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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직장내 갑질…조선의 혹독한 '신고식' 살풍경

경향신문

1842년(헌종 8년) 조선 후기 무관인 송재선이 선전관(국왕의 호위 및 전령, 암호 전담)으로 발령 받은 뒤 치러야 했던 면신례의 내용을 알려주는 문서. 송재선의 성과 이름을 ‘선재송’으로 뒤바꿔놓았다. 선배들의 장난이다. “너는 별볼 일 없는 재주로 외람되게도 빛나는 관직에 올랐으니…더러운 너를 받아주는 것은 천지의 넓은 도량을 본받았기 때문이고 너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과거 성현의 큰 도량을 본받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고풍을 이제와 그만 둘 수 없으니 아황 죽엽주(술)와 용머리(생선) 및 봉황꼬리(닭) 안주를 즉각 바치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김문웅씨 제공

“너는 볼 일 없는 재주로 외람되게도 빛나는 관직에 올라…더러운 너를 받아주는 것은 천지의 넓은 도량을 본받았기 때문에…지금까지 전해오는 고풍을 이제와 그만둘 수 없으니 아황죽엽주에 용머리와 봉황꼬리 안주를 즉각 바치도록 하라. 선배(先進)들.”


첫눈에 봐도 범상치않은 글이다. ‘송재선’을 ‘선재송’으로 이름과 성을 뒤바꾼 것도 그렇고, 이름 앞에 신귀(新鬼·새로운 귀신)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도 그렇다. 여기에 ‘전통에 따라’ 선배들에게 거위새끼의 털처럼 노란 술(아황·鵝黃)과 대나무 빛깔(竹葉)과 같은 술인 아황죽엽주와, 생선을 상징하는 용머리(龍頭), 닭을 의미하는 봉황꼬리(鳳尾)를 대접한다면 너그럽게 받아주겠다는 내용이다. 글의 뒤에 ‘선배’를 뜻하는 ‘선진(先進)’ 3명의 수결(手決·사인)도 눈에 띈다. 이 문서가 무엇인가.


1842년(헌종 8년) 선전관이 된 송재선의 신고식, 즉 면신례 문서이다. 선전관은 국왕의 시위와 전령, 군호(암호) 등을 책임지는 선전관청의 소속원이다. 이른바 무관의 승지(비서)로 별칭되는데,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경호실에 속한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충청도 병마절도사(종2품)와 훈련원 도정(정3품), 오위도총부 부총관(종2품)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송재선이 관직에 첫발을 내딛을 때 겪어야 했던 면신례(신고식)이었다.


■유치한 성·이름 바꾸기


교지연구가 김문웅씨(79)가 26일 경향신문에 공개한 조선시대 면신례 문서들은 대표적인 ‘오랑캐의 풍습’으로 지목되어 조선시대 내내 철저하게 금했던 ‘면신례’가 사실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김문웅씨가 공개한 자료 가운데 고종 연간의 인물인 소창렬과 김문진의 면신례 문서 또한 흥미롭다. 소창렬 면신례문서는 “광서 12년(1896년·고종 23년) 신귀(새로운 귀신·신참) 말단 찌꺼기(조사·曺司) 소창렬을 선배들과 함께 근무할 것을 허락한다”는 내용이다. 면신·허참례를 통과했으니, 부서에 출근해서 선배들과 나란히 앉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문서에 특이한 내용은 없다고 그냥 지나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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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 22년 8월, 즉 1842년 8월 송재선을 선전관으로 임명한다는 헌종의 교지. 선전관은 국왕의 호위, 왕명출납, 군호 등을 담당하는 최측근 관리였다. |김문웅씨 제공

‘소창렬(蘇昶烈)’ 이름의 소(蘇)자를 보라. 가만보니 ‘어(魚)’자와 ‘화(禾)’자를 뒤바꿔 놓았다. 오자가 아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다. 맨처음 인용한 송재선의 면신례 문서에서 ‘송재선’을 ‘선재송’으로 바꾸었듯, 이번에는 소창렬의 소(蘇)자를 일부러 바꾸어 놓았다. 유치한 선배들의 장난이라 할 수 있다. 소창렬 문서에도 나왔듯 1902년(고종 39년) 세자를 수행·호위하는 배위(陪衛)로 발령받은 신참관리 김문진을 ‘말단 찌꺼기(조사·曺司)’로 낮춰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소창렬 문서나 김문진 문서나 예외없이 신고식을 강요한 선배들의 성이나 이름을 공개적으로 연명한 다음 사인까지 해놓았다. 소창렬 문서에는 ‘행수(行首·최고직위직)’ 최(崔)와 ‘공사원(임원)’ 류(柳), 장무관(사무담당) 김(金) 이라 해서 성(姓)만 쓰고, 맨마지막에는 소창렬의 직속상관인듯한 ‘판조사 차 하위직’ 홍효섭이라 풀네임을 기록한 것이 특이하다. 김문진의 문서에는 아예 신고식(면신례)을 강요한 선배들(행수관 오기선·송현규·유순형·정홍렬·이방헌)의 풀네임을 모두 기재했다. 지금으로 치면 전형적인 직장 선배들의 갑질인데, 그런 행위를 자랑하듯이 이름에, 도장까지 찍어두었던 것이다.


김문웅씨는 또 지방관찰부 아전으로 채용된(1764년·영조 40년) 박계조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은(1767년·영조 43년) 박창석의 면신례 문서도 공개했다. 문서에서 아버지(박계조)나 아들(박창석) 모두 ‘초충(草훼·풀벌레)’이라는 조롱섞인 수식어를 얻었다. 특히 아버지의 면신례는 2번째(二度)라 적혀있다. 김문웅씨는 “면신례가 중앙은 물론, 지방관서의 아전들에까지 뿌리깊게 박혀있던 관습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례”라고 말했다.


■줄줄이 죽어나간 신고식


공개된 사례만 보면 조선시대 면신례, 즉 신고식은 애교 수준인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선배들의 갑질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신고식을 치르던 새내기 관료가 종종 죽어나갔다.


예컨대 1453년(단종 1년) 실시된 과거에서 합격자 40명 중 11등이라는 고순위로 급제한 새내기 관료 정윤화는 다른 9명의 동기생과 함께 승문원(외교문서 담당관청)의 수습관리로 임명됐다. 바늘구멍 과거를 통과한 기쁨이 넘쳤을 터였다. 그러나 정윤화에게는 한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평소 지병(종기)을 앓고 있는데 그 혹독하다는 신고식을 버텨날까 하는 걱정이었다. 과연 그 걱정이 현실로 다가왔다. 정윤화는 9명의 동기생과 함께 선배들을 위해 술과 안주를 대접하면서 혹독한 신고식을 견뎌내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정윤화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지병 때문에 가뜩이나 몸이 좋지않은데 선배들의 강권으로 술을 억지로 마신 뒤 놀림까지 당하다가 쓰러져 결국 사망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윤화에게 술을 먹인 승문원 선배 3명이 태 50대를 맞고 파직됐고, 공신의 자식들 2명은 파직만 당했다. 그런 사건은 또 일어났다.


1526년(중종 21년) 1월 사헌부 감찰(정 6품)이 된 조한정은 신고식 도중 ‘침학(집단 괴롬힘)’을 당하다가 기절한 뒤 집으로 실려가던 도중 그만 숨지고 말았다. 중종은 “병 때문인지, 침학 때문인지 잘 파악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헌부는 10여일 간의 조사 끝에 “만약 조한정이 지병이 있었다면 어떻게 정상 출근했겠냐”면서 “조한정은 도에 지나친 신고식의 집단따돌림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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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연간의 인물인 소창렬의 1896년(고종 23년) 면신례 문서. 면신례를 통과했다는 인증서이기도 하다. 장난으로 소창렬의 성인 소(蘇)자에서 어(魚)자와 화(禾)자를 바꿔놓았다. 문서 끝에는 인증서(입안)를 발행한 선배들의 성씨만 연명으로 써놓았고, 맨 마지막에 소창렬의 바로 위 상관인듯 한 ‘홍효섭’이라는 인물의 이름만 풀네임으로 기록했다. |김문웅 씨 제공

■금수저들의 기를 꺾으려 시작된 면신례


면신례가 과연 어떻게 했기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았을까.


면신례의 유래는 고려말 우왕(재위 1374~1388)까지 올라간다. 처음 의도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고려 때만 해도 실력이 아닌 부모 권세에 힘입어 관직에 오르는 이른바 ‘금수저’들의 기를 꺾고 질서를 잡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런 풍습을 고려 때는 ‘홍분방’ 혹은 ‘분홍방’이라 했다. 즉 고려 말에는 과거가 공정하지 못해서 과거 시험관이 응시자의 이름을 엿보고는 젖비린내 나거나 어리석은 권신의 자제를 뽑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 자들이 관직에 나설 때 선배들이 붉은 분가루를 얼굴에 칠하며 놀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말 그래도 좋은 의미로 출발했던 면신례는 점차 ‘가학’ 및 ‘집단괴롭힘’의 향연으로 전락했다.


■추태로 일관된 신고식


<경국대전>은 “신참을 괴롭힌 자는 곤장 60대를 친다”고 규정했지만 별소용 없었다.


<성종실록>과 <중종실록> 등 역사서나 이이(1536~1584)·이익(1681~1753)·정약용(1762~1836) 등인 남긴 문헌은 지긋지긋한 신고식의 폐해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특히 1541년(중종 36년) 12월10일 <중종실록>의 상소문이 가장 적나라 하다.


“지금 신래(新來·신참)의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온 얼굴에 오물을 칠하며, 잔치를 차리도록 독촉하여 먹고 마시기를 거리낌없이 합니다. 갖가지 트집을 잡아 신참의 몸을 욕보이는 등 추태를 부리고, 매질하는데 그 맷독(楚毒)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심각했다. “침학(侵虐·집단 괴롭힘)이 가혹하고 각박해서 여름철에는 물에 집어넣고, 한더위에 볕을 쪼이게 하므로 이 때문에 병을 얻어 생명을 잃거나 불치병에 걸려…. 이런 풍습이 미관말직에 까지 퍼졌습니다.”


단적인 예로 신고식이 가장 악명높았다는 예문관의 경우 비스듬히 앉은 상관장(참석자 중 최고참)은 기생 두 명을 좌우에 앉히고, 이를 ‘좌우보처’라 했다. 사찰의 부처님이 좌우보처에 협시보살을 두고 있는 것을 빗댄 것이다. 나머지 봉교(정 7품) 이하 선배들 곁에도 기생 한사람씩 앉았다. 이로부터 술을 부어라 마셔라 했다. 기생 손목을 잡고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상관을 부르는 게임을 시키기도 했고, 뒷짐을 진채 서서 머리를 숙이고는 사모를 쳐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직속상관의 관등성명을 외우게 했다. 이 과정에서 선배가 시키는대로 각자의 개인기를 자랑해야 했다. 바보처럼 울고 웃게 했고, 춤을 추게 했는데 혼자서 추면 벌주를 내렸다. 갓와 옷을 찢어 흙탕물에 굴리고 온몸과 얼굴에 진흙과 오물을 바르고 밤새도록 놀다가 새벽에 ‘한림별곡’을 합창한 뒤 헤어졌다.


백관의 잘못을 규찰하는 사헌부는 상하 규율이 매우 엄했고, 면신례 또한 악명높았다. 새로 감찰(6품)이 들어오면 서까래만한 기둥을 들게 했는데, 만약 들지 못하면 윗사람부터 차례로 신참의 무릎을 주먹으로 때렸다. 연못에 신참을 밀어넣고 머리에 쓴 사모로 물고기를 잡게하고, 검댕 투성이의 부엌벽을 손으로 문지르게 한 뒤 그 손 씻은 물을 마시게 했다. 이들은 새벽에 사헌부를 상징하는 노래인 ‘상대별곡’을 부르고 헤어졌다.


■명함돌리기에까지 가산탕진


또 하나 문제는 잔치비용이었다. 가산을 탕진할 정도였고, 심한 경우 부잣집 데릴사위로까지 들어갔다.


“신참들은 접대와, 심지어는 뇌물상납을 강요하는 선배들을 밤낮으로 응대하느라…물건값이 수만냥이 되어 그 비용을 구걸까지 합니다. 더러는 노비와 논밭을 팔고 심지어는 부유한 장사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갑니다.”


사헌부 상소문은 “이런 신고식은 오랑캐 나라인 원나라의 미개한 풍속에서도 없었던 행태였다”고 고발했다. 하다하다 못해 신입관리들은 매일 밤 선배들 집을 돌면서 지금의 명함인 회자(回刺·두꺼운 종이에 이름을 씀)를 돌리기도 했다. 신입들이 부서진 관에 낡고 찢어진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선배들 집에 찾아다니는 몰골이 마치 귀신 같다 해서 신귀(新鬼)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러나 이 명함 자체가 뇌물의 역할도 했다. 명함 석 장 만드는데 무명 한 필이 드는 ‘최고급 명품 회자’를 요구하는 선배들도 있었다(<성종실록> 1494년 11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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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고종 39년) 세자를 수행·호위하는 ‘배위’로 발령받은 김문진의 면신례 문서. 소창렬 문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서에도 김문진을 ‘말단찌꺼기(曺司)’라 표현했다. |김문웅씨 제공

■이이, 정약용조차 “차마 못할 짓이어서…”


조선역사를 통틀어 내로라하는 문인·정치인들도 이런 신고식을 견뎌내야 했다.


실학자인 이익은 9번의 과거에서 9번 모두 장원급제해서 이른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의 찬사를 받은 율곡 이이의 신고식 예를 들며 퇴계 이황(1501~1570)의 훈계도 소개하고 있다(<성호사설> ‘인사문·침희신진’).


“급제한 이이가 승문원의 신고식 때 공손치 못한 태도로 선배들을 대해 파직됐다. 퇴계는 ‘신참을 괴롭히는 신고식은 잘못된 일이지만 그런 신고식이 있는 줄 알고 들어갔다면 이군(李君·이이를 지칭)인들 혼자 모면할 수 있겠는가. 선배를 능멸하고 그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면 해괴하고 의리상으로도 온당치 못하다’고 했다.”


이익은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후배를 괴롭히는 것은 시속의 폐단이므로 퇴계의 훈계는 타당하지 않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퇴계의 뜻은 그게 아닐 것”이라고 풀이했다.


“퇴계는 ‘후배가 배우처럼 난잡하고 무람없는 행동을 해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말고 그저 선배가 시키는 대로 시늉만 하면 된다’는 뜻으로 이이를 훈계한 것이리라.”


피해자 본인인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신참의 옷을 찢고 관을 부수고, 진흙 속에 둘려 자존심을 잃게 하고 염치를 버리기 한 뒤에 관리가 되면 이 무슨 꼴이냐”고 한탄했다.


다산 정약용 역시 신고식의 피해자였다.


“절름발이 걸음으로 게를 줍는 시늉을 하고 수리부엉이 울음을 흉내내는 일 따위는 제가 직접 하는 것입니다. 시키는대로 해보려고 애를 썼으나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걸 어쩌겠습니까.”


정약용은 아마도 율곡 이이와 같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신고식에서 선배들이 시키는 우스꽝스러운 개인기를 따르지 않아 선배들의 미움을 산 모양이다. 정약용은 그래서 판서 권엄(1729~1801)에게 편지를 보내 “그저 난잡하고 우스운 형용을 드러낼 수 없어 명령에 따르지 못한 것이지 절대 존경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면서 “이제 마음이 풀리셨기에 이렇게 사과드리는 것”이라고 해명한 것이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이 1559년(명종 14년)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병 때문에 승문원의 1차 면신례에 참석하지 못해서 여러날 요양한 후 가까스로 면신례를 치렀다”고 전했다. 면신례는 새로 관리가 되는 신참들에게는 절대 빠뜨리고 넘어갈 수 없는 통과의례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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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년(영조 40년)지방관찰부 아전으로 채용된 아버지 박계조의 면신례 문서. 박계조가 2번째 면신례를 치렀음을 알리고 있다. |김문웅씨 제공

■4차원 새내기의 ‘자허면신’


면신례와 관련된 사료 중 이른바 ‘자허면신(自許免新)’, 즉 ‘자기 스스로 면신례 통과를 허락한’ 사례로 유명한 박이창(?~1451)이란 인물이 눈에 띈다. 과거에 합격한 박이창은 예문관에 배속되어 혹독한 면신례를 치러야 했다. 예문관은 신참을 갖가지 방법으로 괴롭히다가 50일이 지나서야 자리에 앉게 허락하는 악명높은 신고식을 치르던 관청이었다. 그러나 박이창은 행동이 조심스럽지 못해 여러번 선배에게 실수했다. 선배들은 그런 그에게 자리에 앉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이창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선배들 허락을 받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선배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박이창은 묵묵히 견뎠다. 외려 옆에 앉은 선배를 투명인간 대하듯 했다. 요즘이라면 ‘4차원 후배’라는 소리를 들을만 했다.


성현(1439~1501)의 <용재총화>는 그런 박이창을 두고 ‘스스로 허락한 면신례’라 하여 ‘자허면신’이라 표현했다. 직장내 집단 갑질을 일종의 무대응 전략으로 이겨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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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박계조)의 뒤를 이어 지방관찰부의 아전이 된 박창석의 면신례 문서. 문서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 모두, 초충(草훼·풀벌레)으로 지칭되고 있다. |김문웅씨 제공

■도총관의 출근을 가로막은 수습관리


1494년(성종 25년) 9월에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 하나가 터졌다.


막 부임한 도총관(정 2품) 변종인이 출근하려는데 권지(權知)가 “이봐 신래(新來)!”하며 가로막았다. ‘권지’는 지금의 수습관리를 뜻한다. 그런 새파란 자가 참판을 지냈고 막 오위도총부를 총지휘하는 도총관의 출근을 제지한 것이다. 이유는 딱 하나, “신임 도총관이 전입고참들에게 허참·면신례를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기막힌 하극상이었다. 변종인의 하소연을 들은 성종은 “아니 재상을 지낸 이한테 무슨 버르장머리냐”면서 사건에 연루된 권지 14명을 소환했다. 그러나 권지 이극달 등은 성종의 추궁에도 고개를 세웠다.


상의 앞이었지만 권지 이극달 등은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며 당당하게 말했다.


“무과 출신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술과 안주를 대접하며 회식을 한 뒤에야 정식관리로 대접받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상관이라도 ‘신래’라 합니다. 이것은 옛 풍습입니다.”


그러나 성종은 “그 무슨 풍습이 그러냐”면서 13명을 파직했다. 하지만 후폭풍이 거세게 일었다. 사건발생 두달 이 지났는데도 “재상한테 너무했다”는 파와, “뭘 그것 갖고 호들갑이냐”는 파가 논쟁을 벌였다. 결국 사간원 정원(정6품) 이의손이 “면신례는 불법이지만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풍속이었으니 권지들을 파직시킨 것은 심한 처사”라는 상소를 올렸고, 성종이 이를 가납함으로써 일단락됐다.


■“너도 곧 신래가 될 터이니 미리 맞아라!”


1535년(중종 15년) 7월20일 중종은 때아닌 비명소리에 놀랐는데,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기가 막혔다.


즉 국왕의 호위와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선전관(국왕의 무관 승지) 변한정과 박지화가 신참인 박양준으로부터 술을 얻어먹고 있었다. 한창 취기가 오를 무렵 부장 김극달이 합류했다. 이 김극달은 아직 급제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미 만취한 박지화가 김극달에게 “너도 곧 신래(신참)가 될 것이니 미리 면신례를 치르라”면서 김극달을 거꾸로 매달아놓고 마구 때렸다. 이 구중궁궐에서 난 비명소리가 임금의 귀에 들어갔다니 참 기막힌 일이다.


하기야 이보다 3개월 전인 1535년(중종 30년) 4월11일에는 ‘녹사(중앙관서 서리)가 신래(신참)을 닦달해서 가져온 소를 잡다가 의정부에 불을 낸’ 사건까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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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면신례의 모습을 그린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 ‘과거인신례’. 선배들이 막 과거에 급제한 신참(가운데 머리를 숙인 이)에게 ‘삼진삼퇴(三進三退)’를 시키며 괴롭히고 있다. /숭실대박물관 소장

■아직도 남아있는 꼰대의식


이밖에도 “이서배(관아에 속하여 말단 행정 실무에 종사하던 구실아치) 한 사람이 면신례를 치르는 비용이 100금”(<현종개수실록> 1661년 3월4일)이며, “군졸들이 면신례를 치른다며 신참 군졸을 학대해서 술과 음식, 그리고 금품을 요구하는 자들이 많다”(<숙종실록> 1699년 11월22일)는 문서도 눈에 띈다.


이런 폐단 때문에 <경국대전>은 ‘신참을 괴롭히는 자에게 곤장 60대’라는 규정을 만들었고, 임금들이 ‘면신례 금지·처벌’ 등의 조치를 여러차례 취했지만 별 무신통이었다. 아무리 “하지마라”고 해도, “요즘 애들의 뻣뻣하고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버려야 한다”(<중종실록>)는 선배들의 이른바 ‘꼰대의식’이 워낙 뿌리깊게 박혀있었기 때문이리라.


김문웅씨가 공개한 면신례 문서는 1902년 황태자 호위무관인 배위 김문진의 것까지 남아있다. 고려 말 시작된 신고식 문화가 그렇게 “하지마라. 곤장 맞는다”는 금령에도 불구하고 500년 이상 끈질기게 이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하기야 그런 신고식 문화는 ‘직장내 갑질’ ‘직장내 성폭력’ ‘빗나간 신입생 환영회’ 등으로 지금까지도 살아남았다. 466년전 중종 때 사헌부가 올린 상소문의 한 대목이 귓전을 때린다.


“선배들이 도리를 잃지 않는다면 후배 중 누가 감히 예를 범하겠습니까.”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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