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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정, 날것은 곧 살아 있다는 것

2023년 8월호 - 『반은 미치고 반은 행복했으면』

뜻밖의 이름일 것이다. 몇 년 만에 대중 앞에 돌아온 강혜정은 연기 대신 '글'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쥐었다.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날것의 연기가 글에도 겹쳐 보인다. 고요한 반항아이던 어린 날 남겨진 생채기는 피부를 뜨겁게 하고, 불안함에 흔들리며 지르는 갈라진 목소리는 귓가에서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결국은 다정함과 위안으로 긴 침묵을 깨고 나온 지금에 함께 안도하게 된다. 강혜정은 『반은 미치고 반은 행복했으면』을 통해 선명하게 이야기한다. 내가 여기 있다고.

글로 하는 세상과의 대화

반갑습니다. "잘 지내셨나요?"가 좋을까요, "어떻게 지내셨나요?"가 좋을까요?

이런 느낌이잖아요. "잘 지냈어?"라고 물으면 "How are you?(잘 지내?)", "Fine, Thank you.(잘 지내, 고마워)" 처럼 흘러가고, "어떻게 지냈어?"라고 물으면 내가 진짜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해야 할 것 같은.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제 최고의 작품이 있기 때문에, 그 아이를 돌보는 데 많은 집중력을 할애했어요. 그러다 시간이 날 때면 줄곧 혼자였고요.


그 흔한 인스타그램을 사용하지 않죠.

인스타그램을 만들었을 때 가장 먼저 하루 사진을 올려서 자연스럽게 하루의 계정처럼 되어버렸어요. 이제 그 친구도 본인의 의지로 할 수 있을 때니까 어느 순간 멈춰졌고요. 접속해서 이런저런 걸 보는 용도로는 사용해요. 저 아이돌 좋아하거든요. 스트레이 키즈, 세븐틴, 뉴진스, 르세라핌, 아이브. 얼마나 편해요. 내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많은 걸 볼 수 있잖아요.(웃음) 이제 다시 시작해 볼까요?


SNS라는 소통의 창구가 없는 가운데 글쓰기는 특별한 도구였겠네요.

혼자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머릿속이 시끄럽고 하고 싶은 말이 돌아다니는데 상대가 없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휴대폰에 앱을 하나 깔았어요. 처음에는 작은 아이디어들을 모으려 했는데, 앱의 정체성이 감성적인 글을 쓰기에 적합했어요. 어느새 글이 꽤 길어지기 시작했죠.


어떤 '전조'도 없이 작가 강혜정의 책을 마주해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합니다. 글을 쓰고 책으로 엮겠다고 생각한 순간이 궁금해져요.

처음 글을 썼을 때 책을 내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집에 영문과 나온 사람이 있잖아요? 글을 보여줬을 때 좋으니 더 써서 책으로 내보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책은 무슨 책이냐고 생각하면서도 응원을 받으니 계속 쓰게 됐어요. 아이를 키우면서도 뼈저리게 느끼게 된 사실인데, 여러분 칭찬은 정말 중요합니다.(웃음) 노트북을 산 순간, 진짜 책을 내겠구나 싶었어요.


김혜순 시인이 한 강의에서 작가에게 가족은 가장 방해되는 존재라고 한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선뜻 먼저 보여주셨네요.(웃음)

대중에게 걸러지는 필터와 개인적인 관계에서 걸러지는 필터가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가족이기에 우리만 아는 포인트가 있고, 누가 뭐라 해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 점들을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글 쓰는 루틴이 있었나요?

앱에 기록된 날짜인 2019년 10월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작년에 제일 많이 썼어요. 딸 하루를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차를 타고 바깥을 볼 때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은 자꾸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 길을 걷다 한 노인이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주울 때 의식이 지난 어딘가로 날아가거나 무언가 떠오르곤 했어요. 휴대폰에 메모만 해놓고 혼자 있을 때 다시 떠올려 써 나갔어요. 한 번에 끝까지 써질 때도 있고, 어떻게 해도 안 써질 때가 있었고요. 언제 어디서든 썼네요.

혼자가 아니야

책을 열고 한두 챕터를 읽었을 때 이건 정말 '강혜정'의 내밀한 이야기구나 싶었어요. 독자로서 마음을 열고 귀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좋은 말로 표현해 주시네요.(웃음) 어둡죠? 사람들이 기대했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어요. 그래서 어떤 반응일지 잘 모르겠어요. '왜 강혜정이 책을 내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고요. 저는 매를 먼저 맞는 사람이에요. 최악의 상황까지 떠올리고 두들겨 맞은 다음에야 뭔가를 시작해요. 연기할 때는 작품을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 반응을 살피는 게 힘들었어요.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쓰는 거라 오히려 마음 편해요. 혼자 맞는 게 나아요. 안 되겠으면 도망가려고요.(웃음) 


사람들에게 내보이기 어려운 뿔과 가시를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글로 써 내려갔어요.

제가 생각하는 저라는 사람은 굉장히 보수적이거든요. 누군가의 정문이 저에게는 비상구이고 비상구가 저에게는 정문일 때가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이게 왜 문제이지, 하는 게 저에게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들이 되는 거죠. 글을 쓸 때는 읽는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까지 크게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배우로 활발하게 활동할 때 연기자의 모습만 보였던 것 같아요. 책 안에 녹아 있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강혜정'이라는 사람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러게요. 그랬네요. 당시 말로 '신비주의'. 일부러 신비하게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니고요. 연기로는 제 모든 걸 끌어내 보여줄 수 있는데, 그 밖에 것들은 그렇지 못했어요. 다른 걸로 소비되고 싶지 않았거든요. 별로 재미있는 사람도 아니고요. 


제도권에 반항하려는 학생, 음악을 사랑하며 일탈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담겨 있습니다. 거의 만화 주인공 아닌가요?(웃음)

항상 만화 주인공이 되고 싶었어요! 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하나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영역의 모든 걸 두루두루 좋아해요. 음악도 한 뮤지션에 꽂히는 게 아니라 록부터 클래식까지 다 듣거든요. 만화도 마찬가지다 보니 정말 많은 세계가 저에게로 와 흡수되는 거예요. 현실의 나는 싸움을 하나도 못하는데 만화 속 세계로 들어가 막 날아다니고 난리가 나고, 켜보지도 않은 바이올린을 켜는 여주인공이 돼서 사랑에 빠져 있고.(웃음) 사실은 너무 뛰어난 오빠와 착한 동생 사이에 문제만 일으키는 아이였는데. 그래서 반대로 공부도 안 하고 못되게 굴면서 "나 좀 봐줘" 했던 것 같아요. 소위 오타쿠 기질이 있는데, 현실에서 충족이 안 되니까 다른 데서 위안을 찾았던 거죠.


어떤 구절에서는 분노가 힘이 된다고 했어요.

사람마다 여러 에너지로 살고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게 상처일 수도 슬픔일 수도 있고 뭐든 가능하잖아요. 이렇게 힘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조차, 지나고 나면 그때를 살아가는 힘이 되더라고요. 한 시기를 보낼 수 있는 원동력 같은 거요.


그럼 가장 큰 원동력은 뭘까요?

나를 움직이게 하는 꾸준한 감정들... 무기력증은 저를 쭉 따라다녔어요. 근데 따라다니는 게 하필 무기력이다 보니 떨쳐 내기 위해 물리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거죠. 엊그제도 그 녀석이랑 싸웠어요. 그래서 떨쳤어요. 이겼고요.(웃음)


글을 쓰는 과정에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고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을 거치곤 합니다. 타인을 주의 깊게 보다 보면 내버려 둘 수 없는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요.

도대체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모르겠는데, 레이더 성능이 굉장히 좋아요. 일반적인 와이파이는 2.4 GHz라고 하면 하필 저는 최고 사양인 거죠. 굳이 눈치채지 않아도 될 상황을 재빨리 읽어버려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생각이 계속 돌아가니까 어쩔 수 없어요. 글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분식집에서 호의를 보였다 적의로 돌려받은 에피소드처럼요? 

저의 트라우마랍니다.


트라우마를 글로 쓰는 건 작가님에게 어떤 일인가요?

정확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안 좋은 적금 같거든요. 내 에너지를 담보로 갉아먹는 마이너스 적금 같은. 말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트라우마는 정말 깊은 곳에 넣어뒀고, 언젠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렇게 내놓을 수 있는 건 그나마 괜찮은 거겠죠. 분식집에서 돈이 모자라 곤란을 겪는 분께 돈을 드리고 기뻐했다 상대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황을 겪었을 때는 그냥 "내가 왜 그랬지"로 끝났어요. 글로 담다 보니까 전지적인 시점에서 상황이 보이더라고요. 그분의 감정까지도 읽히면서 상황의 부피와 밀도가 높아지는 과정을 다시 한번 겪는 거죠.


어떤 글은 시 같고, 초단편 소설 같기도 하고 팝송의 가사 같기도 합니다.

일상생활에 상당히 제약을 두는 타입이라 생각에는 자유를 주고 싶었어요. 연기할 때도 간혹 답답할 때가 있었어요. 좀 더 자유롭고 뻔뻔함을 키웠으면 좋았을 텐데. 글은 비교적 제한이 적어 공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처음 하는 사람이 줄 수 있는 묘미라는 생각도 들고요.


공포 영화를 잘 못 보는 심리나 톰보이지만 디즈니의 공주들을 선망하는 에피소드는 개인적이지만 공명하게 되는 이야기더라고요. 독자들과 어떤 교감을 나누길 원했나요?

제가 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외롭지 않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나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구나.' 외톨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저도 내놓을 용기를 냈던 것 같아요.


책 후반부에 처음으로 남편과 딸의 이야기가 나와요. 

중심을 저한테 두고 싶었던 것 같아요. 가족 이야기가 많이 나오다 보면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 더 커지잖아요. 누군지 아니까 쉽게 그려지고요. 그래서 가족 이야기를 많이 하면 이해하기가 훨씬 더 쉽겠구나 생각이 들다가도, 이 책은 나와 그와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그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다시금 떠올렸어요. 외톨이가 아니라고 얘기해 주고 싶은 그들과 내 이야기 안에 가족은 딱 있어야 할 요소만큼 있으면 되겠구나 싶어서 최대한 담백하게 그려냈어요.


그럼에도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요?

피가 이어져 있다고 전부 다 죽고 못 사는 가족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아요. 남편과 혼인 신고서로 엮여 있지만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제 인생에서 가장 가족 같거든요. 하루 역시 내가 책임지고 만들어낸 관계이고요. 이들과 삶을 겪고 이겨낸 과정에서 신뢰가 확고해졌어요. 외면당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가족 관계는 아닌 사이보다 더 잔인하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스트레이 키즈의 '충돌'이라는 노래를 듣다가 이마를 탁 쳤죠.(웃음) 하루아침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연인에 관한 노래인데, 가족을 대입해 봐도 딱 맞아요.


가제는 '그날의 멜로디'였어요.

초반에 이소라 선배님이 TV에 나와 '제발'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쓴 글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제 기억 안에 많은 음악이 포함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가제를 '그날의 멜로디'라고 정하고 시작했어요. 글 안에 신해철 선배님의 <일상으로의 초대>, 터보의 <회상>, 에이스 오브 베이스와 퍼프 대디 등이 나온답니다.

타오르는 매일

최근 일본어 공부가 즐겁다고요. 

만화책을 좋아하니까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에 빠졌어요. 일을 일찍 시작해서 볼 시간이 없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많이 보게 됐어요. 그러다 성우분들에게 완전 매료되는 바람에.(웃음) 대사를 따라 해보다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글에서 혼자 여행하는 이야기가 몇 번 나와요. 여행자일 때 모습도 궁금합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낯선 걸 만나는 게 좋아요. 그런데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조금씩 두려움이 자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떤 상황이든 저만의 루틴을 만들어 꼭 하는 게 있어요. 아침을 감동으로 깨워주는 커피집을 찾는 게 첫 번째 숙제고요. 단걸 좋아해서 맛있는 디저트 가게도 꼭 가야 해요. 요즘엔 확실히 일본에 자주 갔어요. '덕질'을 충족하기 위해서요.(웃음)


여전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들은 뭐가 있을까요?

좋은 소리 듣는 걸 되게 좋아해요. 그래서 음악을 좋아하나 봐요. 귀가 예민해서 좋은 목소리와 음악을 들으면 많이 힐링이 돼요.


10대, 20대, 30대의 여러 '그날'들을 지난 지금의 강혜정은 어떤가요?

좀 심심한 것 같아요. 너무 바빴다가 여유가 생긴게 익숙하지 않은 건지. 그동안 일과 멀어진 이유를 솔직히 얘기하자면, 소비되는 형태로 일을 하는 것이 좋은 작용을 하지 못했어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걸 만날 때까지는 "나 잠깐 안 해도 되나?"라는 질문에 "예스"라는 답이 돌아오는 순간 여유가 생겼죠. 그런데 이제 좀 근질근질해요. 불이 꺼진 줄 알았는데 장작에 불씨가 남아 있었더라고요. 어느 순간 옆으로 옮겨붙은 기분이에요.


포장지를 벗는 것, 이 책이 작가에게는 정화의 한 단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아요. 그러니까 오늘도 오랜만에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기회가 생긴 거겠죠. 한 겹의 포장지가 벗겨지고 세상에 던져져 속해지면 아마 그 상태로 한동안 또 쭉 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이렇게 교류의 맛을 알아버리면 한동안 또 그게 달콤하거든요.(웃음)


첫 책을 낸 이후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요? 작가로서도 그렇고 배우로서 필모를 하나 더 늘리는 것도 기대해도 될까요?

다음 책은 기약 없어요. 이번 책이 계획에 없었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죠. 연기는 좋아할 만한 친구가 나타날 것 같아요. 정말 너무 좋고 맘에 들어서 친해지고 알고 싶은 역할이 생길 때까지는 지켜볼 테지만, 그런 역할이 나타나면 조금 더 적극적이 될 것 같아요.

"난 자주 보고 싶어."


아, 이런 답장을 주실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 짧은 문장이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다. 감사하고 따뜻하고, 죄송하고 짠하고, 어울리지 않지만 조금 쓸쓸하고, 또다시 진심어리게 다정한 기분이 뒤섞인 것이, 꼭 성분이 어딘가 고장난 물질을 마주한 듯이 낯선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지키지 못한 말들을 또 한번 뱉었다. 기회는 다시 주어졌고 저쪽에는 분명 두 팔을 활짝 펴고 반갑게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올해에는 그들에게 반드시 닿아야겠다. 그가 끌어당긴 말의 힘으로 한 발짝 나아가야 한다.


정말 가끔이지만 이토록 솔직하고 놀랍도록 단순한 한마디에 세상이 바뀐다.


나의 새장 속 세상이. 

_강혜정, 『반은 미치고 반은 행복했으면』, 267~268쪽

*강혜정


배우이자 작가. 대표작으로는 영화 <올드보이>, <연애의 목적>, <웰컴 투 동막골>이 있다. 첫 책인 『반은 미치고 반은 행복했으면』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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