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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18세 소녀 유관순, 100년 전 오늘 무슨 말을 했나

판결문 속 3·1운동

시위 도중 부모님 일제 칼에 살해…항의하다 체포돼 중형

"정당한 일 하는 민족 왜 죽이냐"…모진 고문 끝에 순국

[편집자주] 일제 강점에 항거한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3·1 운동 당시 국민들은 한 마음으로 조국의 독립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민초들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현재의 대법원 역할을 했던 조선고등법원의 판결문 등에는 민초들이 3·1 운동에 어떻게 동참했고,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에 뉴스1은 판결문 속에서 볼 수 있는 3·1 운동 당시를 되돌아 보고자 합니다.

①18세 소녀 유관순, 100년 전

유관순 열사의 수형기록표(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뉴스1

싸늘하게 식은 아버지의 사체를 본 18세 소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소녀는 총을 쏜 헌병의 가슴에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자신의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해 민족을 죽이느냐!"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1일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1919년 법원 판결문에는 당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이끈 민중들의 주장과 고초가 드러난다. 열여덟의 나이로 옥중에서 삶을 마감한 유관순 열사의 비극적인 이야기도 고스란히 담겼다.


1919년 4월1일(음력 3월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터. 성난 군중들이 독립시위 운동을 하자, 약 50걸음 떨어진 병천헌병주재소의 헌병은 제지에 나섰다. 하지만 응하지 않자 몰려든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선두에 섰던 소녀의 아버지 유중권은 헌병의 칼에 옆구리와 머리를 깊게 베였다.


그의 딸인 유관순은 헌병소장을 붙잡고 가슴에 매달렸다. 이를 제지하는 헌병보조원 맹성호에게 작은아버지인 유중무는 "너는 보조원을 몇십년 할 것 같으냐"며 맞섰다. 훗날 광복 이후 민주당 당수가 되는 조병옥의 아버지 조인원은 헌병의 총을 잡고 항의하는 등 성난 군중은 "소장을 죽이라"고 외쳤다.


당시 유관순이 병천시장에서 만세를 부른 장소는 헌병주재소와 약 50걸음 떨어진 위치였다. 이날 그를 비롯한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헌병은 이들을 향해 발포하고 칼을 뽑아 19명이 즉사하고 30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때 찔린 유관순의 아버지도, 이를 보고 달려든 어머니도 결국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①18세 소녀 유관순, 100년 전

유관순 열사의 수형기록표(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뉴스1

부모의 사체를 보고 헌병에게 항의한 유관순에게 1심은 소요·보안법위반 혐의를 적용해 징역 5년을, 2심은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당시 일제의 법령에서 여성의 최고 형량이 징역 7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중형이다. 시위에 가담한 유관순의 작은아버지 등에 대해서도 2심에서 징역 6개월부터 3년까지 선고됐다.


이들은 모두 판결에 불복해 3심인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유관순은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상고하지 않았다. 대신 수감된 서대문형무소에서 1920년 3월1일 독립운동 1주년을 맞이해 대대적인 옥중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3000여명의 수감자가 호응해 형무소는 함성 소리로 가득했다. 주동자인 유관순은 모진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그해 4월 일제는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英親王)의 결혼을 기념해 특사령을 내려 유관순의 형기도 1년6개월로 단축됐다. 하지만 그동안 이어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20년 9월28일 순국했다. 석방 예정일을 3일 앞둔 날이었다.


당시 장례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이장하기 전에 유골이 분실된 것으로 전해졌다. 유관순이 살던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매봉산 기슭에는 현재 그의 초혼묘가 조성됐다. 지난달 26일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기존에 서훈 3등급이던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등급(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기로 했다.

 

(서울=뉴스1) 문창석 기자 = themo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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