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고친 한옥에서의 사계절과 여유
서천 임안재 箖安齋
오랫동안 귀촌을 준비한 끝에 만난 대나무 숲 속 한옥.
그곳에서 부부는 집을 고쳐 새로운 일상을 준비한다.
집 주변을 두르는 대나무 숲은 생동감 넘치는 배경이 되어준다. |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의 구절은 누구에게나 깊은 울림을 준다. 더욱이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귀촌을 결심한 이에겐 더욱 각별하게 들리리라. 충남 서천의 한 농촌 한옥으로 귀촌한 전형진, 이향선 씨 부부의 집 거실 한쪽에도 이 시 구절이 붙어 있다.
“계기라 하면 특별한 무언가보다는 오래전부터 가졌던 여유롭고 조용한 농촌 생활을 동경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지친 마음이 들어 ‘이 번잡한 도시를 떠나자’고 결심하게 되었지요.”
두 사람의 일생이 가야 하는 귀촌. 비교적 지역 이동이 자유로운 사진작가, 프리랜서로 일하는 부부여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4년여간 귀촌 정보를 모으면서 지역은 우선 서천으로 정했다. 연고가 아주 없는 곳 보다는 아내 향선 씨의 고향이 가까워 심리적으로 덜 부담스러웠고, 전북 군산시 시내까지 차로 30분 이내여서 도시 인프라를 누리기도 좋았다. 지역을 정한 후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귀촌학교에 입소해 농촌을 배우고, 귀촌학교 선후배간 네트워크를 만들어 교류하며, 살아갈 마을과 집을 물색하는데 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바다가 가깝고 조용한 한 마을에서 이장님을 통해 오래된 한옥을 소개받았다. 백여 년을 견뎌냈다는 고즈넉한 여유로움에 부부는 운명처럼 새 보금자리로 낙점했다.
Before
오래 비워져 있었지만 비교적 온전했던 구옥 본채. 마을 네트워크에서 찾아 구매할 수 있었다. |
PLAN
a) 마루와 넓은 창이 확장감을 주는 거실. 식당 출입구 옆은 이전 아궁이 자리로 인해 생긴 공간을 수납장으로 구성했다. |
b) 구옥에서 주방이었던 곳은 그대로 주방 겸 식당이 되었다. 전면으로 난 큰 창은 카페 분위기를 내고 아궁이 자리는 수납장으로 활용된다. |
집을 고쳐나가는 일은 평소 단골 카페에서 교류하며 친분과 의견을 나눠온 디디건축사무소의 이정섭 소장과 의기투합했다. 이 소장은 한옥을 점검하고 선택할 것과 집중할 것을 분류했다. 한옥을 구성하는 네 채 중 구조가 튼튼하게 남아있는 본채를 살리는 데 집중했고, 부속동 두 채는 철거 후 여건이 되면 증축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
c) 안방은 나뭇가지가 자라듯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서까래와 프라이버시를 위해 한식 창살을 짜넣은 창이 함께 정취를 불어넣는다. |
HOUSE PLAN
대지위치 ▶ 충청남도 서천군
대지면적 ▶ 1001.00㎡(303.33평)|건축규모 ▶ 지상 1층(정면 6칸, 측면 3칸)
건축면적 ▶ 150.25㎡(45.53평)|연면적 ▶ 147.70㎡(44.75평)
건폐율 ▶ 15.01%|용적률 ▶ 14.76%
주차대수 ▶ 1대|최고높이 ▶ 4.88m
구조 ▶ 한식목구조(기존) + 경량목구조(보강 벽체)|단열재 그라스울 24K 가등급
외부마감재 ▶ 벽 - 시멘트보드 위 페인트 마감 / 지붕 - 속기와(기존) 위 방수 페인트
내부마감재 ▶ 벽 - 9.5T 일반 석고보드 2겹 위 친환경 페인트 / 바닥 - 구정마루 강마루 허니티크
창호재 ▶ LG하우시스 PVC 시스템창호(트라이캐슬 3중 로이유리)|에너지원 ▶ 기름 겸용 보일러
욕실 및 주방타일 ▶ 대동타일(포세린 타일, 모자이크 타일)
수전 및 욕실기기 ▶ 아메리칸스탠다드, 금산도기(수입)
주방가구 및 붙박이장 ▶ 현장제작(18T 자작나무 위 오일스테인 2회)
조명 ▶ 을지로 국제조명(LED 펜던트 등, T5)
현관문 ▶ 제작(갈바 위 불소수지도장)|방문 영림도어 ABS도어
조경 및 시공 ▶ 건축주 직영공사
설계 ▶ DD건축사무소 070-4799-1009 www.archi-dd.com
d) 세면대와 욕실이 마주보는 이 공간 가운데에 자리한 창은 액자에 넣은 풍경화처럼 늘 푸른 대나무 숲을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 중 하나다. |
e) 벽에는 책장을 만들어 서재처럼 거실을 쓴다. 언제든 옆 창을 통해 마루에 드나들면서 자유롭게 책을 읽는다 |
큰 창과 테이블, 펜던트 조명을 활용해 카페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 공간을 현대 생활 양식에 맞추기 위해 대청마루가 실내 바닥으로 재구성돼 공간이 배치됐다. |
COST INFO
마루 디딤돌은 오랜 세월 지역을 지켜온 장항제련소에서 채취한 돌로 만들어 정취를 자아낸다. |
PROCESS
일상을 누리기 위해 고쳐야 할 부분이 많았던 집.예산이라는 한계와 보존이라는 희망 사이에서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다.
1. 배관 / 실 배치에 맞춰 모든 배관을 새로 시공하면서 공간별로 다른 레벨을 맞췄다.
2. 철거 / 단열과 기밀에 취약했던 기존 흙벽을 철거했다.
3. 조적 / 공간 배치에 맞춰 벽체를 새로 조적하며 후면 증축부를 보강했다.
4. 설비 / 실내 바닥에 난방 XL관을 배관했다.
5. 콘크리트 / 레벨에 맞춰 바닥 방통 공사를 했다.
6. 목공사 / 철거한 벽체를 대신해 경량목구조에 단열을 보강한 벽체를 세웠다.
7. 방수 / 지붕 방수페인트 처리와 함께 벽체에 투습방수지를 시공했다.
8. 가구 / 실내 바닥재(마루) 공사와 책장, 창살 등 소목 과정을 진행했다.
9. 타일·가구 / 주방 가구를 직접 제작하면서 벽체 및 바닥에 타일을 마감했다.
TIP | 건축주 부부가 제안하는 귀촌 학교 팁
대문이 있는 사랑채는 현재 먼저 외부를 손보고, 내부는 천천히 여유가 생기는 대로 고쳐나가기로 했다. |
“귀농과 귀촌은 구분해서 준비하세요”
흔히 귀농·귀촌이라는 표현으로 묶지만, 사실 이 둘은 겹치기도 하면서 어느 정도 다른 개념이다. 귀농은 농촌 이주와 함께 직업 농업인이 되겠다는 의미고, 귀촌은 주거지만 농촌으로 이동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 그래서 준비도 다를수 밖에 없다. 상당수 귀촌학교는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것(건축주 부부는 서천군 귀촌학교 수료)으로, 기본적인 농촌 사회 분위기나 대처 요령, 처세를 세밀하게 가르쳐주지만, 농업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다면 무조건 농촌으로 가기보다 오히려 수도권 농업기술센터나 서울, 인천, 경기도에 위치한 농업학교(세부 명칭은 다름)가 더 나을 수 있다.
한옥 외관을 유지하면서 가장 크게 손을 본 부분은 바닥과 벽체. 한옥의 특징인 공간별 바닥 레벨 차이를 균형 있게 맞추고, 대청마루가 실내로 바뀌면서 난방 공사가 뒤따랐다. 벽체는 단열재를 강화한 경량목구조로 새로 세웠다. 실내는 주방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거실과 작업실이 자리했고, 안쪽 깊숙한 곳에 두 방과 욕실이 배치됐다. 전반적으로 벽과 기둥, 천장 서까래가 화이트와 우드컬러의 전통적인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뒷마당과 연결된 창은 그 너머 대나무 숲을 액자처럼 비추며 미니멀한 포인트로 기능한다.
곧 태어날 예정인 아이와 함께 집에서 만들어나갈 앞으로가 더욱 설렌다는 부부. 그런 부부에게 건축가는 대나무숲이 병풍처럼 지켜주는 이곳에서 가족이 편안한 삶을 누리길 바라며 ‘임안재’라는 집 이름을 선물했다. 두 사람의 일생이 옮겨오고, 또 한 사람의 일생이 새로 시작될 임안재. 그 이름처럼 포근한 농촌 라이프를 이어가길 바라본다.
취재_ 신기영 | 사진_ 변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