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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 출신 농부의 아들이 '獨 궁정가수' 올랐다…'흙수저 열창'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원조 K클래식 스타’ 연광철

중앙일보

12월 9일 고양 아람누리에서 올해 마지막 공연인 리사이틀을 여는 베이스 연광철. 정준희 기자

이번주 참가자 모집이 마감된 JTBC 음악예능 ‘팬텀싱어’ 시즌4에 글로벌 지원자가 폭주했다고 한다. 청운의 꿈을 품고 유학을 떠났거나, 이미 유수의 오페라극장에 진출한 ‘월드클래스’들까지 국내 크로스오버 시장으로 유턴을 노리는 현상이 흥미로운데, 그만큼 세계 오페라 시장에서 승부하기가 녹록치 않다는 방증이다.


클래식 본고장인 독일에서 ‘캄머쟁어(궁정가수)’ 반열에 오른 ‘세계 최고의 베이스’ 연광철이 새삼 궁금해지는 이유다.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10년간 전속가수로 활동했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100회 이상 공연했을 정도로 바그너 팬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그는 ‘원조 K클래식 스타’다. 올해도 파리 오페라,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등 최고의 오페라 무대를 섭렵하고 연말 마지막 무대로 고양 아람누리에서 독창회를 준비중이다.

“자기 이름 알리려고 음악하면 안 돼”

연광철의 성공은 어떤 상식적인 인과관계와도 무관한 독보적 케이스다. 충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공업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건축설계기능사 자격증 시험에 떨어져 소를 판 돈으로 청주대 음악교육학과에 들어간 것은 유명한 스토리다. K클래식 성공 방정식이 아니라 자연이 길러낸 성악가랄까. “시골에서 산 3개를 넘어가야 국민학교가 있었죠. 하교 때 지나던 마지막 고개에는 산소도 아닌데 구멍이 뚫려있고 사기그릇이 굴러다니는 고려장 흔적이 있었어요. 낮에 출발해도 그곳을 지날 땐 깜깜해지니 무서움을 떨치려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다녔는데, 그러다보니 목청이 트인 걸지도 모르죠.”


전기도 안 들어오는 깊은 산골에 살았으니, 아는 노래도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 높은 산에 나무하러 가야 라디오 주파수가 잡히고 간혹 클래식 음악이 들렸다. 하지만 부를 수 있는 건 오로지 학교에서 배운 건전가요들이었다. “그 시절 학교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작사작곡한 ‘새마을노래’와 ‘나의 조국’만 열심히 가르쳤거든요. 몇 년 동안 고려장을 지나다니며 그 두 곡을 수천번 불렀을 거예요. 그러다 중학교 때 처음 슈베르트의 ‘마왕’ 같은 가곡을 알게 되고, 제 목소리가 어울린다는 걸 깨달았죠. 독일 관객 앞에서 처음 ‘마왕’을 불렀을 땐 옛날 생각도 나더군요.”


기능사 대신 교원 자격증이라도 따려고 성악 선생님 대신 피아노 선생님에게 노래를 배워 대학에 간 자칭 ‘촌놈’의 ‘고려장 셀프 트레이닝’은 메인 스트림에서도 통했다. 1987년 중앙·동아·음악협회 콩쿠르에서 모두 2등을 휩쓴 것이다. “서울 교수들이 지방대생에게 1등을 주겠어요. 가능성을 인정해 2등을 준거라 생각했고, 본고장에서는 어떨까 싶어 군 제대 후 곧바로 유학을 갔어요.”


1993년 도밍고 콩쿠르 우승 후 지휘 거장 다니엘 바렌보임의 신임을 얻어 베를린 슈타츠오퍼 전속 가수가 됐지만, 단박에 명성을 얻은 건 아니다. ‘토스카’의 단역부터 시작해 주역을 맡기까지 7~8년이 걸렸다. 하지만 스타를 꿈꾼 적 없으니 조바심 내지 않았고, 묵묵히 일하다보니 스타가 됐다. “성악가는 몸을 통해 음악이 이뤄지니 사람이 성숙해야 되거든요. 기악과 달리 반드시 텍스트와 언어로 전해야 하니 문화에 더 깊이 들어가야 하죠. 저도 제대로 대우받기까지 10년 이상 무대에서 먼지 마시고 뒹굴어야 했어요. 단순히 좋은 학교 나와 콩쿠르 입상한다고 가능한 게 아니죠.”


지금은 바그너 팬들의 열띤 지지를 받는 스타지만, “인종차별에 관해선 따로 기사를 써야 할 것”이란다. “10년 전쯤 ‘돈 조반니’를 할 때 안나 네트렙코의 아빠 역할을 맡았어요. 연출자가 ‘이렇게 예쁜 러시아 소프라노가 어떻게 한국인 아버지를 가질 수 있냐’ 더군요. 지휘자가 ‘한국 남자가 러시아 여자와 결혼해서 낳을 수도 있지’라고 응수해줬죠.(웃음) ‘요한수난곡’의 예수는 아직도 큰 공연장에선 못해 봤어요. 연출자들은 지금도 예수가 금발의 백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다니엘 바렌보임, 크리스티안 틸레만 같은 거장들이 제 역량을 높게 사 줘서 커리어가 성장할 수 있었어요. 그런 분들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큰 성취감을 줬습니다.”


그는 2010년 일찌감치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다. 학연으로 똘똘 뭉친 음대 교수직을 어렵사리 쟁취해 놓고 6년 만에 단호히 털고 나온 것도 상식 밖이다. “그땐 정착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죠. 가보고 싶은 곳에 다 가봤고, 해보고 싶은 노래도 다 해봤으니까요. 그런데 학교라는 게 쉽지 않더군요. 동료 교수들이 각종 문제에 휘말려 차례로 그만두게 되는 걸 목격하면서, 자리 때문에 내 노래가 망가지면 안되겠다 싶었어요. 직업이란 게 업을 잘해서 직을 얻은 건데, 직을 얻어서 업이 망하면 안되지 않나요. 미련없이 떠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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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사진 연광철]

연광철은 다정하고도 까칠한 사람이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따뜻한 벨칸토 발성으로 음악보다 인기에 취한 음악가들의 행보를 차갑게 비판하니 묘한 인지부조화가 발생했다. “명예롭기 위해 직업을 도구 삼을 수 없다”는 그의 신조는 ‘오직 음악’이었다. “음악인이란 좋은 음악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자기 이름을 알리는 게 먼저가 되면 안 된다”면서도 거듭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라고 고개를 젓는 모습엔 웃음이 터졌다.


“클래식의 대중화라는 명분으로 많은 작업이 이뤄지지만 조기축구 멤버와 국가대표를 섞을 순 없잖아요. 요즘 성악가들을 대중문화로 끌어들이는 작업들이 얕은 감성 자극에 그치고 있어 안타까워요. 커피믹스로 커피를 시작했다가 점점 좋은 원두로 옮겨가는 게 아니라, 커피믹스와 원두커피를 섞어 먹고 만달까요.”


지금 유럽시장은 뛰어난 재질을 가진 한국 젊은 성악가들에게 좋은 기회다. 무대는 많은데 유럽인 성악 전공자가 줄고 있어 외국인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단다. 실제로 유수 오페라극장 합창단에는 한국인이 15~20명에 이른다고. “유럽 젊은이들은 연습실에 틀어박혀 힘들게 갈고 닦아야 하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으려 해요. 그런데 실력있는 한국인이 많으니 절호의 타이밍이죠. 극장에서 두 명을 뽑는다면 한국인만 뽑힐 것을 우려해 오디션을 따로 볼 정도로 우리 성악가들이 유럽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미디어에선 아무도 관심을 안 가져 주더군요. 후배들이 너무 단기 목표를 정해놓고 금세 유명해지지 않는다고 실망하고 떠나지 않으면 좋겠어요.”


반면 한국에서 오페라 무대가 많아지길 바라는 건 비현실적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오페라를 보면서 자라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수요가 없다는 얘기다. “저녁에 긴 시간을 할애하는 오페라를 보러 가는 게 쉽지 않은 사회잖아요. 퇴근시간부터 빨라져야죠. 독일의 경우 모든 관공서가 오전 7시에 시작하니 오후 3시에 퇴근하는 사람들은 오페라를 볼 여유가 있죠. 교육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작은 것도 문제고요. 학교는 음악을 감상할 시간을 주고 가치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암기만 시키잖아요. 극장에서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를 많이 만들어서 음악으로 즐기고 성장할 계기를 마련해 줘야 조금씩 관객이 생길 겁니다.”

가곡 매력은 ‘시 자체’이자 ‘육성의 힘’

9일 리사이틀은 가곡 종합선물세트같은 무대다. 독일 예술가곡은 물론, 탄생 120주년을 맞은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우리 가곡도 있고, 반주를 맡은 피아니스트 피터 오브차로프의 세계 초연곡 2곡은 연광철을 뮤즈로 작곡된 노래들이다.


“올해 초 유럽 유명 지휘자에게 독창회 반주자로 그를 추천받았죠. 연세대 교수인데, 러시아인이지만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해서 대화도 잘 통하고 공감대가 넓더군요. 독일 시인 테오도르 폰테나의 시를 보여주면서 의견을 구하길래 같이 시를 고르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맞춤형으로 노래를 완성했어요. 재밌는 건 200년 전 살았던 사람의 시가 마치 엊그제 쓴 시처럼 와닿는다는 거죠. 베를린 외곽에 살면서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소외감을 표현한 시들인데, 하루이틀만 SNS에 접속 안해도 뒤처진 느낌을 받는 요즘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에요.”


한국가곡 100주년 전후로 가곡 부흥 운동이 일고 있지만, 그는 한국 가곡이 발전하려면 시를 대하는 마음이 먼저라고 했다. 작곡에 있어 선율이 우선되다 보니 다양성이 부족하고 시어의 감동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선곡한 이건우의 ‘산’, 김순남의 ‘진달래꽃’은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던 곡들이란다.


“작곡자가 음성학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선율부터 만들면 아무 의미없는 음절을 강조하게 되곤 해요. 정작 감동은 시에서 오거든요. 예를 들어 애국가도 ‘동해물과’로 시작하는데 ‘동’을 낮게 시작하니 ‘동해’가 아니라 ‘해물’을 강조하게 되잖아요. 그런 걸 보완하려면 가수가 보통 잘하지 않으면 안 되죠. 강조할 음절에 제대로 액센트를 찍은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잘 작곡된 사례죠. 히트한 이유가 다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발라드 가요와 다른 가곡의 매력은 뭘까. 바로 ‘시 자체’이자 ‘육성의 힘’이란다. “음악적 과장이나 기계의 힘을 떠나 시를 인간의 육성으로 표현한 곡들을 성악가들이 불러야 해요. 급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런 걸 지긋이 감상할 여유가 없으니 기계 사운드와 하모니로 빠르게 감동을 추구하는 게 대중가요죠. 순수하게 육성의 아름다움으로 시를 노래하는 가곡과 마이크로 노래하는 가요를 비교하긴 적당치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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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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