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각 살리는 고추냉이의 알싸함…청정지역에서 무럭무럭
고추냉이. 게티이미지뱅크 |
내가 중학생 시절 집 앞에 판메밀국수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따뜻한 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 학원 다녀오는 길에 그 달콤하고 시원한 맛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는지 혼자 가게로 들어갔다. “국수 하나요!” 혼자 뻘쭘하게 앉아 조용한 목소리로 주문하고 예쁘게 세팅된 국수를 받았다. 작은 그릇에 담긴 시원한 장국에 갈아놓은 무, 다진 파, 그리고 초록색 덩어리를 담갔다. 덩어리는 이내 장국 속에 가라앉아서 보이지 않았다. 뭐….먹으면서 저절로 풀리겠지? 편안하게 생각하고 국수를 들이켰던 나는 그날 매운 눈물을 왈칵 쏟으며 기침과 함께 국수를 다시 쏟아내 버렸다. 내 인생 최악의 메밀국수. ‘와사비’라고 불리던 초록색 덩어리의 공격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내가 삼키고 힘들어하던 초록색 덩어리의 정체는 고추냉이가 아닌 호스래디시(겨자무, 서양고추냉이)다. 겨자처럼 톡 쏘는 맛이 있는 근경 부위를 갈아먹는 식물인 점은 비슷하지만 맛과 향에서 월등한 차이를 보인다. 호스래디시는 초록색 색소가 더해져 고추냉이처럼 판매되기도 한다. 진짜 고추냉이는 즉석에서 갈아 섭취했을 때 화려하고 상쾌한 맛의 진가를 발휘한다. 생산량도 그다지 넉넉지 않기 때문에 대량으로 가공해 유통하기가 어렵다.
고추냉이는 생육 환경이 까다로워서 재배가 쉽지 않다. 찬물이 1년 내내 흘러야 하고 병충해에 약해서 특별히 청정지역에서만 관리돼야 한다. 일본산 고추냉이를 최고로 쳐주고 후지산이 있는 시즈오카현의 고추냉이가 특별히 다채로운 감칠맛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고 품질의 고추냉이는 강원도 철원군에서 생산된다. 100g에 5만원 정도 하는 일본 수입산에 비해 비교적 저렴하고 더 신선하다.
고추의 캡사이신, 후추의 피페린, 그리고 겨자나 무, 고추냉이의 시니그린 성분 등이 매운맛을 낸다. 매운 무나 겨자 등을 먹고 코 끝이 찡한 것도 모두 시니그린과 휘발성 물질 때문이다. 이 매운맛은 기름 성분과 섞이거나 공기 중에 노출되면 사라진다. 고추냉이와 마요네즈 조합이 추천되는 이유다.
고추냉이의 화려한 매운맛은 특히 회를 먹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간장과 함께 고추냉이, 회 한점의 삼합은 최고의 조합이다. 단, 잘 키운 고추냉이를 바로 강판에 갈아 사용할 경우 간장에 풀어먹지 말고 회나 고기에 고명처럼 얹어 먹는 게 좋다. 맛이 희석되지 않고 재료와 어우러진다. 특히 기름기가 많은 삼겹살이나 참치뱃살 등과 함께 먹으면 감칠맛을 올려준다. 고추냉이 마요네즈는 구운 닭고기나 쇠고기 패티와 함께 샌드위치 소스로 딱이다. 촉촉하면서 매콤한 강렬함! 고기 기름의 느끼함을 잡고 상쾌한 뒷맛을 선사하는 감초 같은 역할의 소스로 활용 가능하다.
약간의 설탕과 섞은 고추냉이 파우더는 소금과 함께 새로운 맛을 내는 조미료로도 쓰인다. 튀긴 누룽지나 과자 표면에 입혀 독특한 맛의 포인트를 준다. 가장 유명한 게 고추냉이를 입힌 완두콩 과자다. 요즘에는 고추냉이를 디저트에 사용하는 경우도 많은데 고추냉이와 꿀이 들어간 아이스크림, 고추냉이 크림빵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시판되고 있다.
봄철에 구할 수 있는 고추냉이 이파리는 톡 쏘는 매콤함이 있어 쌈으로 싸먹거나 피클 혹은 김치를 담근다. 철원에서 나는 고추냉이의 이파리는 특히 연하고 감칠맛이 돈다. 고춧가루·마늘·간장으로 겉절이처럼 양념해서 참기름에 버무리면 반찬으로도 그만이다. 최근 중국에서 대량 재배에 성공하면서 생고추냉이 및 가공식품 가격이 많이 떨어졌다. 그래도 키우는 환경에 따라 맛은 천차만별이다. 제철인 지금 국산 고추냉이를 맛보자.
고추냉이는 맛을 더하는 용도 이외에도 쓰임새가 있다. 강력한 항균작용을 하는 덕에 고추냉이를 발라놓은 식빵은 곰팡이가 피지 못한다. 항균작용은 탈취기능으로 이어져 쓰고 남은 고추냉이 자투리를 냉장고 구석에 던져놓으면 냉장고 냄새가 싹 사라진다. 고추냉이는 죽어서도 탈취 효능을 남긴다.
요리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