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살 산수유 시조목 올해도 꽃 피었네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양평 주읍리·내리 산수유마을 동네길 따라 자연스런 꽃 ‘톡톡’ / 임금이 선물한 500년 산수유 시조목도 활짝 / 추읍산 품은 향리 저수지에도 생명력 가득 / 이천 백사마을 산수유 따라 사랑도 활짝
이천 산수유마을 |
마르고 뒤틀린 껍질은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이의 잔주름 같다. 그럼에도 어른 둘이서 겨우 안을 수 있은 굵은 몸통에서 하늘로 뻗어나간 가지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아기 같은 여리여리한 노란 꽃 가득 폈다.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가 늙어 뒷동산에 묻히기를 여러 차례 지켜봤을 나무의 지나 온 세월은 500여년. ‘영원불멸의 사랑’이란 꽃말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구나. 신비로운 생명력 넘치는 양평 산수유마을 시조목 앞에 서서 지나온 시간을 들려달라고 나지막하게 말 걸어본다.
양평 주읍리 산수유마을 |
양평 주읍리 산수유마을 |
#산수유 시조목 올해도 꽃 피었네
전남 구례 산수유마을처럼 화려하지 않아서일까.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주읍리 산수유마을로 들어서는 길은 찾는 이가 거의 없어 고즈넉하다. 넓은 밭에 대규모로 산수유가 심어진 구례와는 풍경이 많이 다르다. 그냥 마을길과 개울을 따라 드문드문 산수유나무가 자연스럽게 자란다. 화장기 하나 없는 ‘생얼’같이. 화사한 산수유 군락지를 예상하고 찾았다면 크게 실망하겠다. 하지만 시간이 느릿느릿 흐르는 마을과 동화되며 천천히 사색하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다.
산수유 시조목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마을회관 앞 도로 건너편 주읍리 마을 안내도에 시조목 위치가 표시돼 있지만 이정표는 없다. 지나가던 마을 어르신께 시조목 위치를 묻자 그냥 말없이 따라오라며 손짓한다. 추읍산 등산로 방면으로 마을을 관통하는 ‘산수유꽃길’을 따라 걷는다. 볼록하게 솟은 독특한 모양의 추읍산 자락 아래 자리 잡은 마을은 아주 고요하다. 개울을 따라 봄을 알리는 물소리만 졸졸졸 퍼질 뿐. 한참을 걷다 보면 오른쪽 길에 한눈에 봐도 기묘한 나무가 등장하는데 마을의 신령나무다. 멋대로 휘어지며 갈라져간 나뭇가지는 하늘로 솟구치고 오솔길을 덮어 터널을 만들어 놓았다.
양평 주읍리 산수유마을 신령나무 |
논두렁 밭두렁 따라 이어지는 산수유나무에는 지난해 가을과 올해의 새로운 봄이 공존한다. 가지마다 보석 같은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그대로 달려 있어 노란 꽃과 대비되는 모습이 이채롭다. 저 멀리 농가의 빨간 지붕을 덮고 있는 산수유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시조목이다. 봄이면 노란 꽃이 거대한 가지를 뒤덮는 구례의 1000년 넘은 시조목처럼 화려하지 않다. 아주 소박하게 좁은 시골길 모퉁이에 수줍게 서 있으니 마을 어르신 아니었으면 찾기도 어려웠겠다. 작은 표지석에 간단하게 쓰여 있는 안내문만이 시조목의 사연을 전한다.
양평 주읍리 산수유마을 시조목 |
주읍리 마을에 산수유를 퍼뜨린 주인공이다. 조선 세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450년 세종대왕 승하 때 영릉을 여주에 조성하다 묘터에서 물이 나왔다. 지나가던 현인이 산수유마을의 추읍산을 가리키며 “저 산 정상 바로 오른쪽 아래를 파면 우물이 나오고 묘터의 수맥이 그리로 빠져서 물이 안 나올 것”이라고 일러줬고 그대로 따라하자 영릉터에 물이 말라 묘역을 조성할 수 있었단다. 이에 1466년 세조가 약용으로 쓰이던 귀한 산수유나무 몇 그루를 마을에 하사했고 그 나무들이 퍼지면서 산수유마을이 생겨났다. 국립산림과학원이 2013년 수령 520년가량의 나무 몇 그루를 찾아냈고 그중 하나를 양평군이 시조목으로 지정해 보호 중이다.
양평 주읍리 산수유마을 시조목 |
#추읍산 품은 향리 저수지에도 생명력 가득
내리 산수유마을도 주읍리와 함께 양평 산수유마을을 대표한다. 지도에서 보면 북쪽 추읍산과 남쪽 개군(향리)저수지를 가운데 두고 서쪽이 내리, 동쪽이 주읍리 산수유마을이다. 차로는 10분거리로 아주 가깝다. 또 두 곳의 산수유마을은 추읍산 등산로를 따라 2㎞가량의 트레킹 코스로도 이어진다. 덕분에 추읍산 산행에 나선 이들이 사계절 산수유길을 따라 오가며 자연을 즐긴다. 내리는 봄이면 양평으로 자전거 라이딩을 나선 이들도 찾는 필수 코스이기도 하다.
양평 내리 산수유마을 |
내리 산수유마을 여행은 마을정보센터 앞 삼거리에서 시작된다. 주읍리보다 많이 알려져 여행자들이 제법 있다. 100년이 넘은 수령의 산수유나무 7000여그루가 군락을 이뤄 주읍리보다 좀더 풍성하고 화사하다.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라 오른다. 백구가 한가롭게 여행자들과 장난치는 모습이 정겹다. 백구 집을 지나면 ‘주단길’이 시작된다. 겨우내 매달렸던 빨간 산수유 열매가 흙길에 계속 떨어지고 그 위로 또 쌓이면서 주단을 깔았다. 꼬마 아가씨가 양손으로 부모 손에 매달려 공중으로 붕 떠오르며 주단을 걷는 풍경은 아름다운 수채화다.
양평 내리 산수유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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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내리 산수유마을 돌담길 |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본격적인 산수유길. 돌담을 따라 산수유가 곱게 펴 근사한 사진을 얻기 좋다. 왼쪽에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켜켜이 쌓인 세월을 지붕에 고스란히 이고 있는 농가가 활짝 핀 산수유꽃길을 안내한다. 어디선가 나타난 한 무리의 라이딩족들이 그 길을 따라 페달을 힘껏 밟는다. 정겹고 자연스러운 마을의 풍경을 잘 간직하고 있어 주읍리처럼 사색하며 걷기 좋다.
향리 |
향리저수지와 추읍산 |
내리와 주읍리를 자동차로 오가는 추읍로에서 만나는 개군저수지와 향리마을은 뜻밖의 작은 선물로 봄기운 따라 신비한 생명력이 가득하다. 저수지와 마을 뒤로 펼쳐지는 독특한 추읍산 풍경 덕분인데 마치 만삭의 임산부가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것 같다. 저수지에서 보면 우뚝 솟은 산 정상을 중심으로 낮은 산맥이 양 옆으로 펼쳐져 임산부가 출산을 하는 형상이란다. 이 때문에 향리 사람들은 양수가 흘러나와 고이면서 저수지가 됐다고 여겼고 다산과 순산의 기운을 받는 마을로 알려졌다.
향리저수지 액자포토존 |
저수지 수변데크를 따라 걷는다. 이런 얘기 때문인지 푸른 하늘을 담은 저수지와 추읍산이 더욱 신비롭게 다가오며 싱싱한 봄의 생명력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다. 액자 포토존에 서자 산과 호수, 푸른 하늘과 구름이 모두 담긴다. 그림 같은 전원주택 몇 채가 이미 경치 좋은 곳을 차지하고 앉았다. 좀 부럽다. 작고 예쁜 집 하나 짓고 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저수지 산책로를 따라 코스모스 바람길이 이어지고 연꽃지와 산수유군락지를 만날 수 있어 사계절이 걷기 좋다.
이천 산수유마을 하트존 |
이천 산수유마을 산책로 |
#이천 백사마을 산수유 따라 사랑도 활짝
양평 산수유마을에서 차로 30분 거리인 이천시 백사면 산수유마을은 요즘 구례만큼 유명해졌다. 양평처럼 고즈넉한 모습은 없지만 구례에 버금갈 정도로 산수유가 화려해 연인들에게 인기다. 도립1리, 송말1·2리, 경사1·2리에 산수유나무 1만70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뤘고 도립1리에는 넓은 밭에 대규모로 몰려 있어 인생샷 명소로 등극했다.
산수유빵 |
저녁때가 가까워지니 배가 출출하다. 마을 입구 박서진베이커리에서 산수유빵을 사 입에 베어 물자 새콤한 향이 입에 화사하게 퍼진다. 이곳에서만 만나는 독특한 천연발효빵과 한 잔의 커피가 여행의 피로를 날린다. 근사한 한옥으로 지은 산수유 사랑채도 여행자들을 맞는다. 하룻밤 묵으며 마을에서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부분 왕복 30분 코스인 ‘연인의 길’을 따라 간다. 그 길 끝에 화려한 산수유 군락지가 자리 잡고 있어서다. 산수유나무가 터널을 이룬 오솔길을 연인이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 동화같다. 마침 하얀 매화까지 활짝 피어 꽃동산을 이뤘고 한 모녀는 서로의 사진을 예쁘게 담느라 분주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 행복한 날에 꽃도 웃고 사람도 오랜만에 활짝 웃는 풍경이 반갑다.
이천 산수유마을 |
그리고 산수유나무 사이에 세운 조형물에 적은 하얀 글자, ‘아프지마’. 산수유에 개나리까지 활짝 펴 노랗게 채색된 영축사 입구 비석에 적힌 문구도 마음을 잡아끈다. ‘세상 모든 것은 마음 지은 대로 길이 열린다.’ 꽃구경하러 왔다 만난 뜻밖의 덕담들. 덕분에 건강하고 긍정적인 기운도 듬뿍 받으니 올봄에는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아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양평·이천=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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