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복 김선생] 훔쳐 먹다 걸리면 사형이었다는 이 음식
최고급 음식에서 대중식으로
파란만장 한국 만두의 역사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네요. 이북 출신인 저의 본가에서는 설날 떡국 대신 만둣국을 먹습니다. 한반도 이북 지역에서는 설에 만둣국을 주로 먹고, 이남 지역에서는 떡국을, 서울 등 중부 지역에서는 떡만둣국을 먹죠.
만두는 누구나 저렴하게 즐기는 대중 음식입니다. 하지만 조선 말까지만 해도 만두는 매우 귀하고 비싼 음식이었습니다. 만두 훔쳐 먹은 사람을 사형시켰을 정도였습니다. 믿기지 않는다고요? 역사서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탈북자 출신이 운영하는 서울 합정동 '동무밥상'의 만두./조선일보DB |
사신 접대·고급 선물·뇌물로 쓰인 만두
고려실록에는 충혜왕(忠惠王) 4년(1343년) 10월 25일 ‘어떤 사람이 궁궐 부엌에 들어가 만두를 가져가자 왕이 노하여 ‘그가 도둑질했으니 즉시 죽이라’고 명하였다'고 나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만두에 대한 기록입니다.
만두피를 빚을 때 필요한 밀가루의 원료인 밀은 한반도 기후와 맞지 않아 평안도·황해도·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만 농사가 가능하죠. 이에 따라 밀은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귀하고 비싼 곡물이었습니다. 만두가 비쌀 수밖에 없었던 이유죠.
고려 때 가장 큰 국가 행사는 팔관회였습니다. 팔관회에는 만두의 일종인 상화(霜花)가 빠지지 않았죠. 고려사(高麗史)에는 상화가 팔관회 때 올리는 세 번째 안주로 등장합니다. 조선 왕실 잔치에서도 만두는 반드시 등장했습니다.
박정배 음식 칼럼니스트와 요리연구가 서명환씨가 재현한 고려 가요 ‘쌍화점’의 만두 ‘상화’./조선일보DB |
손님 접대에도 만두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가장 큰 손님 접대라면 중국 사신을 맞는 일이었을 겁니다. 중국 사신 접대는 나라의 운명이 달렸을 만큼 중요했습니다. 청나라 사신 접대상에는 ‘대만두(大饅頭)’라는 독특한 만두가 올랐습니다. ‘한 대신(大臣)이 칼을 가지고 들어와서 큰 만두의 껍질을 갈랐다. 그 안에는 작은 만두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크기가 호도(胡桃)만 하여 먹기에 아주 좋았다’(한치윤 ‘해동역사(海東繹史)’)
이처럼 대만두는 하나의 커다란 만두 안에 작은 만두 여러 개가 들어있었습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9∼1618)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품평서 ‘도문대작(屠門大嚼)’에도 대만두가 나옵니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대만두를 ‘(평안도) 의주(義州)의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든다. 그 밖에는 모두 별로 좋지 않다’라고 썼습니다.
조선시대 명절과 집안 행사에서는 만두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성리학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이 지배한 나라. 성리학을 세운 주자(朱子·1130~1200년)가 가정의례에 대해 말한 내용을 모은 ‘주자가례’는 조선 사대부에겐 절대 기준이었습니다. 기독교도에게 성경, 무슬림에게 쿠란과 같은 권위를 가졌지요. 그런 주자가례에 만두를 제사에 올리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러니 만두가 제사, 차례 등 양반 집안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건 당연했겠죠.
만두는 선물로도 인기였습니다. 비싼 고기, 그리고 고기보다 더 귀한 밀가루로 빚은 고급 선물이었죠. 고려 문신 이규보(1168~1241)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여름에 수상(首相) 최시중(崔侍中)이 병든 이규보에게 보내온 술과 얼음과 ‘혼돈(餛飩)’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는 시가 나옵니다. 시에 등장하는 혼돈(餛飩)은 지금의 교자(餃子)만두로 추정됩니다.
만두는 뇌물로도 쓰였습니다. 조선 중기 문신·학자인 안방준(1573~1654)이 쓴 당론서인 ‘혼정편록(混定編錄)’에는 ‘정인홍(조선 중기 학자·정치가)이 만두를 좋아하여 찾아가는 이들이 그에게 만두상(饅頭盤)을 반드시 바쳤던 까닭에 탄핵을 만나 떠나게 된 것이다’고 나옵니다.
1960년대 분식장려운동 이후 대중화
조선 말기가 되면 만두는 중인들도 자주 먹을 수 있을 만큼 대중화합니다. 중인 지규식이 1891~1911년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에는 만두를 먹은 기록이 8번 등장합니다. 이 중 1897년 10월 27일 ‘청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다사(茶肆·음식과 차를 파는 곳)에 들어가 이영균(李永均)과 만두 한 주발을 먹었다(喫饅頭一椀)’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이 눈에 띄는 건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서울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를 따라 들어온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식 만두집이 서울에도 들어섰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죠. 이처럼 화교 덕분에 구한말에서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 만두는 호떡과 함께 외식 메뉴로 자리잡습니다.
서울 성수동 떡볶이집 '금미옥'의 튀김만두./조선일보DB |
만두의 진정한 대중화는 1960년대에 이뤄졌습니다. 정부가 추진한 분식장려운동 덕분이죠. 6·25전쟁 이후 식량부족과 흉작을 해결하고자 정부는 분식 즉 밀가루 음식 장려를 식생활 개선 방향으로 추진합니다. 미국이 공짜 또는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 밀가루 소비가 적극 권장됩니다. 학교와 군대에서 빵과 우유가 기본적으로 제공됐습니다. 인스턴트 라면이 1963년 최초로 출시됐습니다.
한국인보다 분식을 오래 전부터 해왔던 화교들은 짜장면, 짬뽕, 만두 등을 내놓아 인기를 얻습니다. 아무나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던 고급 외식업장이던 중식당은 이때부터 대중화의 길을 걷습니다. 보사부는 1969년 분식 조리법을 보급했고, 전국적으로 분식집이 급증했습니다. 분식집에서는 라면, 칼국수 같은 면 요리에 만두를 기본적으로 취급했습니다.
이후 만두는 분식집·노점·가정에서 쉽게 먹는 간식, 심지어 비싼 중화요리 주문하면 주는 공짜 서비스로까지 위상이 ‘격하'됩니다. 덕분에 만두를 누구나 즐길 수 있게 됐으니, 참 다행이죠?
[김성윤 음식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