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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생각하며 칼자국 깊이 쟀다"···이춘재로 본 CSI 애환

[김승현 논설위원이 간다] 이춘재 사건은 시대적 안타까움

살인범도 CSI 드라마 보며 공부

새 컵만 보면 지문 실험 ‘직업병’

증거 오염 막는 ‘무결성’ 갖춰야



이춘재 사건으로 본 CSI의 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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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은 잊혀질까. 1986년 첫 범행 33년 만에 진범 이춘재(56)가 드러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경찰 역사에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과학수사(CSI·Crime Scene Investigation)가 채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의 실패는 발전의 자극제가 됐고, 그 과학수사(DNA 분석) 덕분에 사건이 마무리됐다.


이를 지켜본 현직 과학수사 요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의 현장감식 베테랑 나제성 경위는 “지금의 발전된 시스템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시대적인 안타까움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국 1300여 명의 과학수사관들은 어느 때보다 사명감이 크다. 각자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6명을 만나 책임감 뒤에 감춰진 애환을 들어봤다. 현장감식(나제성 경위), 프로파일러(경찰청 과학수사운영계 백승경 경위), 거짓말탐지(서울청 과학수사계 유지현 경위), 지문 감정(경찰청 법과학분석계 장철환 공업주사), 영상·문서 분석(경찰청 법과학분석계정서윤 경사, 최영호 순경) 전문 과학수사 요원들과의 인터뷰는 지난 29일 경찰청에서 진행됐다.


숨은 그림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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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부터 현장 감식 업무를 시작해 만 20년이 된 나제성(52) 경위는 자신의 업무를 “숨은 그림 찾기”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에 빗댔다.


Q : 어떤 의미인가.


A : “20년 전엔 증거물이 대부분 현장에 남아 있었다. 지금은 왜곡되고, 감춰지고, 훼손돼 있다. 현장에 첫발을 딛는 순간 뒷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살인범도 과학수사를 공부한다. 범인이 증거를 치우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없애려고 한 흔적 찾기’인 셈이다.”


Q : 살인범들이 어떤 공부를 하던가.


A : “수집된 정보를 보면 범행 전에 CSI 드라마와 영화, ‘도시경찰’ 같은 프로그램을 본 기록이 나오더라. 미디어와 영상물이 범행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Q : 대책은 뭔가.


A : “강력 범죄가 바뀌는 패턴에 맞춰 대비해야 한다. 과거엔 강도 살인이 많았으나 지금은 원한 범죄, 울분에 의한 잔혹 범죄, 묻지마 살인 등이 늘고 있다. 완전 범죄를 추구하려는 노력도 나타난다. 그래서 프로파일러, 영상분석, 폴리그래프(거짓말탐지) 등이 함께 팀을 이뤄 현장감식을 할 필요성이 커졌다. 더 힘들어졌지만, 반드시 흔적은 남는다. 99%의 증거가 없어져도 1%의 증거로 현장을 제압하는 게 우리 일이다.”


Q : 화성 8차 사건의 기록에 체모 개수가 달라 논란이 됐다.


A : “현장감식 결과보고서는 그래서 정확해야 한다. 증거가 오염돼서는 안 된다. 잔혹한 범죄는 그 잔혹성이 제대로 표현돼야 한다. PC방 살인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83군데나 찔린 자상이 있었다. 나도 사람이니까 괴로웠다. 유가족을 생각하면서 자상의 깊이와 넓이를 세밀하게 일일이 조사했다. 훼손된 시신을 보며 느낀 울분이 검사와 판사에게도 전달될 수 있게, 살인자가 죗값에 맞는 처벌을 받을 수 있게 정확하게 증거를 수집해야 한다.”


Q : 수사요원에 따라 감식도 달라지나.


A : “한국의 과학수사는 ‘오픈북’이다. 한 수사팀의 노하우가 전국 지방경찰청에 전달되고 공유된다. 선배들도 그랬고, 나도 그렇게 하고 있다. 한국의 과학수사가 세계 최고 수준이 된 원동력이다. 최근엔 해외에도 기술을 전해주는 ‘치안 한류’ 업무도 한다.”


프로파일러 너무 화려하게 그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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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영화에 CSI가 단골 소재인 점은 ‘진짜’에겐 난감한 일이다. 프로파일러 백승경 경위는 “프로파일러가 왜곡되고 연예인화됐다”고 안타까워했다. 2005년 프로파일러 1기 특채로 경찰에 들어온 그는 “영화 속에서는 광적인 범인과 맞닥뜨려 총을 겨누는 프로파일러도 나온다. 하지만, 저는 총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며 웃었다.


Q : 드라마 주인공으로 묘사되면 뿌듯할 것 같은데.


A : “후배 순경들도 많이 선망하고 지원을 문의한다. ‘영화 속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더 생각해 보고 연락하라’고 말해 준다. 프로파일링은 하나의 보고서를 위해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1주일을 투입해야 한다. 피의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 가정환경, 전과기록 등 많은 자료를 분석한다. 정보와 시간의 한계가 있는데 ‘프로파일러는 다 안다’는 식의 왜곡된 기대가 있다. 미디어를 통해 부풀려지면서 현실과 괴리가 생겼다.”


Q : 어떤 괴리가 있나.


A : “연쇄살인이나 사이코패스 범죄에서는 프로파일러의 역할이 돋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건은 많지 않다. 경찰 경험이 없는 프로파일러가 많아진 것도 불편하다. 프로파일러는 현직 경찰관으로서 어떤 강력범이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 혐오 범죄인지 고의 범죄인지, 범인의 기질적 원인이 있는지 등을 분석해서 형사들의 이해를 돕는 일을 한다. 범죄 발생 초기에 편견이나 감에 의해 수사 방향이 잘못 잡힐 때 ‘딴지’를 거는 역할이다. 제3자의 관점으로 수사 방향이 치우치지 않게 소통한다.”


나제성 경위는 “실제로 과학수사의 힘은 소통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장감식에서 찾은 증거물을 수사요원들은 목숨처럼 아낀다. 상관과도 내 증거를 지키기 위한 논쟁을 한다”고 했다. 이어 “잘못에 대해 바로 직언을 하는 구조라야 과학수사가 발전한다. 왜 이런 장비를 만들어 내보내느냐고 따져야 장비가 개발되고, 프로파일러가 딴지를 걸면 수사 방향이 조정되는 식이다”고 설명했다. 과거엔 지휘관이나 정치인이 함부로 드나들던 현장에서도 ‘나가 계세요’ ‘보호 장구 착용하세요’라고 지시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사건 현장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는 얘기다. 과학수사팀이 일선 경찰서에서 지방경찰청 단위로 광역화한 것도 과학수사 시스템을 업그레이드 한 중대 변화였다.


중요성 커졌지만, 대우는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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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 4일은 ‘과학수사의 날’이다. 1948년 11월 4일 치안국 감식과가 만들어진 날을 기념한다. 2004년엔 경찰청 수사국 과학수사센터로 개편됐고, 2016년에 경찰청 과학수사관리관 체제로 승격됐다. 경찰청은 지난 21일부터 3일간 인천 송도에서 ‘과학수사와 절차적 정의: 도전과 혁신’을 주제로 국제 CSI 컨퍼런스를 열었다.


다양한 과학수사 기법이 등장하면서 과거 지문감식의 비중이 70%였던 것이 지금은 30~40% 정도로 줄었다. 상대적으로 CCTV의 활용도는 높아지고 있다. 정서윤 경사는 “영상분석으로 피의자의 키를 측정하거나 걸음걸이의 특성으로 범인을 특정하고 있다. 법보행분석의 비중이 더 커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거짓말탐지 조사관인 유지현 경위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사건이 몰려온다”면서 “100%의 진실도, 100%의 거짓도 아닌 말에서 거짓말을 구분해 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질문을 만드는 작문 실력, 말하기 기술, 휩쓸리지 않는 심리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나제성 경위는 “일선 형사들의 과학수사 의존도가 과거에 10% 정도였다면 지금은 100% 그 이상이다. 피의자 인권을 중시하는 시대에는 과학적 증거가 없으면 참고인 조사밖에 못 하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그는 “그런데도 포상이나 승진에서는 과학수사가 다른 분야에 비해 소외되는 편이다”고 말했다. 영상 특채인 최영호 순경은 “감정의 전문성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전문 분야의 업무를 명확히 구분하고 인원을 보강하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쓴소리를 했다.


증거의 무결성을 위해


나 경위는 카페에서 새로운 재질의 종이컵이나 텀블러를 만지면 곧장 지문 채취 실험을 한다고 했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범인이 만질 수 있는 일상용품은 언제든 ‘검체’가 될 수 있어서다. 그는 “우리 과학수사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지만, 내년과 그다음 해에는 또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영재 경찰청 과학수사운영계장은 과학수사의 팀워크를 “종합예술”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과학수사가 중요해진 만큼 그 오류도 치명적이다. 증거의 무결성(無缺性·증거가 오염되지 않게 하는 것)을 위한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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