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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청기 끼고 단역 맡는 배우 오현경 "역할 달라고 내가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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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천천히 말해줘요.” 84세의 배우 오현경은 작고 투명한 보청기를 양쪽에 끼고 있다. “보청기 쓴 지 한 5~6년 됐나. 그때 안 써도 되는데 무리하게 써서, 귀가 더 나빠졌다 하더라고. 아쉽지.”


오현경은 보청기를 끼고 연극 무대에 오른다. 다음 달 7~16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열리는 연극 ‘레미제라블’에도 출연한다. “상대 배역을 맡은 젊은 배우가 셋인데, 셋이 다 스타일이 달라. 거기에 맞춰서 나도 다 다르게 연기해야돼.” 2년 전 손숙과 함께 연기할 땐 보청기를 빼놓고 무대에 올랐다. 귀가 안 들려도 그는 본능적으로 연기를 한다. 후배 연기자들이 ‘교과서이자 정석’이라 불리는 그 연기다.


‘레미제라블’에서 오현경이 맡은 역할은 질 노르망. 부르주아 청년인 마리우스의 할아버지다. 2막의 두 장면에 나온다. 아들처럼 키운 손자와 견해 차이로 언쟁을 벌이는 장면, 그리고 손자가 민중 봉기에 참여하기 직전 만나는 장면이다. 1955년 데뷔, 경력 65년인 원로 배우는 단역을 자처했다. 2011년 ‘레미제라블’에서도 이 역할이었고, 2012, 2013년에 이어 이번이 네번째다.


“이제는 너무 큰 배역을 줘도 힘들어. 총명기가 다 빠져서.” 역할은 작지만 존재감은 묵직하다. 오현경은 ‘레미제라블’ 출연 배우를 전부 모아 연기법 세미나를 열었다. 연습 때마다 조언도 빼놓지 않는다.


강조하는 것은 배우의 기본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이야기 있잖나. 왕초 생쥐가 ‘누가 가겠냐’ 물었을 때 ‘제가 가겠습니다’ 하고 대사를 해야 하는데 연극 배우들 시켜보면 거의 다 틀린다”고 했다. “‘제가’에 강세를 둬야 의미가 전달되는데 거의 잘못한다. 요새도 TV를 틀어보면 대사를 틀리게 하는 배우가 너무나 많다. 발음이랑 강세를 틀리면 영 다른 말이 되는데.”


오현경은 연극 배우 중에서도 정확한 발음, 튼튼한 발성, 선명한 감정 표현으로 이름이 높다. 오현경의 화법과 연기술을 연구한 석사 학위 논문도 2010년 나왔다. 그가 대중에 알려진 계기는 1987년부터 6년동안 방송된 드라마 ‘TV 손자병법’. 축 처진 어깨에 허풍스러운 말투로 공감을 얻은 이장수 과장 역할이었다.


TV로 이름을 알렸지만 꿈꾼 것은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연극 무대였다. 데뷔는 서울고등학교 3학년 때 출전한 ‘전국 고교생 연극경연대회’ 무대다. 연극을 하려고 국문과에 진학한 대학 시절엔 연극 11편을 했다.


“배우 화술의 기초는 발성, 발음, 끊어읽기다. 기본적인 훈련이 돼 있어야 하는데 인물 좋고 힘 좋다고 연기하려 하면 안된다.” 그는 “대사를 틀리게 하고 감정 표현도 잘못하는 배우가 많아 연극이 자기들끼리 노는 재미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청중도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긴 대사를 한 호흡에 하는 것처럼 쫙 해야 듣는 사람도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연극 무대에 올라 있으면 저 어두컴컴한 객석에서 나와 감정을 나누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부심이 든다.”


‘레미제라블’을 끝내면 당분간은 무대 계획이 없다. 하지만 무대 욕심은 그대로다. “얼마 전에도 국립극단 단장 이성열한테 전화를 해서 ‘왜 나 안 써’ 하면서 ‘큰 역할은 줘도 못하니까 단역 하나 줘’ 했다. 이 단장이 ‘에이’ 하던데 그게 무슨 뜻인지 만나서 물어볼 참이야. 역할 줄 건지 안 줄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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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거리에 가설 무대를 만들어놓고 사람들이 연극을 많이 했어. 그때 무대 아래에서 턱 고이고 사람들 하는 거 보면 너무 재미있는 거야. 연극을 해야겠구나 마음 먹었지. 공부는 흥미가 없고 오로지 연극이었어. 지금도 무대에 오르면 그 기분이야.” “연극배우는 청중이 300명이든 500명이든 똑같이 듣도록 발성해야한다”는 노배우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쩌렁쩌렁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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