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샤인머스캣으로 백김치를? 나는 콜라비로 깍두기 담근다
‘대한민국 김치 경연대회’
전국 고수들의 김치 백태
김치는 배추와 무로만 담근다고 여겼다면 여기, 고수들이 담근 김치를 맛봐야 한다. 지난달 29일 광주광역시 세계김치연구소에서 열린 ‘대한민국 김치 경연대회’는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김치가 있었나, 감탄하게 한 현장이었다. 오는 14일까지 열리는 광주세계김치축제의 일환으로 땅끝마을의 향토 요리 연구가부터 미국 요리 학교 출신 셰프까지 참가해 열띤 경연을 펼친 이번 대회엔, 샤인머스캣 포도로 담근 백김치부터 가지 김치, 황태 소박이 김치까지 눈 호강, 입 호강을 시켜준 김치들이 총출동했다. 코앞으로 다가온 김장철, 그 달큼하고도 알싸한 현장을 <아무튼, 주말>이 찾았다.
◇짜지 않은 경상도 김치 맛보세요
사람들이 예전보다 김치를 덜 먹는 이유 중 하나는 나트륨 함량이 높아 건강에 해롭진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쉽게 말해 ‘너무 짜다’는 것. 경상도는 전국에서도 김치가 짠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마산 아지매’ 김경희씨는 “요즘은 경상도 김치도 짜지 않다”고 자신했다.
김치를 짜지 않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소금 양을 줄이는 것. 하지만 이건 하수(下手)의 방식이다. 단순히 소금만 덜 넣으면 김치의 고유한 맛이 사라진다. 김경희씨는 다양한 젓갈을 혼합하고, 감칠맛 풍부한 재료를 여럿 넣고 끓인 육수로 짜지 않으면서도 경상도 김치 특유의 깊은 맛을 유지한다. “갈치속젓과 갈치액젓, 새우젓을 혼합해 사용하고, 멸치·다시마·무·표고버섯으로 끓인 육수와 양념을 잘 섞어 버무려 배추 소를 채우는 게 비법이지요.”
참가자들은 육수를 뽑는 다양한 비법도 공개했다. 전남 해남에서 출전한 김해주씨는 해남 바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갯장어를 육수로 활용했다. 김씨는 “갯장어를 고아 만든 육수 덕분에 다른 지역 김치에서 경험할 수 없는 묘미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대상(대통령상)을 받은 신명화씨는 “소 양지를 푹 삶은 육수에 무·대파·표고·다시마·콜라비 등 채소만을 모아 끓인 채수(菜水)를 별도로 만들어 시원한 맛을 보완한다”고 했다.
소금과 함께 건강의 또 다른 ‘하얀 적(敵)’으로 여겨지는 설탕을 넣지 않고 단맛을 내는 방법은 없을까. 전남 완도에서 향토음식연구소를 운영하는 심재경씨는 자신의 비법을 알려줬다. “무와 양파 말랭이를 황태·보리새우·표고에 더해 육수를 빼면 굉장히 달아요. 감초와 구기자까지 넣으면 아주 좋은 육수가 되지요. 저는 육수 끓일 때 전복 껍데기도 넣어요. 전복 껍데기는 한의학에서 ‘눈에 좋고 돌처럼 딱딱하다’고 해서 석결명(石決明)이라 부르는 약재입니다. 육수에 청주를 넣으면 잡내를 잡아주고요.”
경연장에선 젊은 남성 참가자들도 눈에 띄었다. 허용석(31)씨는 미국 CIA 요리 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분당에서 ‘루이스랩(Louis Lab)’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는 현직 셰프. 그는 “요리 학교 유학 시절 미국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젓갈이나 해산물의 비린내가 밴 김치를 꺼리는 걸 보고 토마토 거른 즙을 활용해 깔끔하면서도 감칠맛을 낸 김치를 개발했다”고 했다.
토마토는 감칠맛(우마미)을 내는 글루탐산 성분을 다량 함유한 과채류. 허 셰프는 토마토를 간 뒤 고운 체에 걸러 얻은 투명한 토마토 즙을 육수 대신 활용했다. 젓갈은 하나도 넣지 않았다. 이렇게 담근 배추김치는 사찰 김치를 연상케 하는 담백함과 함께 고기나 해산물로 만든 육수나 젓갈을 넣었을 때와는 다른 감칠맛이 인상적이었다.
◇샤인머스캣·콜라비도 김치로
이번 대회에선 창의성 기발한 김치들도 대거 등장했다. 가장 눈길을 끈 건 요즘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샤인머스캣 포도로 담근 백김치였다. 전북 군산이 고향인 황미선씨는 ‘샤인머스캣 포도 쌀누룩 요거트 백김치’를 가지고 대회에 나왔다. 샤인머스캣을 동그랗고 납작하게 썰어, 가늘게 썬 고추·석이버섯·무 등 다른 재료와 함께 소금에 절인 배추 소를 채웠다. 샤인머스캣이 들어간 백김치는 우아한 단맛과 은은한 산미가 고급스러웠다. 백김치라는 흰 바탕에 샤인머스캣의 연둣빛이 더해진 색감도 세련됐다.
황씨가 샤인머스캣으로 김치를 만들게 된 계기는 호주 시드니에서 셰프로 일하는 아들 때문이다. “아들이 ‘외국인 동료들도 좋아할 색다른 김치가 있으면 좋겠다’더라고요. 4년 전 샤인머스캣을 처음 먹어봤는데, 껍질 이물감이 없고 아삭한 식감도 좋아서 이걸로 김치 담그면 딱이겠다 싶었죠. 여기에 설탕 대신 쌀누룩으로 발효한 요거트를 넣었더니 아들의 동료 요리사들이 맛있다고 난리가 났답니다(웃음). 세계인 입맛을 사로잡을 백김치라고 자부합니다.”
주우하(32)씨는 대학에서 발효공학을 전공하고 모 식품 기업에서 근무하는 5년 차 김치 연구원. “총각이 담근 진짜 총각김치”라며 활짝 웃는 주씨의 김치는 아삭하면서도 씹으면 몰캉한 식감과 톡 쏘는 탄산감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껍질을 벗기지 않고 겉에 묻은 흙만 깨끗이 털어낸 뒤 담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명화씨는 콜라비로 김치를 만들었다. 콜라비는 양배추와 순무를 교배해 개발한 작물. 콜라비라는 이름도 독일어로 양배추를 뜻하는 콜(kohl)과 순무를 뜻하는 라비(rabi)를 합쳐 만들었다. 단단하고 당도가 높은 데다 쉬 무르지 않고 사계절 구할 수 있어서, 무가 맛이 덜한 여름에 깍두기 재료로 인기가 올라가는 중이다.
신씨는 기존 콜라비가 아닌 국내에서 김치용으로 새롭게 개발된 ‘대왕콜라비’를 활용했다. 기존 콜라비는 단단하다 못해 딱딱하다는 단점이 있는데, 이를 아삭한 식감으로 개선했다. 수분 함량도 훨씬 높아서 김치로 담갔을 때 청량감도 더 크다. 신씨는 이 대왕콜라비와 무말랭이를 섞어서 사용했다. 아삭아삭한 콜라비와 오독오독 쫄깃한 무말랭이의 대비되는 식감이 매력이다. 신씨는 “콜라비는 해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김치 세계화에 도움 될 것 같다”고 했다.
◇황태 소박이 김치, 가지 백김치
전북 남원이 고향인 정그림씨는 ‘황태 소박이 김치’를 개발했다. 보통 육수 낼 때 사용하는 황태를 직접 김치 재료로 활용한 점이 독특하다. 물에 불린 황태를 다른 소와 함께 소금에 절인 배춧잎으로 감쌌다. 정씨는 “다른 재료 없이 이 김치에 물만 부어서 그대로 끓이면 찌개가 된다”고 했다. 코로나 이후 각광받는 HMR(가정간편식)로 더할 나위 없을 듯하다.
허용석 셰프는 가지로 백김치를 담갔다. 가지는 데치거나 볶거나 튀기는 등 익혀 먹는다고만 여겨온 고정관념을 깨는 시도. 가지를 얇고 길게 썰고 30분~1시간 소금에 절였다가 물로 씻어낸 다음 배춧잎과 함께 백김치를 만들었다. 가지의 쫀득한 식감이 의외로 괜찮았다. 가지의 보라색과 배춧잎의 흰색 대비도 기존 김치에서 볼 수 없는 이색적 색감이다.
윤경미씨가 만든 ‘오미자 더덕 동치미’는 동치미를 잘 담가 드셨던 시할머니를 떠올리며 개발한 김치다. “시할머니가 혈관이 좋지 않으셨는데, 오미자와 더덕이 좋다길래 넣어봤어요.” 오미자에서 우러나온 고운 붉은빛과 더덕의 쌉싸름한 향이 고급스러워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끌었다.
할아버지가 한의사였던 한유미씨는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온 ‘골담초(骨擔草) 물김치’를 선보였다. 골담초는 콩과에 속하는 낙엽 관목으로 한방에서는 뼈와 관절에 좋은 약재로 쓰인다. “우리 집에서는 뼈와 관절이 약한 어르신들을 위해 골담초 뿌리와 꽃을 우려 물김치에 활용했어요. 구수하고 달큼해서 거부감을 주지 않는 맛이라 누구나 좋아할 만하겠다 싶어서 소개했습니다.”
오랜 경력의 3수·5수 참가자를 제치고 대상을 수상한 신명화씨는 김치를 본격적으로 한 지 2년에 불과한 데다 첫 출전이었다. 신씨는 “젓갈은 새우젓과 멸치젓만 넣었어요. 대신 인공 조미료(MSG) 등 첨가물이 없고 순전히 천일염만 쓴 젓갈을 사용했지요. 많은 재료를 사용하기보다 좋은 재료인지 따져야 맛있는 김치를 담글 수 있는 것 같아요.”
[광주광역시=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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