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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1시에 일어나 도스토옙스키 번역하는 엄마CEO, 김정아

중앙일보

도스토옙스키 번역가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 기업 대표인 김정아 씨. 김상선 기자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에겐 두 명의 안나가 있다. 그의 속기사이자 아내였던 안나와, 21세기 한국의 번역가인 안나, 김정아(53) 대표다. ‘안나’는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시절 교수님이 지어주신 러시아 이름. 김정아 대표는 “도스토옙스키를 나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였던 안나뿐”이라고 자신한다. 그런 그가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 『백치』(지만지)의 예판을 낸다. 정식 출간은 다음달이지만, 이번달 11일이 도스토옙스키의 200번째 생일(11일)이라는 점을 기려 이번 달 예판을 고집했다. 지난해 『죄와 벌』 번역본 출간에 이은 두 번째 산물이다. 『백치』는 김정아 대표가 개인적으로 가장 큰 애정을 품은 작품이라 그에겐 더욱 소중하다고.


김정아 대표는 세 가지 인생을 동시에 산다. 도스토옙스키의 번역가인 안나로서의 삶, 패션 기업 스페이스 눌의 최고경영자(CEO) 그리고 딸 둘 아들 하나의 어머니의 삶이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 그의 생활 패턴의 비밀은 새벽 1시에 있다. 남들이 침대에 몸을 뉠 법한 이 시간에, 그는 기상한다. 대신 저녁 8시에 잠이 든다. ‘저녁이 없는 삶’을 자청한 셈. 미국 유학 시절 어린 딸 둘을 홀로 키우며 동시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해야 했기에 그가 고안한 생활 패턴이다.


그는 “아이를 양팔에 안고 저녁 8시면 무조건 불을 끄고 잠이 들었고, 혼자 살짝 (새벽) 1시에 일어나 공부를 했다”며 “어렸을 때부터 10을 노력하면 3 정도만 얻는 삶을 살아왔기에 뭐든 일단 열심히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때는 왜 이리 내 노력에 비해 주어지는 게 적은지 운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10을 꾸준히 노력하는 게 내게 주어진 능력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히 여긴다”며 “10을 노력해도 0을 얻는 경우도 있는 게 인생이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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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의 수기』를 구상할 무렵의 도스토옙스키.

지성이면 감천이듯, 그의 노력은 여러 꽃을 피웠다. ‘서울대 멋쟁이’라고 불리던 그는 유럽의 알짜배기 명품 브랜드를 한국에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다수 확보한 기업의 CEO다. 밀레니얼과 Z세대, 즉 MZ가 열광하는 데바스티 등의 프랑스 명품 브랜드는 김정아 대표 없이는 한국에 제품을 판매하지 않는다. 그의 노력과 네트워크가 빚은 열매다. 그는 “의류를 판매한다고 해서 다 패션 기업이 아니고 각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며 “기업의 규모가 아니라 브랜드를 내 자식처럼 키우고 아끼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그도 인간은 인간이다. 매일 새벽 1시에 일어나는 건 쉽지 않지만 도스토옙스키를 생각하면 눈이 절로 떠진다. 그는 “도스토옙스키는 빚에 허덕이던 귀족이었지만 고뇌와 고통 속에서도 인류에 대한 따스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며 “미술에 (빈센트 반) 고흐가 있다면 문학엔 도스토옙스키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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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아 박사가 번역한 도스토옙스키. 출판사 지만지의 프로젝트다. 권당 20만원이 넘지만 대기자 명단이 벌써 길다고 한다. 김상선 기자

번역은 지난한 작업이다.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가 도스토옙스키 번역에 직접 나선 이유는 뭘까. 그는 “번역은 그 작품과 작가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하면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단어 하나에도 해석은 10가지가 가능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숫자에도 상징을 풍부히 쓴 작가에요. 『죄와 벌』의 소냐의 방에 창문이 3개 있는 건 삼위일체의 의미가 있고요. ‘4’라는 숫자는 각별합니다. (유럽의 0층이 한국의 1층이기에) 건물 4층을 5층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요. 나자로가4일만에 부활하는 게 4부 4장에 나오는 것도 다 의미가 있거든요.”


출판사 지만지의 이번 도스토옙스키 번역 프로젝트는 사실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엄두가 안 날 프로젝트다. 부드러운 고급 양가죽 양장에 24K 금박 장식을 공들인 각권의 가격은 20만원을 훌쩍 넘기만, 그래도 출판사에겐 적자다. 그럼에도지만지 출판사는 김 대표에게 “도스토옙스키와 영혼의 스파크가 번쩍이는 번역”을 한다며 이번 프로젝트를 맡겼다고 한다. 궁극의 도스토옙스키인 셈.


도스토옙스키의 어떤 점이 그렇게 사랑스러울까. 김 대표는 “이어령 선생께서 ‘도스토옙스키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할 작가’라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레프) 톨스토이가 다소 교훈적이라면 도스토옙스키는 모든 캐릭터에 대한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고 ‘아름다움은 인류를 구원한다’는 믿음으로 작품을 썼다”고 설명했다. 그는 “번역가는 작가의 그림자여야 한다”며 “도스토옙스키의 그림자여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마지막 질문으로 그에게 세 가지 인생 중 가장 소중한 건 뭔지 물었다. 번역가로서의 삶을 꼽으리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엄마로서의 삶이죠. 아이들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저는 항상 얘기해요. 손해를 보고 살아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고요. 석복(惜福) 즉 복을 아끼고 나눠야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류애가 가르쳐준 교훈이기도 하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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