헌 ‘한식문화사전’, 국가유산청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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