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퀴즈' 김영삼 "개그맨 출신 치과의사, 사랑니 발치로 美 진출"
방송화면 캡쳐 |
[OSEN=장우영 기자] ‘유 퀴즈 온 더 블록’ 전 국가대표 쇼트트랙 선수 박승희부터 개그맨 출신 치과의사 김영삼이 독특한 이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21일 오후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유퀴즈)은 ‘독특한 이력서’ 특집으로 꾸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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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트랙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였던 박승희가 ‘유퀴즈’ 문을 두드렸다. 박승희는 “원래 꿈은 디자이너였다. 지금 내 꿈을 찾은 셈이다. 나는 어릴 때 금메달을 따면 은퇴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싫어한 건 아니었는데 디자이너에 꿈이 있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올림픽 첫 출전에서 동메달을 딴 박승희는 23살에 첫 금메달을 따냈다. 이후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전향한 박승희는 4개월 만에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박승희는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용기있게 도전하는 모습으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박승희는 “국가대표 수당은 하루에 3만 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걸로 인터넷 쇼핑을 많이 했다”면서 인생 경기로는 소치 국제대회를 꼽았다. 당시 박승희는 1위를 달리다 넘어져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박승희는 “그때는 2등 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 번 더 넘어져서 3등을 하고 말았다”고 떠올렸다.
박승희는 “디자이너가 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반대를 하지 않았는데, 같이 스케이트를 탈 분들이나 패션 쪽에 계신 분들이 ‘왜 안정적인 길을 가지 않고 도전을 하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운동하면서도 틈틈이 의류 디자인 공부를 병행했다. 은퇴 후 본격적으로 가죽과 소재를 공부하고 오랜 꿈을 시작하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박승희는 첫 주문을 받았을 때의 짜릿하고 설렌 기분을 밝히기도 했다.
박승희는 공통 질문으로 ‘가장 험난했던 길’을 받았다. 박승희는 “운동선수였을 때”라며 “16살부터 치열하게 경쟁했고, 13년 동안 늘 국가대표라는 부담감이 있었다. 디자이너와 운동은 다르다. 패션은 모두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부담은 크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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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보도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 출신으로 지금은 전기 버스 회사 대표를 맡고 있는 강영권 대표도 유재석, 조세호를 만나기 위해 ‘유퀴즈’를 찾았다. 강영권 대표는 “PD로 일한 기간은 13년 정도 된다. ‘비바청춘’으로 입봉을 했다”며 “1991년 SBS로 이직한 뒤 하고 싶은 프로그램 하게 해주겠다고 해서 ‘그것이 알고 싶다’를 시작하게 됐다. 시청자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들을 찾아 깊게 취재했었다. 최고 시청률은 43.8%로, ‘실종 사라진 아내 편’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강영권 대표는 “작두를 타서 신내림을 받으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걸 하면서 가장 소름이 돋았다. 제작 비용이 많이 들었다. 작두를 가는데 더 날카롭게 해달라고 하더라. 가짜가 아니구나 싶었다. 움직임에 따라 실시간으로 몸무게가 측정되는데 30분 정도 후에 저울이 작동되지 않더라. 아무리 과학자들에게 물어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는데, 순간 정전이라는 의견을 받기도 했다. 그때가 가장 섬뜩했던 순간이었다”고 덧붙였다.
잘 나가던 방송국 일을 그만둔 강영권 대표는 IMF 때 돌연 일을 그만뒀다. 하지만 일이 구해지지 않았고, 주위에서 외주제작사 권유를 받아 ‘TV특종 놀라운 세상’, ‘호기심 천국’ 등을 제작했다“며 ”첫 해에 12억, 넷째 해에 100억 넘게 벌어서 승승장구 하니 2년 준비 끝에 상장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기획사에서 PD에게 뇌물을 준 게 대대적을오 보도되면서 멈췄다. 그리고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강 대표는 ”대학 동창의 권유로 폐기물 처리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기차 사업을 하고 싶었다. 에너지에 관한 책을 읽으며 생각을 하게 됐다. 나 혼자 유유자적한 삶을 살기 보다는 사회에 공헌하고 싶었다. 어려울 때도 있어서 흑자부도를 걱정하기도 했다. 돈을 더 버는 것보다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고, 우리 나라를 잘 사는 나라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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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자기’ 조세호의 주치의이기도 한 김영삼은 지상파 공채 출신 개그맨으로 놀라움을 자아냈다. 김영삼은 “2001년 3월 데뷔했다. ‘개그콘서트’의 ‘공부합시다’, ‘짠짠극장’을 했었다”며 “유행어가 있었다면 계속 했었을텐데 유행어가 없다. 지금은 안 웃기다는 게 밝혀져서 치과 의사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삼은 “레지던트 시절 우연히 개그맨 선발대회 광고를 봤다. 연령 제한에 딱 걸렸었다. 마지막 기회니까 도전했고, 내가 일탈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개그맨 시험은 내게 일탈이었다”며 “사랑니 발치 강의를 많이 하고 있다. 사랑니 강의로 미국도 갔다. 외국은 사랑니 발치가 비싼데, 나는 저렴한 비용으로 독식할 수 있는 구조다. 내가 쓴 책이 우리나라 치과계에서는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됐고, 번역판도 잘 나갔다. 한달에 몰아서 사랑니 발치하고 강의한다. 지금까지 2~3만개의 사랑니를 뺀 것 같다. 하루에 많이 빼면 40개도 뺀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김영삼은 “한국 치과 의술이 세계적이다. 가격 대비 성능은 비할 데가 없다. 정말 월드클래스다. 축구로 이야기하면 동네 앞에 호날두, 메시가 있는 격이다”고 덧붙였다.
김영삼은 “무보님께서는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를 원하셨다. 지원 점수가 치대가 제일 높았는데, 치과도 한 번도 가보지 않았기에 잘 몰랐다. 입학 후 재수할 생각이었는데 당구의 재미에 빠지면서 졸업까지 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영삼의 말에 유재석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고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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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끝판왕’ 송지헌 씨도 ‘유퀴즈’에 등장했다. 현재 과천경찰서 수사과장 경정으로 근무 중인 송지헌 씨는 “원래 꿈은 화가였다. 4살 때부터 공부해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작품 활동하려고 했는데 IMF 시기였다. 경제적 독립을 위해 홍콩 상하이 H은행에 취직을 하게 됐다. 국내 기업이나 국내 일자리를 알아봤을 때 당시만 해도 전공에 따라 취업 길이 정해졌다. 외국계 은행이라서 경력 무관과 영어 점수로 채용을 했다. 취업을 준비하고 한번에 합격했다”고 말했다.
이어 송지헌 씨는 “은행은 1년을 다니지 못했다. 금융인이 되려고 한 게 아니라서 경제적 독립을 해서 작품 활동을 하려 했기 때문이다. 은행 업무를 해보니 내 가치관과는 다르더라. 원하는 목표에 부합하는 다른 직업이 뭘까 하다가 싱가포르 항공사에 스튜어디스로 입사하게 됐다. 유학을 생각했었는데 IMF가 터지면서 유학을 갔던 친구들도 돌아오더라. 외국에서 돈을 벌면서 전시장도 다닐 수 있는 직업을 생각하다 외항사 승무원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송지헌 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승무원이 육체적으로 고되더라. 그래서 생각만큼 미술 전시를 많이 보지 못했다.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만족도는 높았다. 하지만 손이 굳어서 원하는 대로 드로잉을 못하는 악몽을 자주 꾸고 친구들의 전시를 보면서 복귀하지 않으면 아마추어로 남을 수 있겠다 싶었다. 퇴사 후 대학원에 복학하려 했는데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더 해봐야겠다 싶었다. 사법시험이 없어진다는 기사를 접하고 공부를 해서 사법시험에 붙었다. 1,2차를 한번에 붙었다”고 말했다.
송지헌 씨의 경력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로펌에서 변호사 생활을 할 때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재팜을 하는 상황이 흥미로웠는데, 회의를 느꼈다. 선임 계약이나 수임료에서 자유롭기 쉽지 않았다. 뇌물 수수 혐의 변호를 맡았는데, 피의자가 눈물을 흘리며 읍소를 하지만 두 얼굴을 가지고 있더라. 그래서 경찰이 되기로 했다. 역대 최장 이력이 경찰인 셈이다. 현장 수사를 하고 싶어 경찰에 지원했다. 그리고 수사구조개혁단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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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 공무 28년 만에 변호사가 된 권진성 씨는 1992년부터 공부를 시작해 2020년에 변호사가 됐다. 올해 55세라는 권진성 씨는 “이제 수습 중이다”라며 “대한민국 고시라고 하면 다 경험을 한 셈이다. 이렇게 길어질 줄 누가 예상했겠느냐. 1차 합격을 처음 하고 2차 시험 치면서 합격을 자신하고 결혼을 했다. 신혼여행 다녀오고 보름 뒤에 발표가 났는데 떨어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내는 ‘또 하면 되지’라고 용기를 줬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꽤 긴 시간을 시험을 봤다”고 자신의 세월을 돌아봤다.
권진성 씨는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고시만을 준비할 수 없었다.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경비원 생활을 많이 했고, 공공근로도 하고 청소 일도 했다. 경비 일은 7~8년 정도 했던 것 같다. 1998년 시험을 앞두고 딸이 태어났다. 당시에도 합격의 확신이 들었는데, 또 떨어졌다. 그냥 막막하더라. 그래서 사업을 해야겠다 싶었던 차에 집사람이 프랜차이즈 치킨집을 운영했다. 사업은 잘 됐지만 1차 시험은 계속 떨어졌다.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고시생으로서의 역할 중 선택을 해야 했다. 사업을 포기하고 꿈을 이루기로 했다. 왜 그런 결정을 했어야만 했고, 가족들의 희생이나 행복은 도외시했던 부분도 있어서 평생 짊어져야 할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권진성 씨는 “시험을 치르고 나면 꿈을 꾼다. 보통 불합격일 때는 동전, 쌀, 지저분한 환경이 나온다. 합격할 때는 높으신 분들과 악수를 한다던가 맑은 물 속에 헤엄을 치는 꿈을 꿨다. 이번에는 헤엄을 치는 꿈을 꿨다. 4월에 합격을 한 뒤 긴 고시 기간으로부터 벗어난 느낌을 받았다. 기쁘다라는 말로는 대체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받았다. 어머니께 많이 죄송했다. 합격 발표를 듣고 2개월 뒤에 돌아가셨다. 합격을 마지막까지 기다려주신 게 아닌가 싶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elnino8919@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