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 청년의 좌충우돌 귀농 라이프
『나는 너멍굴을 선택했다』 진남현 저자 인터뷰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언젠가는 자유로워진다.” 이따위 조언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청년이 있었다. 그는 청소년기에 IMF 사태를 겪으며 장래희망을 ‘농사꾼’으로 결정했다. 스물일곱 살에 귀농해 우여곡절을 겪으며 고산면의 산 너머 굴 같은 골짜기 ‘너멍굴’을 자신이 뿌리내릴 곳으로 선택했다. 무모해 보이는 결단력에 저돌적인 추진력과 당돌한 근성을 더해, 너멍굴에서 지금까지 6년째 자급자족과 자력갱생의 삶을 경작하고 있다.
이 책은 90년생 청년 진남현이 자신의 비루했던 삶을 청산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과정을 담았다.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너멍굴. 운명의 터전이자 인간다운 삶의 고향인, 그곳 자유의 땅에서 한 청년이 벌인 행복하고 처절한 ‘삽질’을 기록했다. 지금 세상에는 메타버스, 인공지능, 주식, 부동산 같은 ‘진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난무한다. 그래서 이 책은 이런 세상에 ‘저비용 고노동 농사꾼’이 가하는 일침이기도 하다.
그는 향후 200년은 개발될 가능성이 없는 산골짜기에 자기 힘으로 밭을 일구고 집을 짓고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렸다. 자유롭기 위해 편리함 따위는 걷어차 버리고, ‘진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 자신의 땅을 일구어가는 ‘전대미문 왁자지껄 인생 놀이판’을 소개한다.
먼저 작가님 소개와 ‘너멍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자연농업으로 농사짓는 6년 차 농부 진남현입니다. 황포도 씨의 3년 차 남편이고, 진보리 양의 2년 차 아버지입니다. 너멍굴은 저희 가족 삶의 터전이에요. 너멍굴이라는 이름은 마을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제가 사는 골짜기를 부르는 이름이에요. 마을에서 야트막한 산을 하나 넘으면 골짜기가 하나 나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산골을 예부터 사람이 살지 않는 산 너머 골짜기라고 너멍굴이라고 불렀어요. 이곳은 저에겐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자유의 땅이고, 자연과 벗하며 농사지을 수 있는 기회의 땅입니다.
귀농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요, 어떤 고민을 했는지, 그리고 결정하기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요?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잃을 것도 없었거든요.
책에 보면, 완주군에는 귀농 귀촌 청년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이웃이라 할까요, 도움을 주신 동네 형님과 친구분이 많아 보입니다.
처음 내려갈 때 몸뚱이 말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마을 분들이 도와주셔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처음에 내려가선 먹고살기 위해 가리지 않고 저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을 했어요. 할머니들 짐도 들고, 밭도 갈고, 그리고 밥 얻어먹고요. 가끔 소소한 일일 알바 등 시키는 건 다 했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서로를 알아가고, 그 과정에서 제 노동의 대가가 돈뿐 아니라 관심으로 돌아오더라고요.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도와주시고 면이나 군에서 도움을 받으면서 조금씩 필요한 것을 갖춰갈 수 있었어요.
군에서 주신 도움 가운데 요긴했던 게 청년인턴(현재 청년이음)입니다. 월 50만 원씩 주면서 관심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청년수당이었어요. 많은 돈은 아니지만 당장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요긴한 벌이였죠. 그 업무가 지역과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라 완주와 주변을 알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되었거든요.
또 완주군에는 여러 공동체가 많아서 저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어요. 농사, 문화, 관계, 기술 등 각자의 관심에 따라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데요, 제가 원하는 곳에 가서 저의 관심사를 찾아갈 수 있었거든요.
탈석유, 무농약, 토종 씨앗 등 환경과 지역을 위한 시도를 지속하시는 듯합니다. 어떤 소신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 어떤 어려움이 있을까요?
농기계 굴리고 농약 비료 주고 종자 사는 데 쓸 돈이 없었어요. 제가 처음 본 농업은 자연과 벗하는 것보다 투자해서 수익을 내는 산업이더라고요. 그런데 저에게는 그렇게 할 돈도 마음도 없었달까. 다른 곳에서 죽어라 일해서 번 돈을 농사에 투자하고, 그 거대한 농장을 운영하며 몸이 망가지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의미가 없으니까요.
차라리 내 노동력을 죽어라 땅과 작물에 쏟자. 그래서 생활비도 만들고, 땅도 살리고, 그럼 그 땅에서 사는 작물은 건강해지고, 그것을 먹고사는 나도 덩달아 건강해진다. 이런 선순환을 생각했죠. 그래서 거대한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게 토종 종자를 사용하고, 비료와 농약 대신 낙엽과 재 같은 주변의 것들을 이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농기계와 화학비료가 없던 70년 전 농법으로 농사지으려니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생산량도 턱없이 적고, 병해충에도 취약해요. 결정적으로 농사가 한 작물을 1년에 한 번밖에 해볼 수 없잖아요. 매년 한 번씩 매번 다른 방법으로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배우는 거죠. 여섯 번째 농사를 마무리한 지금도 계속 실패하고 있어요. 아주 조금씩 나아지면서요. 한 10년쯤 하면 그래도 먹고살 만큼 농사지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집도 직접 지었더군요. 집짓기 기술을 딱히 배우지도 않은 듯한데요, 직접 짓기로 한 까닭은 무얼까요? 그리고 직접 지은 집은 아직 튼튼하고 따뜻한가요?
머리 조아리고 살기 싫어서요. 다른 사람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열심히 일해서 집을 사려면 한 20년쯤 걸리잖아요? 그러면 작은 집 하나 구하려고 20년 동안 집주인과 사장에게 머리 조아리고 을로 살아야 하는데, 제가 성격이 모나서 그런지 그게 그렇게 싫더라고요.
차라리 한 3년 죽었다 생각하고 내 손으로 있는 돈으로 조금씩 짓자, 이게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지은 집은 처음에는 아주 춥고 더러운 선사시대 움막 같았어요. 아주 절망적이었죠. 그런데 신기한 게 사람이 포기를 안 하고 계속 정진하면 조금씩 좋아지더라고요. 처음 지은 초가집보다 두 번째 지은 나무집이 좋고, 그다음 지은 벽돌집이 조금 더 낫더군요. 그렇게 지금 아이와 저희 부부가 사는 방이 만들어졌는데요. 아주 따뜻하고 좋아요. 이 방에서 아이도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되지 않나 싶습니다.
너멍굴에서 황포도(아내) 씨를 만났고, 아이(진보리)도 낳았습니다. 너멍굴에서 가족을 이루었으니, 너멍굴의 의미가 달라졌을 듯합니다.
고향이 되었죠. 처음에 너멍굴에 들어 왔을 때 이곳은 나의 빈한함을 홀대하지 않고 받아준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거기에 더해 가족을 이루고 대를 이어 살아갈 고향으로 업데이트되었죠. 전 힘들거나 어려울 때 돌아갈 고향이 없거든요. 그런데 보리는 돌아올 고향이 있잖아요. 제가 포기하지 않고, 이 땅을 건강하게 일구고 무탈하게 살고 있으면 자식은 조금 더 나은 고향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귀농 귀촌을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제가 무슨 조언을 한다는 것이 주제넘는 것 같아요. 지금은 제 앞가림이나 잘하고 건강하고 무탈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나면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도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노인이 되고 싶어요. 그게 꿈입니다.
*진남현
1990년생 귀농 청년. 이름은 경기도 안양에 있는 염불암 주지스님께서 지어주셨다. 어린 시절 은행원인 어머니와 공무원인 아버지 밑에서 유복한 환경을 누렸지만 IMF를 만났고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궁핍한 환경 속에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농사꾼을 선택했다. 경희대학교 사학과에서 수학했으나 농사꾼에게 졸업장은 필요 없겠다 싶어 스물여덟이 되던 해 전 재산 100만 원을 들고 완주로 귀농하였다. 귀농 후 문전옥답을 찾아 사람이 살지 않는 골짜기인 너멍굴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6년째 살고 있다. 농사꾼은 가난한 직업이라 소비를 줄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간단한 도구와 살림에서부터 사는 집까지 만들어 쓰는 자급의 삶을 살고 있다. 현재 너멍굴에서 토종 씨앗과 무자본 농법으로 1800평의 농토를 경작하고 있다. 미세먼지가 온 산천을 뒤덮지 않는 한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지은이 관련 방송 프로그램
▶ EBS 한국기행 “꽃 피는 봄이 오면” : https://youtu.be/4GSXvpts6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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