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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매캐한 맛이 혀를 강타하면 술잔을 입안에 던져넣었다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코다리조림

조선일보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있는 ‘명태공’의 명태조림./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빨간 국물을 보자마자 침이 돌았다. 얼큰한 고춧가루 냄새가 먹지 않아도 느껴졌다. 요즘 유행하는 중국의 마라(麻辣)는 창으로 찌르는 듯 얼얼하고 뜨겁다. 하지만 한반도의 고춧가루는 두툼한 양감에 뒤로 뭉근한 단맛이 느껴진다. 명태를 반쯤 말린 코다리에는 국물이 스며들어 다시 바다에 풀어놓으면 헤엄이라도 칠 것처럼 살이 올라 있었다. 그 바다는 푸르지 않고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 집의 이름은 ‘명태공’. 서울 마포구청역 4번 출구로 나와 골목길을 조금만 걷다 보면 말끔한 외관을 한 집이었다. 크게 난 창은 잘 닦여 있었고 그 창으로 들여다본 실내도 말끔했다. ‘명태공’이란 이름에 명태가 시를 읊는 모습이 생각나 음식을 기다리던 중 혼자 웃고 말았다. 잘되는 집들이 그렇듯 종업원들은 손님의 말 한마디에 빠르게 움직였다. 찬 하나하나가 오래된 느낌이 없어서 젓가락이 절로 갔다. 넓적한 접시에 담긴 코다리조림에서는 고춧가루 방앗간에 온 것마냥 후끈한 기운이 돌았다.


지금은 가끔이지만 코다리조림을 꽤 자주 먹던 시절이 있었다. 성수동에서 회사를 다닐 때 이야기다. 요즘은 한국의 브루클린이니 하면서 동네 자체가 천지개벽을 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해가 지고 나면 으스스한 기분이 들 정도로 다른 분위기였다. 성수동에서 먹을 만한 것은 딱 두 가지였다. 감자탕 아니면 코다리조림. 그중 코다리조림을 먹으려면 성수동 뚝도시장에 가야 했다. 그 집의 이름은 ‘미정이네’. 오래전 뚝도시장에서 간이사업자 신고를 해놓고 작게 장사를 시작하던 곳이었다. 그러던 것이 회사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가 매상을 올려줬다. 회식 영수증이 자주 올라오자 회사 총무부에서 어떤 곳인지 직접 찾아왔다는 말이 전설처럼 돌았다. 지금은 뚝도시장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하는 집이다. 아마 절반은 전 회사 사람들이 키웠을 그 집 코다리조림은 매콤한 맛이 훨씬 강했다. 매운맛도 주문할 때 조절할 수 있었다. 주문을 넣을 때가 되면 괜히 선배들 앞에서 주눅 들기 싫어 “제일 매운 걸로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럼 옆에 앉은 이들이 ‘중간 맛 정도로 하라’고 말리는 게 보통이었다. 최루탄을 마신 것처럼 매캐한 맛이 혀를 강타하면 불을 끄듯이 술잔을 입안에 던져넣을 수밖에 없었다. 눈물·콧물이 쏙 빠질 때쯤이면 취기가 돌았고 취기마저 느껴지지 않을 때면 저 앞에 선배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걷는 모습이 보였다. 이 매운 음식을 보니 또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얼마 전 해외여행을 다녀온 직장 후배였다.


“저는 한국 음식 안 먹어도 괜찮을 줄 알았어요.”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얼큰한 음식이 몹시 당겼다고 했다. 나도 어릴 때는 해외여행에 고추장을 챙겨가라는 말이 농담인 줄 알았다. 아무리 오래 해외에 있어도 별 상관이 없었다. 외국 음식만 먹어도 괜찮다며 ‘글로벌’한 사람인 것처럼 짐짓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비행기가 뜨고 이국의 공기로 숨을 쉰 지 얼마 후면 매콤하고 얼큰한 것들이 당겨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또 예전에는 간이 슴슴하고 맛이 담백한 것이 최고라며 그런 음식만 찾아다니기도 했다. 모든 맛을 다 눌러버린다는 이유로 거칠고 매운맛이 고급스럽지 못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많다. 나 역시 이른바 대미필담(大味必淡)이라 하여 ‘좋은 맛이란 담백하다’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과연 고춧가루 없이 한반도 거주민이 단 하루라도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자작하게 졸아든 빨간 국물 속 코다리 살을 하얀 밥 위에 올렸다. 코다리 살에는 가시가 하나도 없었다. 가시를 일일이 다 발라낸 덕분이었다. 맵지만 또 그렇게 맵지만은 않은 양념에 밥을 비볐다. 찬으로 나온 콩나물도 한 움큼 집어넣었다. 매콤한 맛 뒤로 달달한 맛이 부드럽게 입안을 달랬다. 고소한 뒷맛이 남아서 한 숟가락이 다음 숟가락을 자연히 불렀다. 밥 한 공기를 먹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았다. 탄력 있는 명태살이 넉넉히 들어가 살코기를 먹은 듯 속이 든든했다. 등 뒤로 지나다니는 종업원들은 반찬이 비지 않았는지 수시로 살폈다. 그들의 조용한 다정함 속에 식사는 오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듯 평화롭게 끝났다. 이마에 흐른 땀은 금세 식었지만 부른 배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밤을 지새우며 끝내 서로에게 기대어 집에 돌아가던 그이들은 여전히 잘 있을까? 익숙한 음식을 먹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들. 가을 바람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명태공

명태조림(소 3만3000원), 명태조림정식(점심 2인 이상, 1만1000원) 황태해장국 9000원.

#미정이네

코다리찜 2인분(3만원), 계란말이 1만2000원.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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