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상영 중 뛰쳐나간 사람들
손민원의 성·인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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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에 걸쳐 요즘 ‘핫하다’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완벽한 타인’을 봤다. 그중 ‘보헤미안 랩소디’는 영국의 록 밴드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의 짧은 생을 다룬 영화다. 영화 전편에 걸쳐 친숙한 음악이 흐르고 있어 내가 마치 라이브 공연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영화에 흠뻑 젖어 들어 관람하고 있는데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남녀가 캄캄한 영화관에서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걸까?” 보통의 경우 중간에 나갈 때는 다른 사람의 영화 관람에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살금살금 나가는 게 예의겠으나 이 남녀는 대놓고 씩씩거리며 소란을 피웠다. 그리고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이렇게 크게 말했다. “아! 저질 영화를 보고 있다니…. 볼 수가 없네….” 양성애자인 프레디 머큐리가 동성 간 키스를 하는 장면 직후였다.
영화 ‘완벽한 타인’은 고향 친구 다섯 명의 대화 속에 우리 사회 성 소수자의 위치가 잘 드러나 있었다. 알고 지낸 지 40년이 넘은 친구가 동성애자임을 45세가 넘어서야 알게 됐다. 그러나 영화 속 성 소수자로 나오는 영배는 전직 교사이고, 자신의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으로 인해 안정된 직장에서도 나와야 했다. 친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40년 지기 친구들이었지만 영배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말할 수 없었다.
‘보헤미안 랩소디’에서는 나와 다른 성 정체성에 분노해 시위하듯 영화관을 박차고 나가는 동성애에 대한 극한 혐오 세력을 만날 수 있었고, ‘완벽한 타인’에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친구 사이였지만 완벽한 타인의 모습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게 하는 사회적 시선이 아프게 전달됐다.
이 차별의 현상은 나와 다른 성 정체성, 나와 다른 성별, 나와 다른 민족, 나와 다른 종교, 나와 다른 피부색, 내가 갖지 않은 장애, 나이의 많고 적음, 가족 형태 등 수많은 이유가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럼 나와 다른 너를 구분하는 것은 누구의 선택일까?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됐던 ‘미스터 션샤인’이란 드라마 대사 중에 “일본에선 한국인을 전시한다”는 대화가 나온다. 그런데 이 드라마 내용이 허구가 아닌 사실에 기초한 것임을 알고 차별을 만드는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1907년 도쿄에 ‘도쿄 권업 박람회’가 열리는데 여기에 조선인 남녀를 가둬 전시했다. 한국의 전통 복식을 입히고 의자에 앉아 있게 했다. 미래에 일본의 식민지가 될 한국의 물품을 전시하면서 동시에 한국인도 전시했다. 여기에서 일본인 안내자가 이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면서 입장료를 어른은 10전, 어린이‧군인은 5전 받았다고 한다. 이 전시에 대해 일본 아사히신문의 평은 이랬다.
‘박람회장에 조선 동물 두 마리가 있는데 아주 우습다.’ 이는 서유럽에서 아시아‧아프리카인들을 박람회에 가둬 전시하며 우리와 다른 미개한 종족임을 인식하게 하는 사례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월한 힘을 가진 자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이 철저히 우리와 다른 존재임을 확신시키고 차별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근거로 삼고 있다. 이렇게 차별의 가해는 상대적으로 힘의 우위에 선 집단의 언어이다.
누군가를 혹은 어떤 집단을 타자화하는 것에는 나는 정상이고 나와 다른 너는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보는 ‘시선의 획일성’이 있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보지만 동성이 서로 사랑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비정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TV에서 나오는 사람은 날씬하고 예쁘며 잘생긴 것이 ‘정상’이 되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난 몸과 얼굴들은 ‘비정상’으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자신을 평가해 끊임없이 다이어트하고 성형외과를 찾고 있으며 식스팩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청소년에게는 왕따의 한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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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가정’은 어떤 가정인가? 수많은 광고 속 가정의 모습은 엄마, 아빠와 손잡고 해맑게 웃는 단란함과 따뜻함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곳이다. 이 모습에서 벗어나면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 된다. ‘가화만사성’ ‘가정이 와해되면 안 된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가정 안에 폭력이 난무해도 가족의 일원 중 한 사람은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지 못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가정폭력 신고율이 저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상이라 여겨지는 범주에서 벗어난 몸 즉 장애의 유무에 따라 장애인을 무조건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동정의 대상에 올려놓기도 한다. “난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아”라고 하면서 “장애인을 위한 학교나 시설은 반대한다”고 하는 것은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공간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타자화의 시선인 것이다.
그럼 우리 중 누구도 ‘소수자성’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존재할까? 소위 ‘SKY(서울대·고대·연대)’로만 뭉친 집단에서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소수자성을 갖게 된다. 어리다는 이유로 아주 좋은 의견을 내도 값어치가 없게 취급되고, 배제의 대상이 된다. 혹은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해서 밥과 세금을 축내는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내 자녀가 외국으로 일하러 가면 그는 이주 노동자가 된다. 내가 일본으로 여행 갔을 때 “바퀴벌레 한국인은 물러가라”라며 일본 우익 집단이 내 옆에서 시위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일본에 있었다면 나는 소수자이다. 그러므로 소수자성은 나와는 별개인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된다.
나는 내 안의 소수자를 어떻게 수용하는가? 나를 보는 관찰이 필요하다. 내 안에 난민 혐오는 없는가? 내 안에 청소년 혐오는 없는가? 내 안에 여성 혐오는 없는가? 내 안에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없는가?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좋은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좋은 사회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정상과 비정상, 나와 ‘다름’이 ‘틀림’으로 여겨지고 소외당하는 집단이 많아질수록 소수자‧약자는 기본적 권리마저도 누리지 못하게 되고 사회적 갈등은 점점 심화한다. 나와 다름에 대해 존중하며 수용하려는 자세가 돼 있어야 ‘우리’의 영역은 넓어지고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손민원 성·인권 강사 qlov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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