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황 질릴 때쯤 향신료 ‘톡톡’ 재료도 요리법도 ‘무한 변주
만족도 높은 만만한 카레
생각해보면 기억에 남은 첫 캠핑은 초등학교 시절 걸스카우트 등에서 추진한 야영 이벤트였다. 부모님을 따라서 바닷가 옆 텐트에서 큰 대(大)자로 뻗어 자는 그보다 어린 시절 사진도 있지만 역시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이 가장 생생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나름 우리 손으로 야영을 해보는 경험이 뇌리에 박힌 모양이다.
익숙한 대낮의 학교가 아닌, 텅 비어서 낯선 느낌의 학교에 우리끼리 마치 그저 놀러 온 것처럼 들어가는 비일상적인 경험. 학교 운동장 옆을 빙 둘러 여기는 걸스카우트, 저기는 보이스카우트, 그 옆은 아람단과 우주소년단이 차례로 구역을 정해 놓고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텐트까지 전부 우리 손으로 쳤는지는 요만큼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초등학생인데 우리 힘만으로 텐트를 쳤을 것 같지는 않기도 한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카레 만들기 팀이었던 것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각자 나누어서 당근과 양파, 감자와 쌀을 가져오고, 누군가는 개수대에서 쌀을 씻고, 양파 껍질을 벗기며 눈이 매워 괴로워하면서 고사리손으로 채소를 썰었다.
사실 우리 텐트만 카레 만들기 팀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한 집 건너, 아니 한 텐트 건너 한 곳마다 모두 카레 가루를 풀풀 날리며 돌아다녔다. 아이들이 사고를 치지 않는지 돌아다니며 살피며 텐트마다 밥을 잘했는지 보겠다던 담당 선생님은 사방에서 카레 냄새를 맡으니 먹기도 전에 물린다며 웃었다. 저녁 한 끼만큼은 재료를 가져오고, 밥을 해서 나누어 먹고 설거지를 하는 것 정도는 초등학생들이 우리끼리 첫 야영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기분이 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러기에 적당한 난도를 가진 음식이 카레였던 것이다.
한국·일본·인도식 입맛 따라 선택…요구르트 넣은 ‘난’ 곁들이면 금상첨화
지금도 여럿이 모이거나 캠핑을 가면 가장 만만한 메뉴로 카레가 떠오른다.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는 남녀노소가 좋아하는 음식, 원하는 채소와 고기를 넣고 푸짐하고 배부르게 한 끼를 해결해주는 메뉴, 한 통 가득 만들어서 대인원이 나누어 먹기에도 좋은 음식. 양을 늘리기 수월하고, 오히려 많이 만들어서 오래 익히고 다음날까지 묵힐수록 맛이 더 좋아진다. 또한 돈가스나 튀김, 샐러드처럼 토핑과 사이드 메뉴를 곁들여서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도 있고, 밥 대신 우동면을 더하듯 취향에 따라서 베이스를 달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 먹는 사람만큼이나 만드는 사람도 쉽사리 질리지 않는다. 나이가 들고 요리 기술이 늘면 느는 대로 난이도를 마음껏 조절할 수 있는 메뉴이기 때문이다. 간신히 냄비밥을 짓고 당근과 양파, 감자를 썰어 넣고 강황이 가득 들어가 샛노란 국산 카레 가루로 국처럼 멀건 카레를 끓이는 데에만 두어 시간이 필요한 초등학생도 만들 수 있고, 양파만 산처럼 썰어서 한 시간 동안 볶아 캐러멜화하는 것으로 카레 만들기를 시작하는 어른도 내 마음대로 각자의 레시피를 고안할 수 있다.
소 힘줄을 압력밥솥에 푹 삶아 육수와 고명으로 넣어 볼까? 연근과 우엉과 당근을 넣는 대신 튀김옷 없이 아삭아삭하게 튀겨서 얹어 볼까? 초콜릿과 커피를 넣으면 맛있게 걸쭉해진다던데, 내 카레 맛의 비결로 삼아 볼까? 어릴 적에 먹던 어머니의 그리운 포근한 카레 맛, 내가 이것저것 테스트해서 만들어내 이제 여기 길든 내 카레 맛. 가끔 ‘우리 집 카레에는 무엇이 들어가는가’를 주제로 이야기에 불이 붙으면 온갖 아이디어가 흘러나온다. 만들기 쉽고, 변주도 쉽고, 나라마다 요리법이 조금씩 달라 도전해보기도 좋은 메뉴. 그야말로 무적의 가정식이자 캠핑식이다.
찬장 속 향신료 여행
그리고 이제 카레는 내 찬장의 지분을 꽤나 차지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원래는 각 브랜드의 카레 가루와 고형 카레를 사다 색다르게 만드는 정도였지만 이제 난도를 더욱 올려 향신료부터 조합하는 카레에도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당이 안 되는 향신료 찬장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참으로 설명이 잘되어 있는 이국적인 요리책을 보거나 맛있고 향기로운 음식으로 이름난 곳으로 여행을 가면 마치 이 향신료만 있으면 나도 이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바리바리 사들이게 된다.
그렇게 내 냉장고에는 레몬 향이 나는 허브인 레몬그라스와 우리의 생강과 비슷한 채소 갈랑갈이 냉동되어 있고, 두반장과 트러플 페이스트와 머스터드 3종이 공존하고, 흑초와 애플 사이더 비니거와 현미 식초가 나란히 서 있는 찬장 뒤편에는 인도와 동남아와 일본 커리를 동시에 만들 수 있는 모든 향신료가 함께 아웅다웅 살아가고 있다. 가끔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을 싹 내버릴 때마다 죄책감이 치고 올라오지만 ‘다시는 사지 않겠어!’라고 생각하다가도 종려당(코코넛 설탕)이나 페누그릭(호로파) 잎이 필요하다는 레시피 지침을 읽고 있노라면 이번만큼은 진짜 다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가끔은 이번 주말 캠핑에서 무슨 요리를 할지 고민할 때, 향신료 찬장을 열어보곤 한다.
캠핑장에서는 조금 더 손이 많이 가고 평소에는 떠오르지 않았던 음식도 집중해서 만들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집에서는 서 있느니 앉고 싶고, 앉아 있느니 눕고 싶고, 누운 김에 뒹굴다가 한잠 자고 싶다. 물론 캠핑장에서도 쉬고 놀고 자곤 하지만, 평소에 게으름을 피우던 공간에서 벗어나서인지 자꾸 새로운 일을 벌이고 싶다는 의욕이 치고 올라온다.
그럴 때 만든 것이 인도식 달 마크니 커리다. 집에서 만드는 카레는 냉장고 청소용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인도식 커리도 비슷하게 간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 다만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크게 구성을 나누자면 버터와 마늘(과 양파), 향신료, 토마토 통조림, 콩 통조림, 여기에 크림이나 우유가 달 마크니를 구성하는 요소다. 버터에 마늘과 양파 등의 채소와 향신료를 넣어서 충분히 향이 나도록 같이 볶은 다음, 토마토 페이스트나 통조림을 넣고 또 충분히 볶고, 나머지 재료를 넣어서 푹 익히는 것이다. 참고로 토마토는 볶은 양파와 함께 맛있는 일본 카레를 만드는 데에도 대활약하는 재료다. 감칠맛과 꼭 필요한 산미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달(dahl)은 인도어로 렌틸 등의 콩, 그리고 그로 만든 요리 등을 뜻한다. 그러니 여기에는 콩이 들어간다. 특히 렌틸콩이나 병아리콩을 주로 사용하고 여기에 토마토를 넣어서 부드럽고 걸쭉하게 만드는 것이 포인트다. 매운 커리를 좋아한다면 향신료에 고춧가루 종류를 늘리면 된다. 정말로 향신료와 통조림만 잘 갖추고 있으면 뭐든 넣어 볶으면 완성되는 음식이다. 한국식, 일본식, 인도식 커리 모두 여러모로 신기할 정도로 찬장에 보관할 수 있는 재료로만 만들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추운 날씨의 캠핑에 필수인 화목난로에 그리들을 올려놓고 뭉근하게 원하는 국적의 커리를 끓이자. 밥을 짓고 우동을 삶고 김치를 꺼내자. 향신료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요구르트를 넣어 발효시킨 난 반죽을 얇게 펼쳐 구워도 좋다. 마늘버터를 쭉쭉 바르고 허브를 뿌리면 내가 있는 곳이 가평이 아니라 인도가 아닌가 싶다. 자연 속 비일상의 체험, 맛으로 떠나는 세계 여행의 체험. 매일 다니던 학교가 낯설어 보이던 ‘운동장 야영’의 추억이 키운 캠퍼의 주말이 깊어간다.
달 마크니 커리
재료
버터 10g, 마늘 3~4쪽, 양파 1/2개, 페누그릭 잎 1큰술(생략 가능), 쿠민 1/2큰술, 코리앤더 씨 1/2큰술, 가람 마살라 1큰술, 병아리콩 통조림 1개, 렌틸 통조림 1개, 토마토 페이스트 1/2컵 또는 토마토 통조림 1개, 크림약간, 소금
만드는 법
1. 버터를 녹여서 다진 마늘과 양파를 넣고 볶는다.
2. 모든 향신료를 넣고 향이 올라올 때까지 볶는다.
3. 토마토 페이스트나 통조림을 넣고 으깨가면서 달달볶는다.
4. 물기를 제거한 병아리콩과 렌틸을 넣는다.
5. 주걱으로 살짝 눌러 으깨면서 뭉근하게 익힌다.
6. 크림을 두르고 간을 맞춘다.
정연주 푸드 에디터
캠핑 다니는 푸드 에디터, 요리 전문 번역가. 르 꼬르동 블루에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요리 잡지에서 일했다. 주말이면 캠핑카를 타고 떠나는 맛캠퍼로 ‘캠핑차캉스 푸드 라이프’ 뉴스레터를 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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