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스케이트장에 배 띄웠다…'한산' 학익진 전투신의 비밀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박해일이 연기한 이순신 장군이 조선을 침략한 왜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 장면이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
“과분할 정도로 좋은 평을 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역대 흥행 1위 ‘명량’(2014)을 잇는 이순신 장군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으로 돌아온 김한민(53) 감독의 말이다. 개봉 사흘째인 29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그는 코로나19로 달라진 극장가 분위기에 긴장하면서도 관객들의 호평이 반가운 눈치였다.
27일 개봉한 ‘한산’ 관객 수는 첫날 누적 40만명으로 출발해 닷새 만에 200만에 육박했다. 손익분기점 600만명에 성큼 다가섰다. 430년 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첫 번째 압승인 한산대첩을 박진감 있게 구현한 51분여 해전 액션이 주목받았다. “애국심이 차오른다” “거북선이 사이다였다” “하늘엔 탑건, 바다엔 한산”(이상 네이버‧메가박스 실관람평) 등의 호응이 보인다. 몰입형 전투기 액션으로 N차 관람을 부르며 693만 관객을 동원한 ‘탑건: 매버릭’에 이어 ‘한산’도 극장에서 봐야 더 재밌는 영화로 입소문이 났다.
“이순신, 민주화 중심 된 '의' 실천한 인물”
1761만 흥행작 '명량' 이후 8년만에 후속작 '한산: 용의 대첩'을 선보인 김한민 감독을 개봉 사흘째인 29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
전작 ‘명량’보다 신파를 덜고 왜군 장수 캐릭터를 균형 있게 표현한 점도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가다. 조선 대 일본의 전투지만 같은 진영 내부에서 이순신(박해일)이 중시한 의(義)와 불의(不義)의 대립각을 강조했다. 8년째 깨지지 않은 ‘명량’의 역대 최고 1761만 흥행이란 기록이 제작진에겐 부담감으로 작용했을 터다. 19일 언론 시사 후 기자간담회에서 김한민 감독은 “‘명량’은 기대하지 않았던 흥행이었다”면서 “당시 시대적으로 두 달 전 멀지 않은 해역에서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민초들, 백성들이 배를 구하는 영화 속 모습이 상처받은 국민에 위로가 된 것 같다. 그런 사회적 함의를 영화가 담아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명량’을 통해 배웠다”고 했다. “그 뒤로 ‘한산’ ‘노량’까지 3부작을 준비하며 이순신 이야기를 잘 만들어가고자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왜 이순신이었을까. 개봉 전인 21일 인터뷰에서 그는 “이순신 장군은 정치적으로 가장 오염되지 않은 역사적 인물”이라 운을 뗐다. “충직한 장수 이미지에 더해 백성과 임금의 중간에서 지금 시대에 필요한 통합‧화합의 정신을 담은 절묘한 위치에 처해 있다”면서 “격변의 근현대사를 관통해 지금의 민주화를 이루기까지 그 중심이 된 ‘의’를 실천한 핵심적 인물로서 이순신의 해전을 다시 각인하고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작품 의도를 밝혔다.
최민식의 불같은 이순신, 박해일의 차가운 이순신
한산대첩은 조선이 임진왜란 발발 15일 만에 한양을 빼앗긴 위기에서 56척의 조선배가 73척 왜선과 맞서 47척을 격파하며 대승한 전투다. 배우 최민식이 용맹한 장수(勇將‧용장) 이순신을 연기한 ‘명량’이 12척 배로 330척 대군을 물리친 기적 같은 대승을 그렸다면 ‘한산’은 수세의 국면을 차갑게 파악한 이순신의 전술을 쫓아간다. 배우 박해일이 주연을 맡아 치밀한 학익진(鶴翼陣)과 거북선 전술을 펼친 지혜로운 장수(智將‧지장)의 면모를 설득력 있게 부각했다. 올겨울 개봉 예정인 ‘노량: 죽음의 바다’에선 김윤석이 주연을 맡아 현명한 장수(賢將‧현장) 이순신의 활약으로 3부작의 마침표를 찍는다.
김한민 감독은 “‘명량’은 뜨거운 불처럼 격정적인 이순신이라면 ‘한산’에는 물처럼 주변을 포용하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이순신의 모습이 있다”면서 “마블 영화, 허구의 인물이라면 이상하겠지만 역사 속 인물이어서 배우를 바꿔도 괜찮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조선 문신 류성룡이 임진왜란 기록 『징비록』에서 이순신을 “영명한 눈빛이 마치 선비와 같았다”고 묘사한 걸 보고 전작 ‘극락도 살인사건’(2007) ‘최종병기 활’(2011)을 함께한 박해일이 곧장 떠올랐단다.
다른 캐스팅도 바꿨다. ‘명량’의 명장면을 만든 정씨 여인(이정현)의 젊은 시절을 ‘한산’에선 김향기가 맡았다. 부하를 방패막이 삼는 일본 주군을 등지고 위기에 앞장서는 이순신의 편에 선 일본 장수 준사 역은 ‘명량’에선 일본 배우 오타니 료헤이가 맡았지만 ‘한산’에선 배우 김성규가 맡았다. 김한민 감독은 “바뀐 이순신 중심으로 캐릭터 궁합을 맞추다 보니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배우들이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학익진·거북선 "실제 전투 적합하게 간결·명징 표현"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조선 수군의 배가 학익진 대열을 갖춘 모습이다. 조선 장수들의 장기와 특징을 철저히 파악한 이순신 장군이 그에 맞게 각 배의 위치를 일일이 정하는 장면도 나온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
바다 위에 학이 날개를 펼친 모양으로 배를 배치해 적진을 포위한 학익진 전법은 왜군 장수 와키자카(변요한)의 전술을 이순신이 역이용하는 구도로 표현했다. 체계적인 진법 묘사를 위해 ‘명량’ 때 바다 위에 배를 띄워 촬영한 것과 달리 ‘한산’은 강원도 평창 실내 스케이트장에 3000평 규모 세트장을 짓고 움직이는 기계장치에 선박 세트를 얹어 촬영했다.
학익진·거북선은 많지 않은 사료를 토대로 실제 전투에 적합한 형태를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최대한 간결, 명징하게 관객에게 다가가려 했다”는 그는 “원균(경상우수사), 이억기(전라우수사)의 함대가 좌우측에서 매복해 들어오며 조립식 학익진을 형성했다는 설도 있는데 그러면 너무 복잡해서 외줄 학익진으로 표현했다”고 했다. 거북선에 대해서도 그는 “형태나 용도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아, 진짜 전장에 쓰일 수 있는 돌격선에 중점을 뒀다”고 했다. 가장 많이 제기되는 3층형과 2층형 거북선을 각각 임진왜란 초기 모델과 날렵하게 개조한 신형으로 나란히 등장시켰다. 해전의 강렬한 사운드를 포기할 수 없어 관객 불편이 없도록 한국말 대사 일부를 자막으로 넣었다.
꼭 필요한 장면만 찍기 위해 해전 장면은 사전에 컴퓨터그래픽(CG) 애니메이션으로 가상 제작해보기도 했다. 4개월간 전체 해전의 70% 분량을 제작하다 멈췄다. “촬영도 하기 전에 진이 빠지더라고요. 나머지 부족한 건 현장에서 채웠죠. ‘아바타’처럼 본편에 들어갈 애니메이션을 작업하는 SF 영화를 기획하면 재밌겠단 생각은 들더군요.”
해전 전까지의 서사가 단조롭다는 비판에 대해선 김한민 감독은 “드라마 따로, 해전 따로가 아니라 캐릭터를 드라마로 쌓아나가다가 해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면서 “해전 분량이 ‘명량’의 61분보다 10분 짧긴 하지만, 훨씬 더 강렬한 임팩트를 주지 않았나 한다”고 자평했다.
3부작 완결 '노량' 해전 장면은 70분 넘어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촬영 현장 비하인드. 3000평 규모 실내 VFX 세트장에서 움직이는 기계 장치 짐벌 위에 선박 세트를 올려 촬영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는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인물, 민초들의 활약도 묘사된다. 사진은 거북선 설계자 나대용 장수. 최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tvN), 천만영화 '범죄도시2'로 주목받은 배우 박지환이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
‘한산’은 ‘명량’의 2배 넘는 총제작비 312억원을 투입했다. 비슷한 규모의 ‘노량’도 이미 촬영을 마쳤다. ‘노량’ 역시 ‘한산’ 못지않은 도전이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7년사에서 가장 사상자가 많았던 엄청난 난전이었죠. 겨울 전투고, 4분의 3이 밤 전투예요. ‘노량’은 해전 장면이 70분 넘을 겁니다. 색온도를 순식간에 바꿔 낮과 밤 장면 촬영 전환이 빠른 LED 라이팅을 국내 최초로 시도했습니다.”
그가 감독이자 제작자(제작사 빅스톤픽쳐스 대표)로서 이순신 영화에 뛰어든 세월은 올해로 12년째다. 2010년 ‘명량’ 준비에 착수했다. 초대형 프로젝트여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끼고 읽는다”고 했다. “어렵고 답답한 시기에 열심히 하셨던 걸 보면 마음에 위안이 온다”면서다.
이순신 다음은 대일항쟁기 3부작 "日관객 봐주길"
이순신 3부작이 끝나면 ‘대일항쟁기’ 3부작 제작에 돌입한다. 빅스톤픽쳐스가 제작하고 원신연 감독이 연출한 영화 ‘봉오동 전투’(2019)를 잇는, 한국 여성 최초 독립군 비행사 권기옥을 그린 영화 ‘강철날개’, 청산리 전투를 다룬 영화도 제작할 예정이다. “봉오동 전투를 공식적인 시발점으로 대일항쟁의 시기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회복됐다”는 그는 “일제강점기란 표현 대신, 대일항쟁기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한민 감독은 “일본 관객들도 ‘한산’을 꼭 봤으면 좋겠다”며 덧붙였다. “지금 일본은 뭔가 방향성을 잃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지지받는 이념이나 사상이 없죠. 그러다 보니 극우 패권주의적인 군국주의 시기로 회귀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인류를 위한 것은 결국 ‘의’가 될 것이고 400년 전 바로 그 ‘의’를 쫓은 전쟁이 그들과 우리에게 있었죠. ‘한산’을 통해 같이 공감하면 좋겠습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