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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소 엉덩이살 썰어 내면 끝? 재료 보는 눈 없으면 못 만들죠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육회

서울 청담동에 가기 위해 성수대교를 건넜다. 짧은 점심 시간, 운전석에 앉은 직장 사수는 액셀을 깊게 밟았다. 연예인이 자주 온다는 청담동 ‘새벽집’ 앞은 검은색 대형 승용차가 점령하고 있었다. 육회 비빔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20대 막내 시절, 상 끝에 앉아 육회 비빔밥을 먹다 보면 굳이 이렇게까지 오는 이유가 뭔가 싶었다. 육회라는 게 신선한 고기를 썰면 그만 아니던가?


서른 넘어 직접 주방에서 요리하며 알게 된 말이 있다. ‘요리는 재료가 8할이고 기술은 2할.’ 요리는 재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좋은 재료는 재료를 보는 눈, 그 값을 치르는 결정, 매일 그 일을 반복하는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지 돈만 내면 살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 도화동 ‘독립한우 자인정육식당’의 육회.>육회./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보통 소 엉덩이 살코기 부분을 썰어낸 육회는 재료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음식이다. 서울에서 육회로 이름 날리는 곳을 찾자면 ‘새벽집’만큼 사람이 몰리는 ‘벽제정육점’을 꼭 가봐야 한다. 종로5가역에서 내려 골목길을 한참 올라가니 환히 불 밝힌 집이 나타났다. 노란 간판과 미닫이문은 이 집이 거쳐온 시간을 알게 해줬다. 얼굴이 붉어진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소리 높여 하고 있는 모습은 오래된 영화처럼 익숙했다.


이곳의 1번 메뉴는 당연히 육회다. ‘반드시’가 과장이 아닐 정도로 모든 테이블에 올라 있는 육회는 익숙한 모양이었지만 먹어보면 다른 식당과 달랐다. 살짝 얼려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내리는 식감 사이사이에 달콤한 기운이 듬뿍 흩어져 있었다. 여기에 매콤한 고추와 달달한 배를 넣었다. 맵고 달고 고소한 맛의 조화가 한국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경지에 있었다. “어휴 달아” 소리가 나오다가 또 매콤하니 침이 주르르 나왔다.


공덕동 경의선공원 근처 1층 상가 건물에 ‘엘리스 리틀 이태리’라는 식당이 있다. 상가 건물 틈에 있는 이 집은 입구가 작고 간판도 영어지만 찾기는 어렵지 않다. 사람들이 순번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거리는 집이 바로 그곳이다. 예약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것은 여러 번 말해도 부족하지 않다. 안으로 들어가니 오두막에 들어온 듯 아늑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이글거리는 불 속에서 빠르게 익힌 피자는 도우의 수분감을 적당히 날려내 테두리는 쫀득하고 바삭하기까지 했지만 토핑이 올라간 안쪽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달걀이 한가운데 올라가고 모차렐라 치즈에 이탈리아 소시지를 얹은 ‘살시차 피자’는 다양한 맛이 도우 위에 올랐지만 조합이 난잡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치즈 맛에 짭짤한 소시지가 얹히고 다시 달걀노른자의 부드러운 풍미가 올라타는 변증법적인 구조가 느껴졌다.


서양식 육회랄 수 있는 ‘비프 타르타르’는 소고기라는 굵직한 주제를 다양한 꾸밈음이 감싸는 듯했다. 트러플 페이스트, 마요네즈를 기반으로 한 랜치소스, 피클, 치즈가 소고기 틈틈이 박히고 겹겹이 올라갔다. 복잡한 건축물처럼 쌓아 올린 재료와 맛은 이음매가 단단했고 밀도가 콘크리트처럼 빡빡했다.


멀지 않은 공덕역 경의중앙선 근처로 가면 ‘독립한우 자인정육식당’이라는 집이 있다. 점심 시간이 되자 한바탕 사람들이 몰아쳤다. 뜨내기 손님은 없었다. 점심 메뉴로 국밥, 된장찌개를 내놓는데 여기에 한우가 들어가고 1만원이 안 되는 가격이니 뛰어서라도 자리를 차지하고 마는 것이었다.


고기를 내는 것도 특이했다. 등심을 통으로 자르면 어쩔 수 없이 속에 기름과 ‘떡심’이라 부르는 힘줄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이 집은 마치 ‘살코기 순수 서약’이라도 한 것처럼 기름과 힘줄을 일일이 걷어냈다. 잘 발라낸 살코기만 불판 위에 올리니 어머니가 구운 고기를 밥숟가락에 올려주는 듯한 어진 마음이 느껴졌다.


참기름과 마늘로 맛을 내고 채 친 배를 같이 낸 육회는 소고기가 루비색으로 빛났다. 입안에서 천천히 씹으며 고기의 온도를 올렸다. 금속성의 새된 맛이 조금씩 온순해졌다. 참기름과 마늘은 맛에 입체감을 불어넣었다. 빨간 육고기가 가진 묵직한 힘과 하얀 배의 시원한 맛이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이렇듯 재료의 맛으로 승부를 거는 육회는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투명하고 밝은 빛깔을 내는 소고기를 얻는 것은, 무엇보다 매일 똑같이 반복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한다. 한결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음식은 만든 사람을 닮아간다. 좋은 재료를 쓴다는 것은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 벽제정육점: 육우모둠 5만원(500g), 육회비빔밥 1만2000원, 육회 3만9000원(500g). (02)762-7491


# 엘리스 리틀 이태리 공덕: 살시차 피자 2만4000원, 비프 타르타르 2만3000원. (010)2668-3033


# 독립한우 자인정육식당: 한우국밥 9000원, 등심 1만8000원(100g), 육회(소) 3만2000원. (02)717-9992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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