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 피고 지는 배롱나무…4가지색 '여름 꽃잔치' 명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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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하는 햇볕에 기죽지 않고 도리어 진분홍색 꽃을 피워 여름내 색 잔치를 벌이는 나무. 요즘은 서울 공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아름드리 배롱나무 군락을 보려면 역시 남도로 가야 한다. 배롱나무가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전남 장흥에 국내 최대 배롱나무 군락지가 있다. 단지 수많은 노거수가 살 뿐 아니라 전국 어디서도 보기 힘든 여러 색의 배롱나무 꽃대궐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지난 6일 장흥의 작은 마을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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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100년 넘는 배롱나무 장관
장흥읍 평화리에 자리한 송백정(松百井)은 정자가 아니라 연못이다. 아담한 연못 주변을 50여 그루 배롱나무가 에워싸고 있다. 수령 100년이 훌쩍 넘는 배롱나무는 서울에서 본 배롱나무와는 아예 다른 종 같다. 꽃은 둘째치고 우람한 나무 형상부터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매끄럽고 두툼한 줄기가 이리저리 꺾인 모습이 근육질 남성의 팔뚝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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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백정 배롱나무꽃은 7월 말 개화했다. 정자와 배롱나무꽃이 어우러진 담양 명옥헌도 근사하지만 송백정이 특별한 것은 색깔의 화려함에 있다. 진분홍색 일색인 여느 배롱나무꽃과 달리 송백정에는 4가지 색의 꽃이 핀다. 분홍, 보라, 연보라, 하양. 눈부신 색채의 꽃과 연못, 멀리 억불산(518m) 산세가 그림처럼 한눈에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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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이 어우러진 모습 못지않게 이미 진 꽃잎이 연못을 뒤덮은 모습도 멋스럽다. 가시연, 어리연 가득한 연못에 잔꽃 송이가 만개한 것 같았다. 바람이 세게 불어 꽃이 많이 지는 날에는 연못 자체가 분홍빛으로 물든다. 이 장관이 8월 말까지 이어진다. 한 번 핀 꽃이 한 달 이상 그 모습을 유지하는 건 아니다. 한 나무에서 세 번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한단다. 실제로 백일 동안 꽃이 피는 건 아니지만 워낙 오래 꽃이 피어서 배롱나무꽃을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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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니 송백정을 가꾼 사람의 사연이 궁금해진다. 주인공은 독립운동가이자 2선 국회의원이었던 고 고영완(1914~91)씨다. 장남인 고병선(86)씨는 “1930년대에 도쿄 유학을 마치고 온 아버지가 고향 집 앞 연못을 일본식 정원으로 꾸며 누구나 감상할 수 있게 했다”며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고 소나무와 배롱나무, 동백나무로 조경한 정원은 당시 보기 힘든 형태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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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좋기로 소문난 상선약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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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백정 옆에는 전남 문화재자료 161호로 지정된 ‘무계고택(霧溪古宅)’이 있다. ‘고영완가옥’으로도 불리는 이 집은 고병선씨의 증조부가 1852년에 지었다. 전형적인 남도식 일(一)자 목재가옥인데 언덕에 자리해 삼단으로 축대를 쌓은 모습이 독특하다. 고택 마당에는 석등과 각종 유물이 나뒹군다. ‘정화사(淨化寺)’가 있던 절터였기 때문이다. 고씨 조상들이 집 앞에 연못을 만든 것도 억불산과 절이 내뿜는 강한 기를 억누르기 위해서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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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고택은 집 자체도 기품이 느껴지지만 집으로 오르는 돌계단과 정원이 특히 운치 있다. 빼곡하게 자란 맹종죽과 거대한 느티나무, 팽나무가 울울한 숲을 이루고 있다. 송백정 바로 옆에 있는데도 집이 안 보일 정도로 정원이 거대하다. 고병선씨는 "아버지가 정치에 몰두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집 8채 중 2채만 남기고 헐었는데도 나무는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며 "지금 생각하니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송백정이 있는 평화리는 장흥에서도 물 좋기로 소문난 마을이다. 작은 마을에 우물이 8개나 되고 과거 장흥읍 주민이 전부 여기서 물을 떠다마셨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래서 평화리를 상선약수(上善若水) 마을이라 한다. 송백정도 자연스레 고인 샘물을 넓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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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좋고 숲 좋은 평화리에서는 전통 발효차 ‘청태전’도 맛볼 수 있다. 2008년 일본 시즈오카(静岡)에서 열린 세계녹차대회에서 금상을 딴 김수희(70)씨가 운영하는 ‘평화다원’이 마을 들머리에 있다. 청태전은 장흥에서 자라는 야생차를 6개월 이상 숙성해서 마신다. 3년, 5년 숙성한 차도 있다. 오래 묵을수록 비싸다. 찻잎을 뭉쳐 놓은 모양이 주화 같기도, 떡 같기도 해서 돈차, 떡차로도 불린다. 구수하고 그윽한 차 향이 다원 창밖으로 보이는 평화로운 마을 풍광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장흥=글·사진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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