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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한겨레

탁하지만 기분좋은 통각 선사하는 피페린의 매운맛

후추의 종류와 역사, 매운맛의 비밀

한겨레

후추 열매. 홍신애 제공

대구에 가면 후추할매 떡볶이라는 가게가 있다. 여기 떡볶이는 극강의 매운맛을 자랑하며 전국구 맛집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먹어보면 후추가 마치 오랜 세월 먼지 쌓인 탁자 위 회색 표면과 같은 비주얼로 붙어있다. 떡볶이지만 고추장의 매운맛과 또다른 어떤 상쾌하면서 머리를 툭 치는 듯한 개운한 매콤함! 이 떡볶이에 사용된 것은 곱게 갈아 틴 케이스에 넣어 파는 이른바 ‘순후추’다. 특유의 미세한 가루에서 나오는 텁텁하고 탁한맛 덕분에 쫄깃하고 진득한 느낌의 떡볶이에 활력을 주는 셈이 되었다.


매운맛은 여러가지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맵다’라고 하면 고추가루가 많이 들어있거나 고추 자체가 매콤해서 혀가 아리고 입에서 불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을 말하는데 이건 고추의 캡사이신 성분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또 와사비나 겨자 등을 먹었을 때 목구멍이 칼칼하고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을 글썽이게 되는 매운맛은 시니그린 성분의 작용이다. 마늘의 알싸한 맛은 알리신, 혹은 입이 마비되는 마라맛도 우린 매운맛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후추는 어떤 매운맛일까?


후추의 피페린은 알칼로이드 성분의 일종으로 항산화 작용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후추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것은 향신료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항염, 항산화, 항암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치료 효과도 한몫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에는 현대와 같은 잘 관리된 환경에서 소를 사육하지 못했기 때문에 육향이 좀 진한 육류나 생선 등 요리에 이 후추를 사용했을 때 엄청난 맛의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소금과 함께 부패를 방지하고 맛과 향까지 잡아주는 역할을 했으니 높은 값어치로 여겨질만도 했다. 후추의 알싸한 피페린 성분은 입안을 화려하고 꽉 차게 해주면서 동시에 기분좋은 통각을 선사한다. 기름과 함께 어우러졌을 때 그 화려한 매운맛은 진가를 발휘하고 입 안에 꽉 찬 얼얼함에 숨을 내뱉으면 새롭게 느껴지는 시원한 느낌마저 사랑스럽다.


후추는 색깔별로 여러가지 종류로 나뉘는 듯 보이지만 사실 한 종류다. 후추가 덜 익은 것이 초록색을 내는 그린페퍼. 이때 열매를 수확해서 건조하면 검은색을 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블랙페퍼가 된다. 또 완전히 잘 익은 후추 열매를 따서 물에 불려 껍질을 까고 말리면 흰 후추가 된다. 한가지 후추 열매를 언제 따서 어떻게 건조하냐에 따라 세가지 맛과 색으로 나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알고 있는 빨간색의 후추는 같은 후추가 아니며, 레드 페퍼콘이라고 불리우는 남미가 원산지인 다른 식물이다.


한국에서 많이 사용되는 순후추는 블랙페퍼를 곱게 갈아 통에 담아 만든 조미료인데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후추다. 사실 후추도 커피처럼 향과 맛이 중요한 식품이어서 갈아놓고 몇 년을 먹는 것보다는 즉석에서 갈아 뿌려 먹는 게 훨씬 신선하고 향기롭고 맛있다. 후추를 120도 이상 가열했을 때 발암물질로 추정되는 아크릴아마이드 성분이 증가된다고 알려져 있으나, 뿌려먹는 후추의 적은 양을 생각해보면 그 효과는 미미하다고 볼 수 있다.


후추가 주재료인 요리는 없지만 고기요리나 기름이 많은 요리에 넣으면 향긋하고 가벼워지는게 불문율이다. 또는 중세 시절 귀족들이 부를 과시하기 위해 후추나 계피를 마구잡이로 넣고 만들던 음료가 발전되어 뱅쇼가 된 예가 있다. 뱅쇼는 레드와인에 오렌지, 레몬, 사과나 배 등의 과일과 함께 통후추, 통계피를 넣어 끓여 만들어 향긋하고 맛있다. 우리 고유의 디저트 요리 중 배숙도 배를 꿀과 함께 푹 끓여 만드는데, 여기에도 통후추를 배에 콕콕 박아 만들어 한국식 뱅쇼와도 같은 모습이다.


후추나무는 아이비같은 덩굴식물처럼 다른 나무나 기둥을 감고 위로 자란다. 인도 남부지역 후추의 원산지라고 알려져 있는 말라바르나 아자드힌드 등의 지역에서는 후추나무를 커피와 공생하고 커피나무에게 그늘막을 제공하는 셰이드트리로 키우기도 한다.


홍신애 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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