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서훈받는 ‘박열의 동지’ 가네코 후미코
박열과 가네코의 법정 사진을 보도한 신문 기사. 이 사진으로 판사는 사직했고 와카쓰키 내각은 총사퇴했다. |
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국가보훈처는 오는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 박열(1902~1974) 의사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1903~1926)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후사 없이 옥중에서 죽은 그의 후손(친인척)을 찾는 대로 서훈과 함께 독립유공자의 명패를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가네코 후미코는 2017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 배우 최희서가 분한 박열의 정치적 동지다.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첫 공개 공판에서 조선 예복과 사모관대를 입고 출두한 박 의사와 함께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나와 자신이 “박문자”라고 밝힌 바로 그 여인이다.
박열과 가네코 부부는 이른바 천황에 대한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다. 관동대지진(1923.9.1) 발생 이틀 후 일본 군부와 경찰은 ‘불령선인들을 수색하고 선량한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한인들을 검속했고 이때 두 사람은 비밀결사 불령사 회원들과 함께 체포됐다.
가네코는 후세 다쓰지(1880~1953)와 함께 그 시기 한인 아나키스트와 연대한 대표적 반전 활동가였다.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접한 가네코가 운명처럼 박열을 만난 것은 19살 때였다. 그는 박열과 함께 비밀결사 불령사를 결성해 조선의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일본 천황제 타도를 지향했다.
영화 '박열'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한 배우 최희서. 가네코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일본 천황제 타도를 지향했다. |
취조 과정에서 박열의 폭탄 구입 계획이 알려지면서 일본 정부와 검찰은 이를 천황 암살을 꾀한 대역사건으로 규정했다. 1926년 3월 25일 재판장이 두 사람에게 대역죄와 폭발물단속벌칙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하자 후미코는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또 “재판은 비열한 연극이다!”라고 외친 박열은 퇴정하는 판사를 향해 이렇게 덧붙였다. (관련 글: 1926년 오늘-박열·가네코 부부,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다)
“재판장! 자네도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이 죽일 수 있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생이다. 부모에게 양육을 거부당해 출생신고가 안 된 무적자여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렵게 자랐다. 1912년부터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고모 집에서 약 7년간 살며 부강심상소학교에서 수학했다. 이때 3·1운동을 목격한 가네코는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확인하고 이에 동감했다고 전해진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아나키스트가 됐다. 그리고 1922년 도쿄에 유학 중이던 문경 출신의 박열을 만난다. 가네코는 박열과 함께 민중을 억압하고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천황제에 반대해 조선 민족과의 공동투쟁을 선언했다.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감동한 그녀는 곧 그와 동거를 시작했다.
재판을 받는 동안 박열은 사모관대에 조선 관리의 예복인 조복을 차려입고 사선까지 들었고 가네코는 흰 저고리, 검은 치마 차림에 머리까지 조선식으로 쪽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형 선고를 이틀 앞둔 3월 23일 옥중에서 정식으로 혼인 신고서를 제출해 합법적인 부부가 됐다.
가네코는 재판정에서 “나는 박열을 사랑한다. 그의 모든 결점과 과실을 넘어 사랑한다. (...)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열 의사와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 |
박열 부부의 의거를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 기사(1925.11.25.). 검찰의 사형 구형을 전하고 있다. |
두 사람은 열흘 후인 4월 5일 대역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무기로 감형됐다. 박열은 이치가야 형무소로, 가네코는 도치기현 우쓰노미야 형무소로 이감됐다. 뒷날 두 사람이 옥중에서 찍은 사진이 공개되면서 일본에 큰 여파를 낳아 사진 촬영을 허가한 판사가 사퇴하고 와카쓰키 내각이 무너지기도 했다.
가네코는 일본국가 권력의 폭력에 대항해 법정투쟁을 전개했고 우쓰노미야 형무소에 갇힌 후에도 전향 공작을 뿌리치고 비전향을 관철했다. 그런데 1926년 7월 23일 복역 중이던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교살된 시체로 발견됐다.
형무소 측은 가네코의 사인을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부부의 변호를 맡았던 아나키스트 동지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원심창 등 흑우회 회원들의 사인 규명과 시신 인도 요구를 형무소 측이 모두 거절해 타살 의혹이 짙다. 그녀의 나이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
후세 다쓰지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정부의 건국훈장을 받았다. 박열의사기념관 전시물 중에서 |
박열의 변호인으로 시종일관 무죄를 주장했고 선고 공판을 앞두고 두 사람의 옥중 결혼 수속도 대신해 줬던 다쓰지 변호사가 가네코의 유골을 수습했다. 박열은 형에게 부탁해 가네코의 유골을 고향 선산에 안장하게 했다. 일경의 감시를 받으며 가네코의 유골은 남편의 고향인 경북 문경 주흘산 자락 팔영리 중턱에 묻혔다.
해방 후 박열은 22년 2개월 만인 1945년 10월 27일 아키타 형무소에서 석방됐다. 그는 1946년 2월 백범 김구의 부탁으로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해봉환 추진위원장을 맡아 세 분의 유해를 발굴, 무사히 본국으로 보냈다. 같은 해 10월 재일조선거류민단을 창단하고 단장이 돼 1949년 5월 영구 귀국할 때까지 도쿄에 머물렀다.
고작 스물세 살에 삶을 마감한 여성 혁명가 가네코 후미코는 남편의 조국 땅에 홀로 잠들어 있다. |
박열의사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돼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에 2012년 개관한 박열의사기념관 |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박열은 서울에서 납북됐다. 1974년 1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장 박열은 북에서 세상을 떠났고 1989년 우리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제85호)을 추서했다. 죽어서도 남편과 떨어져 남편의 선영에 잠들어 있던 가네코 후미코는 2003년 박열의사기념공원 안 산기슭으로 옮겨왔다.
식민지 청년을 사랑했던 일본인 여성 혁명가는 고작 스물셋에 삶을 마감하고 남편의 조국 땅에 묻혔다. 그리고 그는 북으로 간 남편을 대신해 남편의 이름을 딴 기념공원 안에서 남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의 조국은 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의 건국훈장을 받은 외국인 중에는 중국인이 많다. 장제스, 쑹메이링, 천궈푸, 쑨원, 천치메이 등 5명이 1등급의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탕지야오 등 5명이 대통령장(2등급)을 받았다.
미국인으로 고종 황제의 헤이그 특사 호머 헐버트가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은 1950년 대통령장을 받았다. 그간 일본인으로 유일하게 서훈을 받은 이가 바로 박열과 가네코의 변호를 맡았던 후세 다쓰지였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한국의 해방에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조선인들의 독립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날은 나에게도 자유의 날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후세 다쓰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 것은 지난 2004년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1년 만이었다. 이번에 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으로써 그이도 92년 만에 기림을 받게 된 것이다.
그의 무덤은 박열의사기념공원을 들어서면 왼쪽 산기슭에 있다. 그 외로운 유택에 조만간 꽃다발과 훈장이 놓이게 될 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을 기리는 것은 한갓진 헌화나 훈장이 아니라 우리의 해방투쟁사에 당당히 오르게 될 한 혁명가에 대한 장엄한 기억일 터이다.
직썰 필진 낮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