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황금종려상 받던 날…현장은 이랬습니다
"팜 도르(Palme d'Or, 황금종려상) 고즈 투, 코레아 봉준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심사위원장의 다음 말은 잘 모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기 때문입니다.
제72회 칸국제영화제 폐막식이 열린 25일 오후 7시15분(한국시각 26일 오전 2시15분), 저는 프랑스 칸에 있는 영화제 메인 행사장 '팔레 드 페스티벌' 3층에 있는 기자실에 있었습니다. 폐막식이 열리는 바로 옆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가장 가까운, 실황을 지켜보며 컴퓨터를 자정까지 사용할 수 있는 이 곳에는 칸영화제 마지막 밤 각국의 기자들이 모입니다.
4년 연속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한국영화를 따라 2016년부터 4년째 칸을 찾은 터지만 이 날은 어느 때보다 긴장됐습니다. 칸영화제는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아니고, 저는 '기생충'과 아무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비행기를 열 몇시간 타고 가 칸의 무대에 진출한 자랑스러운 한국 영화를-최고의 감독과 배우들을 곁에서 지켜보다보면 한마음으로 응원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무엇보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건 '기생충'이란 영화 자체였습니다. 공식상영 하루 전 스포일러를 자제해달라는 봉준호 감독의 글에 '어벤져스:엔드게임' 타노스의 침묵 요구가 떠올랐습니다만, 보고 난 뒤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쳤다', '무시무시하다' 등의 단어를 되뇌었던 것 같습니다. 2300여 석이 꽉 찬 뤼미에르 대극장은 다른 이들도 비슷한 감흥을 느꼈구나 싶은, 특별한 공기가 가득했습니다.
그 후부터 온갖 곳에서 '기생충'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칸영화제 데일리(소식지)와 수많은 외신이 올해 영화제 최고의 영화로 '기생충'을 꼽았고, 수상을 점친 곳도 많았습니다. 역대급 평점과 봉준호 감독이 "밤이 늦었으니 집으로 돌아갑시다. 레츠 고 홈, 생큐!"를 외친 뒤에야 잦아든 8분의 기립박수도 뭐 하나 보탠 것 없는 '팩트'입니다. 해외 영화인을 상대하는 셀러, 영화제 관계자마다 '다들 '기생충'을 봤느냐'고 묻더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예외없는 호평을 받은 영화를 무시할 순 없다"며 정통한 영화 관계자들이 수상을 점쳤고, '황금종려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내심 기대하고 응원했습니다. 뜨거운 분위기를 전하는 일조차 김칫국을 들이키는 걸로 보일까, 혹여 부정탈까 조심스럽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스크린데일리로부터 역대 최고 평점 3.8을 받으며 호평받은 '버닝'이 무관에 그쳤던 쓰라림이 떠오르기도 했고,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을 뽑는 건 어디까지나 9인의 심사위원이니까요.
칸영화제 측은 통상 폐막식이 열리는 날 오전에서 점심 즈음 수상자를 확정하고 발표 전 이들에게 행사에 꼭 참석하라고 언질을 줍니다. 어느 부문인지는 몰라도 참석이 곧 수상인 셈이죠. 폐막식이 열린 25일 아침엔 조금은 들뜬, 조금은 경건한 마음으로 함께 기쁜 소식이 전해지길 기다렸습니다. 낮 12시까지 연락은 없었습니다. 전양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또냐"며 허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요, 전 터벅터벅 걸어 한산하던 기자실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습니다. '기생충' 수상이 불발이더라도 취재는 해야 했습니다.
숨을 돌리던 무렵,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칸의 연락이 왔고,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가 폐막식에 참석한다는 겁니다. 이 사실이 먼저 알려지면 안된다는 영화제 측 언질과 함께요.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습니다. 기자실에는 부지런한 한국 기자가 많았습니다. 다들 가벼운 흥분 속에서 폐막식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폐막식 레드카펫에 봉준호 감독과 유독 밝은 표정의 송강호가 나타났습니다. 자전적 이야기 '페인 앤 글로리'로 호평받으며 '기생충'과 함께 유력한 황금종려상 주자로 꼽혔던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로 내내 화제를 몰고 다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보였습니다. 심장박동수가 빨라졌습니다.
이윽고 시상식이 시작되고 하나씩 수상자의 이름이 불렸습니다. 특별 언급, 여우주연상, 각본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심사위원상, 심사위원대상(그랑프리)…. 이름 하나하나가 불릴 때마다 테이블의 동료 기자들과 떨리는 눈빛을 교환했습니다. 마지막 황금종려상을 남긴 순간까지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쿠엔틴 타란티노도 아직 무관이었습니다. 황금종려상 시상자인 배우 카트린 드뇌브가 초록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고, 이냐리투 감독이 드디어 입을 뗐습니다. "팜 도르(Palme d'Or, 황금종려상) 고즈 투, 코레아 봉준호…!"
상기된 얼굴로 일어난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가 얼싸안았습니다. 기자실에서도 박수와 함성이 터졌습니다. 흥분이 채 가시기 전 이례적인 이벤트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기념사진을 찍고 난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가 기자실을 찾은 겁니다. 노트북을 두고 기사를 쓰던 테이블에 반짝이는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턱 내려놓은 두 사람은 깜짝 인터뷰도 했습니다.
"차례로 발표를 하니까 이렇게 허들을 넘는 기분인데, 뒤로 갈수록 마음은 흥분되는데 현실감은 점점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만 남은 건가 했을 때는 강호 선배와 보면서 이상한 기분이었다.…(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그 때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국에 돌아가서 돌팔매를 맞지는 않겠구나 안도했다.(웃음)"(봉준호 감독)
"(시상식에서) 이름이 안 불리면 안 불릴수록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 거다. 긴장하고 바들바들 떨면서 기다렸던 것 같다. 오후 12시41분에 연락이 왔다. 12시부터 1시 사이에 연락이 온다는 말을 들었다. 그 40분이 피말렸다. 힘들었다.(웃음)"(송강호)
현장은 축제였습니다. 깜짝 인터뷰 뒤엔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그 들썩거림이 담긴 순간이 기자실의 봉준호 '단독'(exclusive)이라며 해외 언론에도 났더군요. 제 바로 옆자리에서 모니터를 예의주시하던 스페인 기자는 "축하한다"며 "'기생충'은 내 마음 속에서도 황금종려상이었다"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다른 해외 기자들도 웃는 얼굴로 축하해줬습니다. 한참 시끌시끌했는데, 고마웠습니다.
(여담으로, 지난해엔 '어느 가족'(만비키 가족)으로 황금종려상을 탄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들고 기자실에 들러 일본 기자들이 축하와 부러움을 가득 받았습니다. 또, 쿠엔틴 타란티노는 수상과 상관없이 참석했단 걸 봉준호 감독은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상을 못 받는다고 영화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상을 받는다고 없던 재미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뜨겁던 칸의 공식상영 다음날 봉준호 감독이 한 말입니다. 칸의 흥분을 떠나 '기생충'은 오롯한 가치와 재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이제 한국의 관객과 만납니다. 당도하는 곳도 의미심장하지만 가는 길이 재미있으니 스포일러는 피하세요. 보고 나면 마구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은 작품이었지만, 관객들도 이 영화를 즐기시길 저 또한 정말 원하니 이만 줄입니다. '기생충'에 함께하신 모든 분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스포티비뉴스=칸(프랑스), 김현록 기자 roky@spotv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