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장어’ 찰진 살맛, 더위 물리치는 여름 맛
3가지 방식으로 즐기기
갯장어는 아는 사람만 아는 여름철 보양식이다. 같은 바닷장어인 붕장어(아나고)는 사철 즐길 수 있지만 갯장어는 여름이 제철이다. 5~10월 남해안에서 주로 잡히는데, 살이 찌고 기름이 오르는 7~8월에 가장 맛이 좋다. 급증하는 수요에 비해 물량이 부족하다 보니 가격은 민물장어(뱀장어)만큼이나 비싸다. 과거엔 참장어, 이장어, 개장어 등 다양하게 불렸다. 하지만 가장 흔하게 통용되는 건 ‘하모’라는 일본 이름이다. ‘물다’는 뜻의 일본어 ‘하무’에서 유래했다. 갯장어 요리를 즐겨 먹는 남해안에선 미식가들이 여름철마다 음식점에 ‘하모 개시’라는 광고가 붙기만을 기다린다.
일본에선 갯장어가 오래전부터 복달임 음식으로 사랑받았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남해안에서 잡히는 갯장어는 대부분 일본으로 비싼 값에 수출됐다. 2000년대 들어서 보양식으로 알려지며 국내에서도 수요가 늘었다. 실제로 갯장어는 고단백에 불포화지방산이 많고 칼슘과 철분도 다량 함유돼 여름철 원기 회복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비타민 A는 일반 어류보다 100배 많다.갯장어를 먹는 방법은 지역마다 다르다. 통영·고성 등 경남 지역에선 회로 먹는 걸 선호한다. 통영에선 갯장어를 통째로 고아낸 뒤 뼈를 건지고 숙주나물과 방아잎을 넣어 시락(시래기의 사투리)국을 끓여 먹기도 한다. 전남 여수·고흥에선 각종 한약재와 채소를 넣어 끓인 육수에 데쳐 먹는 샤부샤부가 인기다. 물론 다른 장어처럼 구워 먹기도 한다. 저마다의 매력을 지닌 갯장어 요리를 내놓는 식당 세 곳을 찾아 맛을 비교해봤다.
고소하고 담백한 회
통영 송학횟집은 20년 넘게 갯장어회를 다뤄온 전문점이다. 주요 관광지인 중앙시장 안에 있어 현지인은 물론 입소문을 들은 관광객들도 자주 찾는 곳이다. 수조에는 황금빛 몸통을 배배 꼬며 유영하는 갯장어가 한가득이었다. 주둥이마다 잘린 낚싯줄이 하나씩 달려 있는 모습이 독특했다.
갯장어는 양식이 없고 전부 자연산이다. 보통 전어나 전갱이를 미끼로 써 주낙(긴 줄에 100개 이상의 낚싯바늘이 달린 어구)으로 잡는다. 이빨이 날카롭고 한 번 물면 몸을 뒤틀며 강한 힘으로 낚아채기 때문에 낚싯바늘을 빼려다 손을 다치기 쉽다. 그래서 배 위로 건져올리면 낚싯줄만 잘라 옮긴다. 유충순 사장은 “간혹 그물에 다른 고기와 섞여 올라오는 경우도 있지만 상품가치는 떨어진다. 일본에서 수입할 때도 낚싯바늘이 있는 놈만 사가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송학횟집은 인근 고성의 자란만에서 어획된 물량을 주로 가져다 쓴다.
갯장어 요리의 핵심은 뼈를 다루는 데 있다. 갯장어는 척추뼈 외에도 살 속에 X자 모양으로 잔뼈(가시)가 수없이 얽혀 있는데, 그걸 일일이 빼낼 수 없기 때문에 먹기 좋도록 칼로 잘게 부숴야 한다. 그러려면 살점을 최대한 가늘게 썰어내는 수밖에 없다. 1~2㎜의 좁은 간격으로 촘촘하게 칼질을 해야 하니 숙련된 솜씨가 아니면 힘든 작업이다.
이윽고 칼국수 면발처럼 희고 가늘게 손질된 갯장어회(접시 크기에 따라 7만~12만원)가 식탁에 올랐다. 몇점을 집어 그냥 먹어보니 비린내가 전혀 없고 씹을수록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났다. 유 사장이 가르쳐준 갯장어회를 맛있게 먹는 방법은 이렇다. 먼저 그릇에 회를 먹을 만큼 덜고 깻잎, 양파, 당근, 양배추 등 썬 채소를 얹는다. 여기에 마늘과 쪽파, 깨소금 등으로 양념한 초장을 식성에 따라 붓고 마지막으로 콩가루를 더한 뒤 잘 섞어 먹는다. 일종의 회무침인 셈이다. 평소 회를 즐기지 않는 편인데도 “맛있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초장 맛이 독특해서 재료를 묻자, 유 사장은 “10여가지 재료가 들어가며, 영업비밀이라 가르쳐줄 수 없다”고 했다.
‘하얀 꽃’ 샤부샤부
서울 마포 대물상회는 전남 장흥 득량만에서 올라온 갯장어로 샤부샤부 요리를 하는 곳이다. 최문갑 사장은 “물살이 센 갯벌 지형에서 자랐기 때문에 생김새가 평균보다 길고 가는 대신 살이 차지고 식감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최 사장은 지난 10여년간 갯장어 철마다 하루 30~40㎏씩 연간 3t 물량을 다뤄온 갯장어 박사다.
샤부샤부에 들어가는 갯장어는 껍질을 벗기지 않고 그대로 쓴다. 손질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회와 동일하다. 하지만 껍질을 자르지 않으면서 껍질 바로 안쪽까지 박혀 있는 잔뼈를 잘라내야 하기 때문에 칼을 쓸 때 힘 조절이 훨씬 어렵다. 최 사장은 갯장어 요리가 발달한 일본에서 손질법을 익혔다. 빠른 속도로 칼질을 시작하자 서걱서걱 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칼을 앞쪽으로 튕기듯이 쳐낸다는 느낌으로 하는 게 요령”이라고 했다. 적당한 깊이까지 칼집을 넣는 게 자유자재로 될 때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고 했다.
손질하고 남은 머리와 뼈, 잔가시와 함께 잘라낸 자투리 살은 잘 모아뒀다 육수를 끓였다. 다듬어서 4~5㎝ 길이로 자른 갯장어를 끓는 육수에 살짝 담그니 금세 살이 바깥으로 오므라들었다. 칼집 낸 모양대로 살이 벌어지는 게 하얀 꽃이 피는 모습과 같았다. 함께 데친 미나리와 생양파, 그리고 멸치로 양념한 된장까지 더해 입에 넣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최 사장이 일본식 ‘하모 유비키’ 맛을 보여주겠다며 접시에 얼음물을 담아왔다. 뜨거운 물에 데친 뒤 다시 얼음물에 살짝 식힌 갯장어 살은 수축되며 쫄깃한 식감을 냈다. 마치 새우살을 씹는 것처럼 통통 튀는 맛이 났다. 최 사장은 가끔씩 갯장어 부레도 샤부샤부에 함께 낸다. 민어 부레처럼 쫄깃한 식감은 비슷한데 육고기 향이 난다고 했다.
대물상회는 정해진 메뉴 없이 요리사가 알아서 음식을 내주는 오마카세(1인 7만원) 방식으로 운영한다. 여름엔 갯장어 샤부샤부와 민어, 농어, 참돔 등을 주로 낸다. 더운 요리로 카르토치오(생선 등 해산물을 포일로 감싸 오븐에 구운 요리·사진)를 내기도 하는데, 기자가 찾은 날엔 갯장어 반마리를 넣은 카르토치오를 선보였다. 블랙올리브와 토마토, 당근, 호박, 양파, 파프리카 등 잔뜩 들어간 채소는 기름진 맛을 잡아주면서 다양한 색으로 눈도 즐겁게 했다. 바닥엔 얇은 감자를 깔았고 로즈메리로 향도 냈다.
탱탱한 식감 살린 데리야키
최근 조리장을 새로 영입한 밀레니엄 서울힐튼 일식당 겐지는 이달부터 정통 일본식으로 ‘갯장어 데리야키 특선’ 메뉴(12만5000원)를 선보이고 있다. 데리야키는 간장 양념구이를 말한다. 일본식 민물장어 덮밥을 만들 때 쓰는 바로 그 양념이다.
데리야키를 할 때도 먼저 살을 잘게 썰어 잔뼈를 부수는 작업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간장과 청주, 미림, 설탕 등을 섞어 갯장어에 바를 양념을 만드는데 이것이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공력이 많이 든다고 했다.
손질한 갯장어는 야키바라 불리는 생선구이 전용 화로에서 양념을 발라가며 여러 차례 구워낸다. 서너번은 구워야 살에 양념이 배어들면서 먹음직한 색이 나온다. 불이 조금만 세거나 시간이 길어져도 갯장어가 타버린다. 양념 때문이다. 한눈팔 틈이 없다. 한여름 뜨거운 불 앞에서 이렇게 생선을 여러 차례 뒤집어가며 굽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손진수 셰프는 “정성이 아주 많이 들어가는 음식”이라고 표현했다.
처음엔 익숙한 양념 맛에 하리쇼가(생강을 가늘게 채썬 것)를 곁들이는 것까지 민물장어 요리와 완전히 똑같아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었다. 완성된 음식의 모양새도 거의 같았다. 그러나 입안에서 씹히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기름지고 부드러운 식감의 민물장어가 입속에서 살살 녹듯 사라지는 것과 달리 갯장어는 살이 탱탱했다.
한참 음미하며 씹는 동안 달콤하면서도 살짝 매운맛이 도는 양념의 풍미가 입안 가득 퍼졌다. 민물장어보다 지방은 적고 단백질은 많은 갯장어만이 낼 수 있는 맛이었다.
김형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