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고 억울한가요? '외상후울분장애'의 경고
최근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한국인 절반이 ‘장기적 울분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울분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일상적 감정이지만, 오랜 시간 지속되면 심각한 문제로 발전할 수 있다.
분노와 답답함, 무기력감으로 고통받고 있는 당신에게 켜진 경고 신호, 서울맑은정신건강의학과 김윤석 원장과 함께 살펴봤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일렁이는 분노, 가슴속이 꽉 막힌 듯한 억울함과 복수심까지. 끊임없는 경쟁과 불공정한 대우, 힘의 전횡 등 신념에 어긋나는 상황을 겪어본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감정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복잡한 감정을 우리는 ‘울분’이라 부른다.
울분이 정신의학계의 관심사로 떠오른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2003년 독일 정신병리학자 미하엘 린덴 교수가 외상후울분장애(PTED)라는 진단 범주를 제시했고, 한국에서는 2018년부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팀이 한국 사회의 울분 실태를 분석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울분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한 곳은 독일이지만, 만성적으로 울분을 느끼는 사람은 독일보다 한국에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8월 유명순 교수팀이 발표한 <한국인의 울분과 사회·심리적 웰빙 관리 방안을 위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9.2%가 ‘장기 울분 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장기 울분 상태란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울분을 오랜 기간 겪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번 조사 결과는 5년 전 독일에서 진행한 설문 결과보다 수치가 약 3배 높았다.
부당함을 느끼는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심각한 수준의 울분을 겪는 비율은 30대에서 13.9%로 가장 높았다. ‘사회는 공정하다’고 느끼는 ‘공정 세계 신념’의 파괴, 주변의 몰인정·몰이해 경험, 낮은 계층 인식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 중에서도 20·30대의 공정 세계 신념 점수(3.13점)가 60대 이상(3.42점)보다 낮았다. 이와 함께 울분이 정신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울분을 느낄수록 우울 점수와 자살 사고 비율도 높아지는 양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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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층적 감정, 울분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의 울분 상태가 지속될 경우 반응장애의 일종인 외상후울분장애를 의심해 볼 수 있다. 외상후울분장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신의학 측면에서 울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정신의학에서는 울분을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당한 대우 등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반응은 주로 삶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흔들렸을 때 발생한다. 분노 혹은 격분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충동적인 감정에 가깝다면, 울분은 화와 복수심이 모욕감, 허탈감, 무력감, 실망감과 결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울분은 분노나 격분보다 좀 더 다층적인 감정이다.
외상후울분장애는 부정적 사건을 통해 신념이나 가치관이 손상된 이들이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와 무기력감, 울분을 느끼는 질환이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구 동독인들의 심리 상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처음 제안됐다. 당시 구 동독인들은 통일 후 환경 변화와 서독과의 경제·문화적 격차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는데, 이 과정에서 분노와 좌절감을 호소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 (PTSD) 등 기존 진단 범주로는 이들의 증상을 모두 설명할 수 없어 ‘외상후울분장애’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미하엘 린덴 교수에 의하면 외상후울분장애는 스트레스 요인에 대한 감정 및 행동 반응인 적응장애의 세부 개념이다. 아직 정신질환 분류 체계에 진단명으로 정식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국내에선 2012년에 진단 척도를 표준화하는 등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외상후울분장애의 다양한 얼굴
울분을 느끼는 이들이 모두 외상후울분장애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사건과 관련한 단서에 울분 감정이 반복되어 나타나거나 과각성 상태가 3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 외상후울분장애를 의심해 볼 수 있다. 이때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며 그 사건에 대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기 비하를 하거나 통증과 불면을 겪기도 하며, 복수를 떠올릴 때는 웃음을 짓는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국립부곡병원 조수현 전문의 등이 저술한 논문에는 외상후울분장애의 사례로 공장에서 근무하던 한 남성의 이야기가 제시되어 있다. 해당 남성은 작업장에서 다친 후 부상에 대한 기억과 고용주의 무책임한 태도로 인해 고통받았으며, 근로자재해보상보험 연장 신청이 거부되면서 사회 전체에 대한 깊은 원망과 고용주 및 보험회사 직원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집중력 저하, 수면장애, 식욕 저하를 겪었다고 털어놨다.
그렇다면 실제 진료실에서는 어떨까. 서울맑은정신건강의학과 김윤석 원장은 울분 증상만으로 병원을 찾는 경우보다 우울이나 불안 등의 이유로 상담을 받던 중 울분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환자들은 주로 ‘억울하다’,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표현을 통해 무기력감과 허탈감, 분노를 표출하는데, 이는 선후 관계가 분명하지 않지만 외상후울분장애가 우울이나 불안장애를 동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외상후울분장애는 아직 공식 진단명으로 등재되지 않았고, 인지 왜곡을 동반한 우울증일 가능성도 있어 이런 환자는 대개 우울장애나 불안장애로 진단된다. 김윤석 원장은 외상후울분장애가 정식 진단명은 아니지만 울분이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울분에 초점을 맞추면 전형적인 우울증은 아니나 우울감과 억울함, 허탈감 등을 호소하는 환자의 복합적인 감정을 세분화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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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후울분장애, 기존 질환과 달라
김윤석 원장은 외상후울분장애가 화병이나 분노조절장애라고 알려진 간헐적 폭발장애와도 다른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우울이나 분노를 억눌러 생기는 화병은 우울증의 일종으로, 가슴이 답답하거나 명치에 뭔가 걸린 듯 숨이 막힐 것 같은 신체 증상이 두드러진다. 간헐적 폭발장애는 분노를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외부 요인으로 증상이 발현된다는 점에서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비슷하나, 둘은 엄연히 다르다. 불안 증상이 핵심인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사건 이후 나타나고, 불공정하다는 감정이 두드러지는 외상후울분장애는 해고 등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사건이 단초가 된다.
꼬인 감정의 타래, 상담으로 풀어야
이런 증상을 방치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믿음이 손상을 입어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사회와의 단절과 고립, 자기 비하, 무력감과 억울함 등으로 인한 우울 및 불안장애, 자살 시도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해 주의가 필요하다. 환자 스스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병원을 다녀봤자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해 내원을 꺼리는 경우도 많지만, 부정적인 경험에 대응하는 방식을 교정하고 사고의 융통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적절한 치료가 필수다.
외상후울분장애의 경우 치료 과정에서 심리상담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실제로 김윤석 원장은 병원을 찾는 환자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고통을 인지하고, 문제를 장기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두고 환자에게 접근한다. 그는 울분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게 과각성과 반복되는 침투적 생각, 우울, 불안 등을 다루는 항우울제를 처방할 수는 있지만, 약물 치료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심리상담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기 파괴적 관점의 변화가 중요
이와 관련해 주목받는 치료 방식은 인지치료 중 하나인 ‘지혜 치료’다. ‘지혜’란 풀 수 없거나 풀기 힘든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상담자는 환자의 자기 파괴적인 문제 접근 방식을 해결하기 위해 지혜로운 대응 방식을 중심으로 상담을 이어간다. 충분한 상담을 통해 환자 스스로 관점을 변화시키고 불확실성을 수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핵심이다.
가족의 역할도 중요하다. 왜곡된 인지나 억울한 감정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진단과 치료는 정신과 전문의나 심리 상담사에게 맡기고, 꾸준히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증상이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질환과 당사자를 분리해 보는 노력도 필요하다.
일상생활에서는 억눌려 있는 감정을 조금씩 풀어내는 시도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김윤석 원장은 억울한 상황을 글로 적어 객관화하거나, 문학 작품과 영화 등을 통해 감정을 수용하고 처리하는 다양한 관점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울분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이 든다면 타인에 대한 복수심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거나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 행동보다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를 지르거나, 격렬한 유산소운동으로 감정을 풀어내는 시도를 하는 것도 좋다.
사회적 불평등과 경쟁으로 인한 ‘울분 사회’가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새로운 용어가 됐다. 억울함과 분노, 무기력감이 만연한 사회에선 결코 건강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개인과 사회의 안녕을 위해 울분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이를 예방하고 치유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외상후울분장애 자가진단표
➀ 특정 일로 감정에 상처를 받고 상당한 정도의 울분을 느꼈다.
➁ 특정 일이 정신 건강에 눈에 띄게 부정적인 변화를 지속적으로 일으켰다.
➂ 특정 일이 내가 보기에 아주 정의에 어긋나고 불공정하다.
➃ 특정 일이 반복적으로 떠오른다.
➄ 특정 일을 떠올릴 때마다 매우 화가 난다.
➅ 특정 일이 나로 하여금 복수심을 품도록 자극한다.
➆ 특정 일에 대해 나 자신을 탓하고 화가 난다.
➇ 특정 일에 대해 어떤 노력을 해도 소용없다는 감정을 느낀다.
➈ 특정 일이 나를 우울하고 불행하게 한다.
➉ 특정 일이 전반적인 신체 건강을 해쳤다.
⑪ 그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으려고 특정 장소나 사람을 회피한다.
⑫ 특정 일 때문에 스스로를 무력하고 힘이 없다고 느낀다.
⑬ 책임을 물을 사람에게 특정 일과 비슷한 상황이 생기는 것을 상상하면 만족스럽다.
⑭ 특정 일이 힘과 의욕을 크게 감소시켰다.
⑮ 특정 일이 이전보다 더 쉽게 짜증을 내게 만든다.
⑯ 특정 일이 나로 하여금 정상적인 기분을 느끼기 힘들게 만든다.
⑰ 특정 일이 내가 이전처럼 직업, 가정 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든다.
⑱ 특정 일로 친구들과 사회 활동에서 멀어졌다.
⑲ 특정 일이 자주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 지난 1년간 위 항목에 해당하는지 체크
* 전혀 아니다(0), 거의 그렇지 않다(1), 약간 그렇다(2), 많이 그렇다(3), 매우 그렇다(4)
* 각 항목의 점수 총합을 19로 나눠 산출
* 1.6점 미만: 이상 없음, 1.6점 이상: 경중등증, 2.5점 이상: 심각한 울분장애
김윤석 원장은…
전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임의.
불안장애 및 인지행동치료 심층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서울맑은정신건강의학과 대표원장으로 환자들의 마음 건강을 돌본다.
일러스트레이터 장인범
레퍼런스 고한석, 한창수, 채정호 “외상후울분장애의 이해” 대한불안의학회지 10.1 pp.3-10 (2014) : 3.
조수현, 이중선, 김성윤, 원승희, 임종석, 하규섭 “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 and Hwa-byung in the General Korean Population” PSYCHIATRY INVESTIGATION 14.4 pp.392-399 (2017) :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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