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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매일경제

너무 잘생긴 친일파 "사랑하면 매국노인가요"

*주의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씨네프레소-51] 영화 '색, 계'


일각에선 최근 영화계가 소수자 서사에 매몰돼 있다고 지적하지만, 영화는 매체 특성상 아무래도 소수자를 조명하기가 쉽다. 일상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현재와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세계관을 넓히고자 하는 것은 영화를 관람하는 오래된 동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수자란 꼭 성소수자나 소수 인종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다수와는 다른 선택을 내린 소수의 삶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와 문학, 연극의 소명이다. 예술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쩌면 더 오랜 기간 신분제와 인종차별, 신정(神政)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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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는 친일파와 사랑에 빠진 여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리안 감독의 '색, 계'(2007)는 일본 제국주의가 세를 확장하던 시기 친일파를 사랑하게 된 중국인 여성을 그린 영화다. 그녀는 더군다나 친일파 처단이란 중차대한 임무를 맡고 있었기에 더욱 큰 딜레마에 봉착한다.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는 그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친일파를 사랑한 그녀는 친일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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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를 사랑하면 친일파가 되는 걸까. 정의를 세우기 위해선 개인의 감정은 오로지 도구로만 활용해도 괜찮은가.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를 미인계로 꾀어 암살하겠다

주인공 왕자즈(탕웨이)는 1930년대 후반, 홍콩 링난대학에 입학한다. 광저우 출신인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난징이 일본군에 점령당하자 피난을 위해 홍콩에 가게 됐다. 광위민이라는 선배를 사모하게 된 왕자즈는 그의 권유에 따라 연극 서클에 가입하고 그곳에서 시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연극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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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즈가 흠모한 광위민은 애국심이 강한 인물이다.

그러나 나라를 향한 광위민의 사랑은 연극을 통해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 괴뢰 정부인 왕징웨이 정부의 방첩기관장 이모청(량차오웨이·양조위)이 홍콩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연극부원들을 변장시켜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왕자즈는 밀수 사업가인 막 부인으로 분해 그를 미인계로 꾀어 죽이는 핵심 역할을 맡겠다고 자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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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즈는 친일파 이모청을 제거하기 위해, 마작 모임에 들어가게 된다.

위험을 무릅쓰겠다는 왕자즈의 동기는 일차적으로 선배인 광위민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단지 선배의 환심을 사기 위한 목적으로 목숨을 내놓고 스파이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마음속엔 일제, 그리고 친일파에 대한 분노가 있다. 궁핍한 동포들의 생활상을 비추는 그녀의 '시점 숏'(캐릭터 시점에서 보이는 것을 보여주는 숏)이 이를 보여준다. 일제에 저마다 줄을 대서 부유하게 살고 있을 마작 모임의 인물들이 비싼 차를 마시고 쿠키를 먹는 동안, 그녀의 동포들은 빵 한 조각을 구하기 위해 거리에서 긴 줄을 선다. 친일파들이 부정한 권력과 결탁해 호의호식하는 동안, 거리에서는 동포들이 일본 군경의 폭력에 무릎을 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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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은 그녀의 마음에 분노를 남겼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 친구와 생이별을 하게 만들었다.

친일파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연극부원들의 첫 암살 계획은 허무하게 실패한다. 의심이 많은 이모청이 상하이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년 뒤 왕자즈는 일제 치하인 상하이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광위민을 다시 만난다. 국민당 요원의 눈에 든 광위민과 연극부원들은 상하이에서 이모청 암살을 지속적으로 도모하고 있었다. 왕자즈는 이들과 함께 다시 한번 애국을 위한 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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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동포들의 생활상이 그녀 눈에 자꾸 밟힌다.

이모청은 왕자즈와 재회한 뒤 자기 마음에 보다 솔직해진다. 이모청은 그녀가 스파이가 아닐 것이라고 믿고 둘 사이를 본격적인 연인 관계로 발전시킨다. 이모청이 왜 왕자즈를 신뢰하게 됐는지 영화는 몇몇 대사를 통해 들려주지만, 크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진 않는다. 어쩌면 이모청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었을지 모른다. 민족을 배신하고, 자국민에겐 매국노로 취급받으며, 늘 암살당할 것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한 친일파의 삶에도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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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눈다.

왕자즈는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가짜 사랑'을 연기하는 동안 '진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영화는 왕자즈가 이모청에게 빠지는 과정에서 그녀를 위한 변명거리를 늘어놓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모청은 원래 그렇게 나쁜 매국노가 아니었다든지, 왕자즈가 이모청을 갱생시킬 길을 발견했다든지 하는 서사가 별로 없다. 그런 변명거리가 깔려 있었다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딜레마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 오히려 방해됐을 것이다. 감독은 친일파, 매국노로서의 이모청 본질은 그대로 남겨둔 채 일종의 독립운동가인 왕자즈가 그에게 빠져들도록 함으로써 또렷한 질문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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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둘의 사랑에 변명거리를 마련해주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그저 매력적인 남녀가 서로의 매력에 자연스레 빠지는 과정을 그려낸다.

그건 국가를 위한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민족 반역자와 사랑에 빠진 그녀를 정죄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친일파를 제거한다는 대의명분을 잊을 정도로 그녀는 이모청에게 매혹된다. 개인의 감정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명보다 더 뒤에 놓여야 하는 것인가. 세상을 구하고 자기 인생의 사랑을 죽음으로 몰아간다면, 왕자즈는 제정신으로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영화는 무엇이 정답인지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왕자즈가 사랑을 지키기로 결심하면서 연극부원들의 작전은 수포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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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국민당 요원들과 연극 부원들은 그녀를 반일을 위한 도구로 활용할 뿐이었다. 이모청 앞에서 더 이상 연기하지 못하겠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작전의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명령에 묵살된다. 반면, 이모청은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친일과 반일, 이분법 속에 묻혀 버린 다양한 삶의 결

친일파를 사랑해서 목숨을 살려준 그녀의 행위는 친일인가. 왕자즈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선뜻 그렇게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모청은 분명한 친일파이지만, 그를 사랑한 왕자즈의 동기를 친일로 설명하는 건 무리다. 오히려 이 영화는 친일과 반일로 세상을 나누는 '흑백의 경계선' 주변에는 친일로도 반일로도 설명되지 않는 다양한 색깔이 존재함을 이야기한다. 친일 또는 반일로 똑 부러지게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삶의 맥락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영화를 포함한 예술은 본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색을 보여줌으로써 인식의 지평을 확장해주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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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는 베니스 국제 영화제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안았다.

'색, 계'는 2007년 작품이고, 원작 중편소설은 1950년대에 창작이 시작돼 1979년 발표됐다. 대만 영화 감독인 리안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중국계 미국인 장아이링은 약 70년 전에, 친일과 반일이라는 이분법 속에 묻혀버린 개인의 감정을 예리하게 발라내 보여준 것이다. 2022년의 한국에서는 아직도 남의 행위를 쉽게 비판하기 위해 '친일파'나 '김일성주의자' 같은 프레임을 씌운다. 이 프레임은 여전히 강력해서 비판받는 사람의 원래 주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져버리고 친일이냐 아니냐, 종북이냐 아니냐에 대한 싸움만 남긴다. 우리 사회는 다름에 대한 이야기가 과잉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부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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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색, 계' 포스터.

장르: 로맨스·드라마·역사


관람가: 청소년관람불가


감독: 리안


출연: 량차오웨이(양조위), 탕웨이


평점: 왓챠피디아(3.6/5.0),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72%) 팝콘지수(84%)


※2022년 10월 14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OTT):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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