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 백반’ 푸짐 한상…맛과 멋이 어우러진 따뜻한 남쪽 나라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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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전남 고흥에 막 들어섰다. 8주째 매주 수요일마다 고흥에 오고 있다. 여행작가로 일하다 보면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하게 되는데, 고흥 주민들과 함께 고흥의 음식을 아카이빙하고 미식 여행 코스를 만드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맛있는 음식을 사 먹거나 참가자들의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 주된 일이다.
지난 주에 방문한 고흥에 들어서자마자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 차창을 내리는 일이다. 손을 내밀어 바깥 공기를 감촉하며 힘껏 심호흡한다. 손에 만져지는 공기는 따뜻하고 콧속으로 스미는 공기는 달다. 내가 사는 ‘파베리아’ 파주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곳 날씨는 쑥이라도 캐러 가야 할 정도로 따뜻하다.
녹동항 아침 여는 수산물 경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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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에 집에서 출발하면 고흥에는 오전 8시 반 혹은 9시 정도면 도착하는데, 곧장 차를 몰고 녹동항으로 향한다. 바다를 끼고 있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의 백미는 아마도 포구가 아닐까. 수산물 위판장도 있고 건어물을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는 포구는 언제나 부산하다. 굳이 뭔가를 사지 않더라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실 녹동항에는 몇 번 와본 적이 있지만, 아무래도 혼자 떠나온 여행은 취재한다며 쏘다닐 때와는 전혀 다른 감흥을 느끼게 해준다. 처음처럼 다가오는 생경한 것들도 많다.
오십이 되면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 현저히 줄어든다. 매사에 심드렁해진다. 마음도 매너리즘에 빠진다고 할까. 액션 영화의 액션 장면을 빨리 감기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까지 수백 번 보아 온 발차기와 카체이싱이니까. 주인공이 이기니까. 그래도 여행을 떠나면 평소 잘 쓰지 않던 마음의 근육을 사용하는 것 같아 좋다. 해볼까, 해도 될까, 할 수 있을까 하고 망설이는 것도 많지만 되도록 도전하려고 애쓴다.
녹동항은 제법 크다. 1970년대부터 번창했다고 한다. 포구에 서니 멀리 소록도로 가는 다리 소록대교가 보인다. 소록도를 건너면 거금대교를 넘어 거금도로 갈 수 있다. 녹동항에서 소록도를 지나 거금대교를 한 바퀴 도는 코스는 바다 드라이브 코스로도 좋다.
배가 약간 고프지만 수산물 위판장부터 먼저 구경하기로 한다. 그다지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법 시끌벅적하다. 커다란 수조 앞에는 사람 몸뚱이만 한 그물망을 든 어민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행렬 끝에는 경매사가 있는데, 자기 차례가 된 어민이 그물망을 저울 위에 올리면 경매사가 입찰하는 형식이다. 낙지가 든 그물망도 있고 조개와 굴이 잔뜩 든 그물망도 있다. 경매사의 외침은 여전히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래도 재미난 것이 수산시장의 경매 풍경이다. 전남 목포와 경남 마산, 강원 강릉 등에서 몇 번 봤지만 이곳 녹동항의 경매는 분위기가 또 다르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수산물 위판장을 빠져나와 녹동신항 쪽으로 바삐 차를 몬다. 녹동항에서 차로 약 5분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에서 제주로 가는 배가 뜬다. 항구 앞에 백반집이 몇 곳 있는데 아무 데나 들어가도 푸짐한 한상을 받을 수 있다. 제주로 가는 배가 떠나고 나면 식당은 아침 장사를 접는다. 식당 벽에는 ‘백반 만원’이라고 쓰인 메뉴판이 붙어 있다. 심플해서 좋다. 심플하면 믿음이 간다.
경매 구경 뒤 포구의 식당에서 먹는 백반은 여행을 떠나왔다는 감흥을 진하게 들게 한다. 그릭요거트에 블루베리 한 움큼, 바나나 하나로 ‘때우는’ 아침과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흰 밥이 가득 담긴 ‘스뎅’ 밥그릇과 바지락으로 끓인 국, 파래무침이며 어묵볶음, 갈치속젓, 신김치, 파김치, 시금치 무침 등이 커다란 양은쟁반 위에 가득 올라가 있다. 잘 구운 생선도 한 마리 놓여 있고 투박하게 부친 계란프라이가 올라간 접시도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계란프라이가 있는 백반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넉넉해져 싱긋이 웃음이 번져 나온다. 남기지 않고 다 먹어주겠어. 숟가락과 젓가락을 두 손에 불끈 쥐고 음식 앞으로 돌진한다.
굴 찐 물 차갑게 양념해 먹는 ‘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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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흥의 음식은 열무김치다. 이 집에서도 어김없이 열무김치가 나왔다. 고흥을 왔다 갔다 하며 고흥 사람들이 열무김치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열무김치가 열무김치지 뭐’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먹었는데 웬걸,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다. ‘세상에. 아니, 지금까지 내가 먹은 열무김치는 도대체 뭐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느 백반집에서 열무김치를 처음 맛본 후 고흥을 찾을 때마다, 삼치횟집에서도 장어탕집에서 나는 열심히 열무김치를 먹어댔다.
고흥식 열무김치는 풋고추와 밥을 갈아 넣어 만든다. 상큼하면서 시원한 맛이 난다. 그러면서도 입안에 질척하게 감기는 맛이 있다. 어떤 집은 달짝지근하고 어떤 집은 매콤하다. 집집마다 그 맛이 다르다. 열무의 아삭함은 기본이다. 아마 이전에도 취재 때문에 고흥을 드나들며 분명 열무김치를 먹었을 것이다. 그때는 뭐, 아무 맛도 모르고 먹었겠지. 맛도 아는 만큼 보인다. 누군가 맛있다고 가르쳐 주면 그 맛이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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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음식 이야기가 나왔으니 피굴이란 음식도 소개해야겠다. 난생처음 보는 굴 요리였다. 고흥에서만 먹을 수 있단다. 굴로 끓인 국처럼 보이는데 그렇다고 국은 아니다. 따뜻하게 먹지 않고 차갑게 해서 먹는다. 어떻게 만드냐고 물어보니, 껍데기가 있는 굴을 찌면 굴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 물을 모아 만든다고 한다. 굴은 꺼내 껍데기는 버리고 알만 국물 속에 넣는다. 피굴의 ‘피’는 껍데기를 말한다. 양념은 쪽파를 썰어 넣고 참깨를 뿌리고 참기름 한 방울 넣는다. 그게 전부다. 소박한 맛, 진솔한 맛이다. 과음을 한 날이면 어김없이 피굴이 생각난다. 시원한 국물을 들이켜고 싶다.
피굴 국물을 쭉 들이켜는 것으로 백반 한상을 깨끗하게 비우고 포구로 나왔다. 배가 부르니 보이는 풍경이 한결 여유롭고 평화롭다. 역시 포만감은 인생에서 느껴야 할 아주 즐겁고 중요한 감각이다. 제주행 배가 천천히 떠나고 있다. 배가 하얀 포말을 길게 남기며 수평선을 향해 나아간다. 갈매기가 끼룩거리는 소리를 내며 운다. 포구의 풍경은 왠지 모르게 마음을 술렁거리게 하고 정체 모를 희미한 여운을 남게 해준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내가 이곳에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지만 선뜻 그림이 그려진 적은 없다. 기회가 된다면 남도를 며칠 여행하다가 고흥에서 차를 배에 싣고 제주로 가 또 긴 여행을 하고 싶다. 언젠가 해볼 날이 오겠지.
배부른 여행자는 차에 올라타 소록대교 방향으로 간다. 소록도는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을 닮아 이름 지어진 곳. 그러나 예쁜 이름과는 달리 한센병 환자들의 한이 깊게 서린 곳이다. 약 133만평의 작은 섬에는 백사장이 아름다운 소록도 해수욕장과 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 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록도 감금실, 한센병 자료관, 소록도 갱생원 신사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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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야외테이블에서 유자에이드
소록도에서 거금대교를 건너면 거금도다. 거금도를 건너며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아름답다. 바다 위를 차가 붕 떠서 날아가는 것 같다. 누군가 옆에 있다면 “야, 경치 좋다”라고 말하거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약간의 압박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지금 혼자니까 이런 멋진 풍경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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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금대교에서 내려와 섬을 한 바퀴 도는 해안일주도로에 올랐다. 금산면사무소를 지나니 김일 기념관이 나온다. 나도 모르게 ‘와!’ 하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김일이라니. 한때 온 국민을 텔레비전 앞으로 불러들였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가 이곳 거금도 출신이다. 고향 사람들은 그의 자료들을 모아 김일 기념관을 소박하게 만들어두었다. 당시의 김일 선수는 지금의 비티에스(BTS)에 버금가는 슈퍼스타였다. 김일 선수와 비티에스를 비교하는 게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기준에 슈퍼스타는 비티에스니 어쩔 수 없다. 그만큼 대스타였다는 말이다.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근사한 바다 풍경 앞에 서 있는 카페가 보였다. 들어가 보니 고흥답게 다양한 유자 음료와 유자로 만든 빵과 디저트를 팔고 있었다. 유자꽃빵, 유자휘낭시에, 유자크럼볼, 유자파운드, 유자스틱…. 가게에는 스무 종류 가까운 빵이 있었다. 일단 유자꽃빵과 유자 휘낭시에, 유자파운드 케이크를 샀다. 이렇게까지 사도 되나 싶었지만, 나눠 줄 사람을 생각하니 이것도 모자라겠다 싶었다. 여행이 좋은 건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돈을 쓰기 때문이다. 유자에이드 한 잔을 사서 야외테이블에 앉았다. 12월에 야외테이블이라니. 옅은 노란색의 유자에이드는 향긋하면서도 은은한 유자향으로 가득했다. 푸른 바다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카페 아래로는 바다를 따라가는 나무데크길이 놓여 있는데, 데크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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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운전하며 거금도를 한 바퀴 돌았다. 수평선을 따라 크고 작은 섬들이 놓여 있었다. 주민이 가르쳐 준 ‘공룡알 해변’에도 갔다. 지도 검색이 안되는 곳인데, ‘하얀파도펜션’으로 검색 후, 펜션 주차장 옆으로 난 아치문으로 들어가면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내려가 보면 이곳을 왜 공룡알 해변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다. 공룡알처럼 커다란 둥근 바위가 해변에 깔려 있다.
섬 서쪽은 일몰을 감상하기에 좋다. 해 질 무렵 아무 곳에나 차를 세우면 된다. 갯가에 배를 대고 비스듬히 누운 배와 드넓은 갯벌, 저녁 찬거리로 바지락을 캐러 온 아낙들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펼쳐 보인다.
다시 녹동항으로 왔다. 나는 지금 녹동항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있다. 고흥은 커피가 난다. 고흥은 한반도에서 기후가 가장 온화한 곳으로 전국 최대의 일조량을 자랑한다고 한다. 커피를 재배하는 농장이 제법 있다. 체리 상태의 커피를 따는 것부터 로스팅, 드립까지 커피의 전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체험농장도 있다.
고흥에 왔으니 고흥 커피를 마셔봐야지. 고흥 커피는 생산량이 적어 단가가 좀 비싸지만 뭐 어때, 나는 여행을 왔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 ‘나로프레소’를 주문했다. 스트라파차토, 오네로소, 스페셜티 드립 커피 이렇게 세 가지가 차례대로 나온다고 한다. 나는 바에 앉아 앞치마를 두른 사장님이 고흥 커피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을 들으며 커피를 기다리고 있다.
어떤 맛일까, 궁금하다. 분명 스타벅스와는 다른 맛이겠지. 맛에 대해 까다로운 편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맛있는 것이 좋다. 맛이 좋지 않아도 괜찮다. ‘와, 이런 맛도 있었군’ 해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녹동항 장어탕도 좋고, 고흥읍내로 가 황가오리회를 먹어도 나쁘지 않다. 고흥시장에서 생선구이를 먹어도 된다. 뭘 먹을까, 뭘 먹을까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 소록대교 뒤로 둥근 해가 기울어가며 포구를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여행 정보
두원면 다미식당(061-835-4931)은 백반이 유명하다. 피굴과 파래무침이 맛있다.
거금도 해돌마루(061-843-5116)는 바다 풍경이 좋다. 유자로 만든 다양한 음료와 디저트를 판다.
유쟈(0507-1429-1995)와 유자당(0507-1304-2945) 등에서도 유자 음료와 빵을 맛볼 수 있다. 나로커피220 녹동점(061-834-3323) 은 녹동항 풍경을 바라보며 고흥산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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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읍내에 자리한 고흥을담다(0507-1496-8919)는 여행자카페다. 고흥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다도해회관(061-834-5111)은 삼치회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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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동항 진미횟집(061-842-3111)은 통장어를 뭉텅뭉텅 썰어 넣은 장어탕을 맛볼 수 있는 곳.
읍내에 자리한 도라지식당(061-835-2304)은 황가오리회로 전국구 명성을 얻고 있다.
고흥 여행을 마치고 올라가는 길이 해거름 녘이라면 중산일몰전망대에서 펼쳐지는 해넘이 장관도 놓치지 말자. 남열해변은 길이 800m의 고운 모래가 깔린 넓은 백사장을 자랑한다. 겨울이면 파도가 세찬 까닭에 서핑을 즐기려는 서퍼들이 전국에서 많이 찾아온다.
나로우주과학관은 우리나라 우주발사체 나로호의 산증인이다. 1·2층으로 구성된 우주과학관에는 우주로 이동하기 위한 기본원리와 우주 탐사, 로켓과 인공위성 등을 주제로 전시되어 있으며, 우주과학에 대해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고흥우주발사전망대는 역사적인 나로호 발사 모습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 곳이다. 지상 7층 높이 규모로 고흥과 여수 사이의 바다에 떠 있는 여러 섬과 멀리 나로도의 장관이 펼쳐진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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