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쓸모없다"며 버렸다…세계 유일 '기장 짚불 꼼장어' 탄생기
현지 인문학자 14명이 풀어낸 『부산미각』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맛있다. 타지를 여행하는 방법 중 최고는 현지인의 안내를 받는 것이다. 부산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연으로 모인 인문학자 14명이 부산의 맛과 역사를 재밌게 풀어낸 책 『부산미각』을 출간했다. 대부분 부산에서 나고 자란 저자들은 돼지국밥부터 꼼장어까지, 어릴 때부터 먹어온 밥상을 중심으로 부산이라는 도시가 품은 방대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엮었다.
책을 기획한 최진아 부산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부산은 융합이 계속 이루어지는 독특한 지역”이라며 “모든 것을 한데 넣고 끓여내는 커다란 가마솥 같기에 가마솥 부(釜)를 쓴 지명처럼 대륙과 해양을 통 크게 품고 있다”고 했다. 김경아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해양도시로서의 지형적 특성과 한국전쟁 당시 전국 각지에서 밀려든 피란민의 생존의 역사가 현재 부산의 문화와 미각을 만들어 낸 두 개의 축”이라고 했다.
잡힌 고등어 80% 모이는 부산서 고갈비 탄생
아궁이에 짚불을 붙이고 꼼장어를 굽는 기장 ‘짚불 꼼장어 구이’. 새까맣게 탄 껍데기를 벗겨내면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이것을 철판 위에 올려 따뜻하게 덥혀 먹으면 별미다. 송봉근 기자 |
무용지용(無用之用). “사람들이 쓸모 있음의 쓸모는 잘 알고 있으나 쓸모 없음의 쓸모는 알지 못한다. 쓸모 있음은 쓸모 없음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니 쓸모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쓸모 있음이 어찌 쓸모 있겠는가”라고 한 장자의 말이다. 책에서 ‘꼼장어’ 편을 쓴 나도원 부산대 중어중문학과 강의교수는 “꼼장어처럼 역사와 시대의 굴곡을 따라 쓸모 있고 없고를 반복한 물고기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꼼장어의 껍질만 가져다 나막신 끈, 모자 테두리 등을 만드는 데 썼다. 쓸모 없는 고기는 버려졌고 이를 배고픈 한국인이 가져다 구워 먹었던 게 꼼장어 구이의 시초다. 나 교수는 “일본 패망 후에는 꼼장어 껍질보다 고기가 더 쓸모 있어졌다”며 “춘궁기에 꼼장어를 짚불에 던져 구워 먹으며 굶주림을 해결했던 게 오늘날 ‘기장 짚불 꼼장어’인데 세계 어디에도 없는 부산만의 독특한 음식”이라고 했다. 비행기와 땅 위의 탁자와 의자 빼고는 다 먹는다는 중국 사람들도 꼼장어는 못 먹는다. 나 교수는 “부산 사람들이 말투도 세고 거칠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속정 많은 사람들이다. 억척같이 살아내기 위해 거친 생활력으로 버텼을 뿐”이라며 “윗세대가 어떤 마음으로 꼼장어를 먹었겠나 생각하면 안타깝고,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을 반복하며 버틴 꼼장어를 보면 한국전쟁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에서 소외당한 부산과 참 닮은 음식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부산미각』 표지. 송봉근 기자 |
부산 사람들의 소울푸드인 ‘돼지국밥’ 이야기도 지난한 부산의 역사와 닮았다. 고혜림 부산대 평생교육원 강의교수는 “광복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값싸고 양 많은 식재료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간절함이 돼지국밥을 탄생시켰다”며 “부산 토박이들에게 물어도 ‘부산 돼지국밥’ 맛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이유는 전국의 돼지음식이 부산에 모여 ‘부산 돼지국밥’으로 정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도 ‘부산스러움’을 짚는다면 간을 거의 안한 국물에 센 양념으로 무친 정구지(부추의 부산 사투리)를 넣어 각자의 입맛에 딱 맞게 국물 맛을 만들어 먹는 것이 아닐까. 고 교수는 “부추는 20대에 처음 들은 말(웃음)”이라며 “정구지(精久持)의 한자가 ‘오랫동안 부부간의 정을 유지한다’는 뜻으로 남자들의 건강에 좋다고 알려져 있는데, 고기 국물이니까 채소와 함께 영양소 균형을 유지하려 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또 “뚝배기처럼 뭉근하다는 표현은 달아오르는 데 오래 걸리지만, 식는 것도 오래 걸려서 따뜻함이 오래 간다는 말”이라며 “경상도 사람들의 특징도 뚝배기 같아서 돼지국밥은 여러 모로 부산 사람들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고 했다.
『부산미각』을 읽는 또 다른 재미는 한·중·일 식문화의 비교다. 한자로 된 옛 문헌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저자들은 동일한 재료가 부산에서는 중국·일본과 다르게 활용되고, 또 중국·일본을 통해 유입돼 새로운 미각으로 탄생한 부산 음식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한다.
중국은 완탄, 일본은 완탕, 한국은 완당
새벽 배송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재첩국 아지매들’의 1980년대 모습. “재첩국 사이소” 를 외치던 정겨운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진 사하구청] |
일종의 만둣국인 ‘훈툰’을 중국 광둥 지역에선 ‘완탄’이라 불렀는데, 완탄이 일본으로 전해져 ‘완탕’이 되고, 부산으로 들어와 ‘완당’이 됐다는 이야기 등이다. ‘완탄’은 돼지 사골, 말린 새우, 생선 등 다양한 식재료로 국물 맛을 내고 ‘완탕’은 주로 닭고기로만 진한 국물을 내는데 반해 부산의 ‘완당’은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을 우려낸다는 점도 재밌다. 음식을 통해 한·중·일이 어떻게 각자의 문화를 융합·창조해 왔는지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부산을 새롭게 발견하는 맛도 쏠쏠하다. 우리나라 연근해에서 잡히는 고등어 중 80% 이상은 부산공동어시장을 거친 뒤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그래서 ‘고갈비’의 시작도 부산이다. 바다와 낙동강이 만나는 갯물지역 갈대숲에선 5월이면 “우웅~”하고 우는 ‘웅어’가 잡히고, ‘동래파전’은 대합·오징어 같은 해산물과 소고기를 섞고 계란 물까지 얹은 육·해·공 집합체라는 것, 계란 프라이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부산 간짜장 이야기 등은 읽을 수록 빠져든다.
지난 2월 『미쉐린 가이드 부산』이 처음 발표되고 큰 화제가 됐지만, 정작 부산 사람들은 “부산의 특색이 전혀 없는 리스트”라며 불만이 많다. 돼지국밥이나 밀면처럼 부산의 찐 향토 음식보다 초밥·파스타 등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음식들이 주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부산미각』과 저자들의 노력은 귀하다. 요즘처럼 로컬 컬처가 중요한 때, 지역 문화 콘텐트를 인문학과 함께 이렇게 정성스럽고 맛깔스럽게 소개한 책은 드물다. “재첩국 사이소”를 외치며 새벽을 열던 아지매들처럼 이미 사라진 풍경을, 어쩌면 앞으로 사라질 지 모를 현장을 이처럼 생생하게 기록한 책도 없다. 무엇보다 부산으로 가고 싶게 만든다.
■ 『부산미각』 저자들의 추천 맛집
18번 완당집
18번 완당집 |
1948년 문을 열고 3대째 이어지는 완당집으로 동아대 건너편 부용동과 남포동에 각각 있다. 가장 잘 하는 노래를 18번이라고 부르듯 가장 맛있는 완당을 만들고자 상호명도 ‘18번 완당집’이라고 지었다. 시간당 70~80개의 완당을 빠른 속도로 빚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수연 횟집
수연 횟집 |
부산에서 5월이면 꼭 먹어야 할 제철 음식이 바로 웅어회다. 대가리 떼고 비늘 긁고 통으로 어슷하게 썰어 회로 먹는데 기름기가 많아 고소하다. 적당히 회를 먹고 상추 찢어 초고추장에 버무려 먹으면 이 또한 별미. 웅어 마니아들에게 소문난 집으로 사전 예약이 필수다.
소문난 동래파전
소문난 동래파전 |
동래 온천장 주변 소문난 맛집으로 ‘백종원의 3대 천왕’에도 소개됐다. 홍합·오징어 등의 해산물과 쇠고기를 다져 파와 함께 지지다가 맨 마지막에 계란 한 개를 깨뜨려 얹는다. 접시에 알맞게 네모난 모양으로 부치는 게 특징. 정구지전·도토리묵 등 안주거리가 풍성하다.
구산동 돼지국밥
구산동 돼지국밥 |
김해시에 있다. 이분도체한 돼지를 직접 받아 살코기와 함께 족발·등뼈·다리뼈 등을 다 같이 넣고 국물을 우려내기 때문에 일반 사골로만 끓인 국물과는 차별화된 맛을 즐길 수 있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느낌이라 돼지국밥이 낯선 사람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기장 해변 짚불 곰장어
기장 해변 짚불 곰장어 |
1층에 따로 마련한 옛날식 아궁이 화덕에서 짚불을 높게 피우고 꼼장어를 통으로 철망에 올려 구워낸다. 은은하게 밴 짚불 향과 꼬득꼬득한 꼼장어의 식감이 제대로 어우러져 식욕을 돋운다. 짚불구이+고추장 양념구이+매운탕을 다 맛볼 수 있는 스페셜 세트 메뉴도 있다.
부산=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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