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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살 녹는 풍천장어, ‘조개의 여왕’ 백합…선운사 단풍도 식후경

선운사 어귀 장어 집만 29개

민물 참게장·새우탕도 별미

유기농 양식 밥상 내는 농원



일일오끼 - 전북 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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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땅에 들어서면 맛있는 냄새가 난다. 이를테면 요맘때 단풍 산행객이 몰리는 선운사 어귀는 유서 깊은 풍천장어 거리다. 붉게 물든 천년고찰을 드나들다 보면 장어 굽는 향을 참을 재간이 없다. 곰소만(줄포만) 갯벌의 백합, 소하천의 참게와 민물 새우는 끓은 물에 담가만 놔도 개운하고 담백한 향을 낸다. 유기농 상차림을 내는 농원, 진한 사람 냄새를 풍기는 카페도 있다.



고창은 갯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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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땅과 고창 땅 사이를 깊숙이 파고드는 곰소만. 썰물이면 해안을 따라 대략 5㎞ 폭 넓디넓은 갯벌이 드러난다. 갯벌 체험의 대명사가 된 하전마을과 만돌마을도 고창 갯벌이 터전이다. 경운기가 다닐 만큼 단단한 펄이 발달한 터라 갯벌 체험의 스케일도 남다르다. 소위 ‘갯벌택시’ ‘갯벌버스’로 통하는 트랙터를 타고 갯벌에서 실컷 드라이브를 즐기다 조개를 캔다.


만돌마을 김진근(46) 이장은 “갯벌에선 계절이 반대다. 지금은 수확이 아니라 씨 뿌리는 계절”이라고 했다. 썰물의 시간. 물이 먼바다로 쓸려나가자 어민들이 트랙터와 경운기를 이끌고 줄지어 갯벌로 나갔다. 그들은 먼 갯벌로 나가 종패(바지락 씨앗)를 뿌리고 지주의 김발을 고쳐 맸다. 백합과 동죽을 캐는 아낙, 바다에 던져둔 그물을 걷으러 나서는 어부, 그들 사이에서 먹잇감을 찾는 민물도요 떼…. 갯벌의 늦가을은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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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갯벌에서 가장 이름난 먹거리는 백합이다. ‘조개의 여왕’으로 불리는 백합은 따로 해감이 필요 없을 정도로 희고 깨끗하다. 살이 도톰하고 맛도 깊다. 새만금 간척사업의 영향으로 백합이 씨가 마른 부안과 달리, 고창 갯벌은 아직 건재하다. 고창 석정힐 CC 인근의 ‘본가’가 이름난 백합 전문집. 25년째 백합을 다루는 김정숙(63) 사장은 “백합죽은 간도 특별히 하지 않는다. 백합이 머금은 바닷물이 자연스러운 맛을 낸다”고 말했다. 백합 살을 듬뿍 넣은 백합죽(1만3000원), 매콤달콤한 양념으로 버무린 백합무침(1만8000원) 모두 감칠맛이 대단했다.



‘풍천’은 지명 아닌 바다·민물 만나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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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하면 떠오르는 풍천장어. 이 기회에 짚고 가자. ‘풍천’은 지명이 아니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장소, 즉 장어가 살기 좋은 갯가를 가리킨다. 강화도 더리미 포구, 나주 구진포 등 이름난 장어구이 촌이 죄 강 하구에 자리 잡은 까닭이다. 풍천장어라는 브랜드를 팔도에 알린 고창의 환경도 비슷하다. 인천강(주진천)이 선운산(336m) 동쪽 자락을 따라 S자를 그리며 흐르는데, 조수 간만에 따라 바닷물이 수시로 드나든다.


고창 풍천장어는 1970년대 뿌리내렸다. 강둑의 몇몇 집이 인천강에서 낚은 장어를 구워 팔던 것이 고창의 식문화로 자리 잡았다. 80년대 후반 민물장어를 전문적으로 기르는 양만장(養鰻場)이 하나둘 생기면서 선운산 주변으로 식당이 속속 들어섰다. 현재 선운사 어귀에 29개 장어구이 집이 늘어서 있다. ‘선운산 풍천장어 거리’의 오늘이다.


요즘은 소금구이가 흔하지만 풍천장어의 기본은 고추장 양념이다. 72년 문을 열어 3대째 이어오는 ‘연기식당’ 역시 고추장 양념장어구이(3만5000원)를 찾는 손님이 더 많다. 대여섯 시간 재료를 푹 고아 만든 고추장 양념을, 초벌구이로 기름기를 뺀 장어에 발라 가며 구워낸다. 32년째 석쇠를 잡는 정영옥(53) 사장은 “겹겹이 양념을 두르면서 타지 않게 계속 뒤집어 준다. 단순하지만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반세기 세월과 정성이 어디 갈 리 없다. 과연 느끼함 없이 부드럽고 담백했다.



밥도둑 술도둑 재미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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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은 곳곳이 풍천이다. 인천강만이 아니라 고창천·갈곡천·선운천 등의 소하천이 고창 땅을 훑고 서해로 흘러간다. 맑은 민물이 있어 먹거리도 풍부하다. 참게와 민물 새우가 대표적이다.


참게는 장어처럼 바다와 강을 오가며 사는 회유성 해물이다. 첫눈이 올 즈음, 그러니까 11월 하순에 잡히는 놈을 최상품으로 친다. 산란 전 알이 가득 차는 시기다. 부안면사무소 인근 ‘전주회관’이 현지인이 꼽는 참게 전문집이다. 참게는 맛과 향이 진한 반면 바닷게보다 살이 턱없이 모자라다. 전주회관 권영출(62) 사장은 20년 묵힌 씨간장을 며칠이고 달여 숙성한 다음, 양파·풋고추 등을 푸짐하게 썰어 넣어 참게장을 담근다. 게살 빼먹는 재미보다 김에 양념을 올려 밥을 싸 먹는 재미가 더 큰 집. 두 그릇은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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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저수지 옆에는 42년 내력의 매운탕 집 ‘인천가든’이 있다. 한 자리에서 3대를 이어온 덕에 관광객보다 오랜 단골이 더 많다. 메기탕·송사리탕도 있지만, 새우탕의 명성이 워낙 높다. 별다른 재료 없이 보리새우와 무를 뚝배기 한가득 담아 빨갛게 끓여 내는데, 시원한 국물 맛과 톡톡 씹히는 새우 식감 덕분에 계속 숟가락질하게 된다. 해장용으로도, 술안주로 더할 나위 없다. 보리새우보다 곱절 이상 비싼 토하젓이 밑반찬으로 깔린다.



맛있는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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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서쪽 끄트머리의 구시포. 너른 갯벌과 해수욕장이 있어 예부터 관광객이 끝이지 않던 명소인데, 요즘은 바다나 일몰 구경하는 사람보다 밥 먹으러 찾는 이들이 더 많다. 구시포항 인근에 자리한 ‘상하농원’의 힘이다. 상하농원은 고창군과 농림축산식품부, 매일유업이 합자해 2016년 문을 연 농촌 테마파크다. 9만9000㎡(약 3만 평) 규모로, 양·젖소·염소가 사는 동물농장이자 호텔이며 유기농 햄·잼·빵을 만드는 공방이다.


유럽풍 농가 산책, 송아지 먹이 주기, 빵 만들기, 농산물 수확, 김장 체험 등 즐길 거리가 제법 다양한데 누가 뭐래도 먹는 즐거움이 가장 크다. 농원 한편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상하키친’은 농원 공방에서 만든 소시지, 텃밭에서 갓 뜯어낸 제철 채소, 목장에서 짜내고 발효한 우유와 치즈 등 각종 유기농 식재료로 밥상을 차린다. 이런 구성이면 건강은 둘째 치고 맛이 없기가 쉽지 않다. 김형천(33) 셰프는 “건강한 식재료를 그대로 맛볼 수 있게 되도록 단순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대표 메뉴인 소시지 피자(2만1000원) 역시 구성이 단출했다. 손 반죽한 쫄깃한 도우 위로 고창산 돼지고기와 한우를 가득 채워 만든 소시지만이 촘촘히 오르는데 제법 고상한 맛과 향을 냈다.



초행자는 카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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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껏 먹고 돌아다니는 ‘먹방 투어’에도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미식가의 쉼터가 되어줄 특색 있는 카페가 고창 곳곳에 포진해 있다. 고창이 낯선 여행자라면 고창읍성 앞 ‘모로가게’부터 들러 보길 권한다. ‘맛집’ ‘술집’ ‘숙소’ ‘인생 사진’ 등 취향대로 운만 띄우면 오지랖 넓은 주인장이 생생한 여행 정보를 꺼내놓는다.


베테랑 여행작가이자 여행사 대표인 김수남(53)씨가 운영하는 카페다. 규모는 작지만 각종 여행 서적으로 빼곡한 서가, 매월 주제를 바꿔가며 사진을 전시하는 담벼락 사진관 등 구석구석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케냐 기린 호텔을 연상케 하는 벽화 쪽 테이블이 이른바 인기 포토존이다. 흑임자·귀리 라떼, 우슬식혜 등을 대표 메뉴로 내놓는다. 빈손으로 들어갔다가, 노트 한가득 추천 여행지를 들고나오게 된다.


방치된 폐교를 리모델링한 이색 카페도 있다. 고창읍 덕정리의 ‘들꽃카페’는 옛 초등학교 교정 전체를 수목원처럼 꾸며 풀 냄새가 그윽하다. 해리면 바닷가에 자리한 ‘책마을 해리’도 폐교를 독립출판사 겸 카페로 고쳐 손님을 맞는다. 약 20만 권의 책에 파묻혀 커피를 즐길 수 있다.


고창=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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