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슈프림 논란 승자는?
삼성, ‘가짜 슈프림’과 협업으로 국제적 망신… 어떻게 이런 일이?
뉴욕 출신 ‘진짜 슈프림’ VS 이탈리아 출신 ‘합법적 가짜 슈프림’
’가짜’ 슈프림과 협업을 발표한 삼성전자 중국법인./삼성전자 웨이보 |
지난 10일(현지시간) 삼성전자 중국법인이 갤럭시A8s 발표장에서 스트리트 브랜드 슈프림과의 협업을 발표했다. 내년에 슈프림과 협업 패션쇼를 열고, 중국에 직영점을 열겠다는 것. 슈프림의 최고경영자(CEO) 2명도 무대에 나와 분위기를 띄웠다. 삼성전자 중국법인의 디지털 마케팅을 총괄하는 펑엔은 "요즘 젊은이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스타일을 뽐내고 싶어하는 그들에게는 이제 ‘S’로 시작하는 두 개의 브랜드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곧 이 슈프림은 미국이 아닌 이탈리아에 본사를 둔 ‘짝퉁’ 브랜드로 밝혀졌다. 무대에 올랐던 중국인 최고경영자들도 가짜였다. 비난이 쇄도하자 삼성은 협업을 번복했지만, 국제적인 망신과 조롱을 피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진짜 위협하는 ‘합법적 가짜’
슈프림 로고 광고가 1면에 들어간 8월 13일자 뉴욕포스트, 이날 아침 뉴욕 신문 가판대는 이 신문을 구하려는 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뉴욕포스트 |
슈프림은 1994년 미국 뉴욕에서 창업한 스트리트로 브랜드로, 기업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 빨간 상자 안에 흰 글씨가 들어간 로고로 유명한데, 쓰레기도 이 로고만 붙이면 팔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2016년에는 슈프림 로고가 새겨진 벽돌이 30달러에 출시돼 매진됐으며, 지난 8월엔 슈프림 로고 광고가 들어간 뉴욕포스트가 조기 완판됐다. 최근엔 영국 온라인 쇼핑 검색 플랫폼 리스트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로고’에 구찌, 프라다 등 명품을 누르고 1위로 뽑혔다.
이렇게 유명한데, 삼성은 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했을까? 삼성과 협업한 가짜 슈프림은 인터내셔널브랜드펌(IBF)이라는 영국 회사가 2010년 이탈리아에서 상표 등록한 브랜드다. 즉 ‘합법적 가짜(Legal Fake)’다.
이 회사는 세계 70여 개국에 슈프림 로고의 상표를 등록하고, 진짜 슈프림과 유사한 빨간색 로고를 붙인 제품을 판매한다. 한때 뉴욕 슈프림이 상표권 침해로 고소해 판매 금지 명령을 받았지만, 이후 슈프림(Supreme)이라는 단어가 기술적 의미를 지닌 보통명사라는 이유로 유럽연합 특허청이 무효 판결을 내리면서 이탈리아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같은 이유로 스페인에서는 슈프림 스페인이라는 상호를 가진 유사 업체가 슈프림의 위조 상품을 판매한다.
이들과 협업한 삼성이 논란 초기 당당한 자세를 취했던 이유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중국법인 디지털 마케팅 매니저는 "우리는 슈프림 뉴욕이 아닌, 이탈리아와 협업하고 있다. 슈프림 뉴욕은 중국에서 판매와 마케팅에 대한 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슈프림 이탈리아는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판권과 마케팅 권한을 가지고 있다"며 협업의 정당성을 강조한 바 있다.
빨간 상자면 무조건 OK? 진짜와 가짜 승자는
’합법적 가짜’인 보이런던 이탈리아 상표(왼쪽)와 진짜 보이런던. 로고체와 수리의 머리 방향이 다르다./nss매거진 |
패션계엔 느슨한 법망을 이용한 합법적 가짜들이 존재한다. 1976년 영국 런던에서 설립된 패션 브랜드 보이런던(BOY LONDON)은 보이런던 이탈리아라는 국적 불명의 합법적 가짜에 시달렸다. 펑크 문화에 기반을 둔 이 브랜드는 독수리 로고로 유명한데, 원래 오른쪽을 바라보던 독수리는 가짜 로고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스꽝스럽지만 불법은 아니다. 에드윈, 에비수, 본더치 등도 합법적 가짜 브랜드와 전쟁을 벌였다. 진짜가 고급스러운 고가 브랜드 콘셉트라면, 가짜는 마트에서 판매되는 대중 브랜드로 탈바꿈하는 식이다.
가짜 슈프림도 대중 브랜드를 꿈꿨다. 이 브랜드는 내년 상하이 패션위크 삼성과의 협업 패션쇼를 시작으로 베이징과 상하이에 7층짜리 플래그십 매장을 내는 등 내년까지 70곳 이상의 온·오프라인 매장을 개설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는 슈프림 뉴욕과는 대치되는 전략이다. 현재 진짜 슈프림을 살 수 있는 곳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전 세계 11개 매장에 불구하다. 슈프림이 지금의 명성을 얻은 것도 이 희소 전략이 주효했다.
가짜라는 비난에도 슈프림 이탈리아는 오히려 옷을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고 리셀(재판매)하는 스트리트 브랜드의 현상이 비윤리적이라고 지적한다. 또 모든 구매자에게 차별 없이 고품질의 옷을 제공하는 것이 자신들의 목표라는 그럴싸한 논리도 세웠다.
어떤 이들은 가짜인 걸 알면서도 힙해(멋있어) 보여서 짝퉁을 찾는다. 온라인 마케팅 리서치 회사 셈러시에 따르면, 미국에서 패션 관련 복제품 및 가짜 제품에 대한 검색은 증가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7월부터 10월 사이 검색량이 500% 이상 급증했는데, 이 시기 루이비통과의 협업으로 주가가 높아진 슈프림의 검색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추세에 맞춰 진짜가 가짜를 흉내내 ‘공식적인 짝퉁(Official Fake)’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이탈리아 명품 구찌는 ‘GUCCI’ 로고를 변형해 GUCCY, GUCCIFY 등 짝퉁에서나 볼 법한 패러디 로고를 선보였고, 디젤은 가짜 상표가 붙은 옷을 만든 뒤 짝퉁 골목으로 유명한 뉴욕 커낼가에 매장을 열고 정가의 절반도 안되는 가격에 팔았다. 한 패션 관계자는 "진짜와 가짜 논쟁은 스타일을 사느냐, 브랜드가 가진 스토리를 사느냐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빨간 상자 로고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은 과연 어느 편에 손을 들어줄까?
김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