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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코리아' 銀주전자 50년 만든 명장 "한국선 몰라줘도 중국선 억대 팔려"

홍재만 금속공예 명장 "죽기 전 국보급 작품 만들고파, 기술 전수도 절실"


한국보다 중국에서 더 알아주는 공예품이 있다. 바로 은(銀)주전자다. 중국에서는 은주전자가 부의 상징처럼 여겨져 중국 부자들에게 인기다. 은주전자 중에서도 '메이드인 코리아'가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한때는 중국이 세계 최고 기술의 은주전자 제조국이었지만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기술 전승이 끊겨 지금은 한국 제품이 최상품이 됐다. 중국 시장에서는 한국산 은주전자가 억대 가격에도 거래되고 있다. 중국 도매상들은 한국의 명장을 찾아나서 은주전자를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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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천 오정동에 위치한 우노공방(우노실버)에서 홍재만 명장(맨 왼쪽)이 작업을 하고 있다. /심민관 기자

금속 공방을 운영하는 홍재만 대표도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한국의 은주전자 명장 중 한명이다. 현재 우노공방이 만드는 은주전자 80% 이상이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홍 대표는 50년 경력의 베테랑 금속공예가로 지난 2017년 대한민국기로협회가 주최한 '대한민국 공예 명장대전'에서 전통수공예 방식으로 제작한 은주전자로 금속 공예부문 '명장'에 선정됐다. 그는 같은해 국제기로미술대전에 출전, 공예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실력자다.


홍 명장은 어릴 때 너무 가난해 학업을 포기하고 13살부터 금속 공예 기술을 배웠다. 홍 명장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는 데 재산을 모두 써 버린 탓에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서였다. 원래 홍 명장 집은 큰 부자였다.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창신동까지 홍 명장 집안 땅을 거치지 않고선 지나갈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였다. 홍 명장 할아버지는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를 발의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독립운동가 인암(仁菴) 홍병기 선생이다.


13살 소년이었던 홍 명장은 가족 부양을 위해 금속 공방에서 먹고 자며 일을 시작했다. 거친 선배들을 만나 얻어 터지며 일을 배웠다. 너무 힘들어 집으로 도망친 적도 여러번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열심히 기술을 익혔다. 지문이 닳아 없어진 그의 손. 지난 50여년간 수천만번의 망치질을 견뎌낸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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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만 명장이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심민관 기자

지난 7일 경기도 부천 오정동 우노공방(우노실버)에서 홍재만 금속공예 명장을 만났다. 공방 안에 들어서자 홍 명장과 직원들이 쇠덩어리에 동그란 은판을 얹어 망치로 두드리며 은주전자를 만들고 있었다. 홍 명장은 "지금은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가졌지만 기술 전승이 곧 끊길 것"이라며 "예전엔 힘들게 배웠는데 지금은 배우려는 젊은 사람들이 없다. 가장 어린 제자가 53살인데 걱정"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은주전자 무엇이 특별한가요.


"은으로 주전자 형태를 만드는 것은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걸 이어서 붙이지 않고, 하나의 판을 두드려 주둥이까지 달린 주전자를 만들기는 개인의 노력 만으로는 어렵습니다. 기술이 필요한거죠. 은주전자에 다양한 무늬를 양각과 음각으로 새겨서 문양을 집어넣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고난도 기술이에요. 또 은은 연한 성질이라서 강철 안에 입히기가 대단히 힘들어요. 강한 금속 밖에 은을 입히는 것은 쉬운데, 약한 금속 밖에 강한 금속을 입히는 건 굉장히 어렵거든요. 최근에 은 밖에 강철을 입힌 주전자를 만들었는데, 이 작품도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어요.


가장 오랜 기간 작업한 주전자는 한 두 달 정도 걸렸어요. 하나의 판을 두드려 주둥이까지 만든 전수공이었는데 중국에서 온 한 도매업자한테 3600만원에 팔았죠. 중국에선 1억원이 넘는 가격에 팔렸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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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으로 만들면 무엇이 좋은가요.


"술을 은주전자에 담으면 특유의 화학 냄새 같은 것도 사라지고 순해지기도 해요. 은주전자에 차를 끓이면 물맛이 깊으면서도 부드러워지죠. 그리고 은은 독에 닿으면 검게 변하는 성질이 있어요. 이 때문에 음식에 독이 있는지를 검사할 때 주로 이용했죠. 은으로 만든 그릇에 음식을 담으면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죠. 한번은 여름에 먹다 남은 생선을 은 식기랑 스태인리스 식기에 각각 담아본 적이 있어요. 일주일 정도 지나고 보니 스태인리스 식기에 보관한 생선엔 곰팡이가 피고 썪고 있었던 반면, 은 식기에 보관한 생선은 멀쩡하더라고요.


작업을 할 때도 은에 베이기도 하는데, 쇠도 독이 있어서 다른 금속을 작업하다 베이면 곪기도 하고 그런데, 은은 아무렇지도 않더라고요. 지금까지 작업 중 마신 은가루도 많은데, 오히려 더 건강해지는 것 같더라고요.(하하)"


일 하는데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사실, 국내 공예 시장 자체가 규모가 작고 너무 영세한 상황이에요. 한마디로 돈벌이가 안 되는거죠. 그런데도 한국 기술이 중국과 일본을 크게 앞서고 있어요. 원래는 중국이 세계 최고의 금속 공예 기술자들이 많았는데 문화 대혁명을 거치면서 우수한 기술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어요. 한국은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면서 지금까지는 기술력이 잘 보존됐죠.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에요. 문을 닫는 공방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젊은 사람들은 금속 공예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훌륭한 기술이나 전통이 끊어진게 현실이에요. 저희 공방에서도 가장 젊은 제자가 53살이에요. 저희 공방 직원은 총 6명인데 이 업계에선 매우 큰 규모에 속하죠. 최근 공방들이 너무 어렵다고들 해요. 버티는 것 자체가 미션이 돼 버렸어요."


정부 지원은 없나요.


"정부 지원을 받고 싶은 공방들은 많죠. 하지만 그것도 쉽지가 않아요. 저희 업계 어려움을 외부에서 잘 알고 공감도 돼야 하는데, 금속 공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워낙 낮아요.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어떤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지에 대해 방법을 잘 모를 수도 있고요. 가장 큰 문제는 공예품을 만들어도 이걸 내다 팔 활성화 된 시장이 없다는 거에요. 미술 시장처럼 갤러리가 발달된 것도 아니고요. 국내 공예품 시장 규모 자체가 작기 때문에 해외로 나아가야 하는데 다들 그 방법을 잘 모르죠. 해외에서 열리는 작품전에 부스만 하나 차릴 수 있어도 공방 운영에 큰 도움이 되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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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만 명장이 받은 상장들(왼쪽)과 대한민국기로협회로부터 받은 명장 메달. /심민관 기자

또, 가장 답답한 것 중 하나가 국내보다 해외에서 우리 금속 공예 가치를 더 알아준다는 거에요. 국내에선 기술력은 인정하면서도 가격을 들으면 비싸다고 사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해외는 다르더라고요. 저희 공방도 중국 바이어가 가장 많이 구매해 가고 있어요. 문제는 해외 구매마저 끊기면 공방 자체 존립도 위협받을 수 있다는 거죠. 이런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곳들이 많습니다."


직접 그런 제도를 만드는 일을 해볼 생각은 없나요.


"제도를 만들 의지가 있고 방법은 알지만 제가 직접 하기 보다는 정부 관계자가 정책을 입안하고, 국회의원이 관련 법을 만드는 데 뒤에서 조언을 해주는 역할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기회가 된다면 이 나라 금속 공예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데에 이바지하고 싶고, 제도 마련에 꼭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대학으로 가셔서 후학을 양성할 계획은 없으신가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제가 터득한 기술을 전수해 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가방 끈이 짧아서 기회조차 얻기 어려운 게 현실이죠. 대학생들 가르치려면 학위가 필요하잖아요. 그렇다고 공방에 와서 기술을 배울 젊은 사람들도 없다 보니 아쉬움을 느낍니다."


명장님은 어린 나이에 기술을 배우지 않았나요.


"13살 때부터 시작했으니까 한 50여년 일했습니다. 외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당시 금속공예 공장을 운영하던 이모부에게 데리고 갔었죠. 그곳에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공부를 한창 할 나이였는데 일찍 일을 시작하게 된 건 집안 사정이 너무 어려워서였습니다. 사실 저희 집은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전 재산을 독립운동을 하는데 쓰셨어요. 서울 재동에서 창신동까지 저희 할아버지 집 땅을 밟지 않고선 갈 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부자였다고 해요. 백범 김구 선생도 독립운동 중 서울에 오시면 저희 집에서 주무시고 가기도 하고 했다고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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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만 명장이 할아버지인 독립운동가 홍병기 선생의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심민관 기자

할아버지가 유명한 분이신가요.


"아, 저희 할아버지는 인암 홍병기 선생이세요. 천도교인으로 동학농민운동에 뛰어드셨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세요. 가족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신 분이셨습니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쓰셨죠. 그 과정에서 가세가 기울었고 집안이 어려워졌습니다."


자부심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자부심. 그 단어를 항상 제 가슴 속에 가지고 살아가고 있어요. 공예품을 만드는 일을 하지만 저 또한 애국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공예 기술의 맥이 끊기지 않고 후대에 잘 계승되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어요. 할아버지가 하신 독립운동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위치에서 나름의 애국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할 수 있는 애국은 한국의 우수한 기술이 끊기지 않고 후대에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할아버지가 자손에게 돈을 남기는 것 보다 독립된 나라를 넘겨주는 게 진정한 유산이라고 생각하셨듯이 저 또한 후대에 우리 금속 공예 기술을 잘 전수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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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만 명장이 만든 은주전자들. /심민관 기자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죽기 전 국보급 작품을 만들어 후대에 남기고 싶어요. 인생 전체를 담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 같은게 있죠. 누군가에게 판매하기 위한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어서도 최고로 인정받을 수 있는 국보급 작품을 만들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는거죠. 제가 가지지 못한 기술은 다른 공예가와 협력하고 채워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보고도 싶어요. 예를 들면 은주전자에 들어가는 용의 눈을 보석으로 박으려면 귀금속 세공 전문가와의 협력이 필요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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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만 명장이 김홍현 실버웨어 고은 공방 대표(왼쪽)와 찍은 사진.

작년에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회담할 때 평양냉면을 먹는 장면 기억나시죠. 그때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사용했던 은수저 세트를 만든 김홍현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이 친구가 귀금속 세공 전문가인데 함께 콜라보레이션(협업) 작품을 만들어 보자고 논의를 하고는 있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요. 돈을 벌어서 함께 일하는 직원들 월급을 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니까요.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작품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있는 거죠. 그리고 기회가 되면 천주교 성당 제례에 쓰는 용품이나 법당에서 쓰는 불기를 금속 공예품으로 만들어 보고 싶어요."


심민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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