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과 미션임파서블의 주제음악
영화의 혼이 되는 음악 ②
몇 해 전부터 헐리우드 영화의 공습이 대단합니다. 제 기억에 그 전까지는 소위 말하는 ‘블록버스터’ 급의 영화는 여름이나 겨울의 휴가나 방학 기간에 주로 극장에 걸렸었던 것 같은데, 어느 샌가 제작비 규모가 큰 영화들이 걸리는 특정 기간이 없어지고 연중무휴 사시사철 극장에 걸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2015년만 해도 기억나는 이름은, 어벤져스, 미션임파서블 5, 채피, 투모로우랜드, 쥬라기 월드, 판타스틱 4 리부트, 터미네이터 : 제네시스, 매드 맥스 4 - 분노의 도로, 앤트 맨, 분노의 질주 7, 헝거 게임 : 모킹제이 파트 2, 007 스펙터에 곧 개봉할 스타 워즈 에피소드 7 등, 거기에 기억 못하는 것까지 치면 많은 대작 영화들이 쉼 없이 극장에 걸렸습니다.
위에 나열한 영화 제목을 보시면 아시지만, 뒤에 숫자가 붙은 영화가 좀 있는데, 이런 영화들 중엔 시리즈로 제작되는 영화들이 많습니다. 시리즈 영화는 제작 일정상 바삐 달려도 1-2년 단위로 개봉을 하게 되는데, 어쨌든 해가 넘어가는 간격을 메꾸는 일관성을 갖고서 관객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항상 동일한 주제음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글에서 ‘시그니쳐(signature)’,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한 것과 상당부분 궤를 같이 하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일단 상식적으로, 같은 주인공이 나오고 설정도 공유하는 후속편 격의 영화면 같은 주제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받아들이기 쉽겠지요. (게다가, 리메이크나 리부트 같이 이미 기존 작품이 있는 경우라면 더 그렇겠습니다.)
‘스타워즈’ 이야기는 전에 했으니, 이번엔 가장 오래된 시리즈 영화인 007에 관해서 짤막하게 이야기할까 합니다.
007의 시작에 나오는, 재즈 오케스트라로 된, 너무도 유명한 주제음악은 존 배리(John Barry)의 편곡이라고 합니다. 가장 최근의 007까지도 이 음악을 사용했고, - 물론 매번 녹음은 다시 했습니다 - 대체할 만한 다른 음악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 007영화의 최고의 아이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이콘이라 함은 패러디가 되었든 오마주가 되었든 또는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든 ‘스파이 영화’라고 하면 일단 이 주제음악의 요소들을 일정부분 차용한 음악을 쓴다는 뜻입니다.
007의 오프닝은, 전체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음악인 이것이 그 유명한 총열 나사선 시퀀스에 얹혀서 일단 나온 다음에, 해당 편수의 주제음악에 해당하는 당대 유명 팝가수의 음악이 그 편의 내용을 의미하는 듯한 영상물에 얹혀서 따라 나오는 것이 거의 규칙처럼 굳어져 있습니다. 그것만 모아서 올려놓은 팬 영상도 있더군요.
정형화(?)된 오프닝을 갖는 영화 중에 또 하나 아주 유명한 첩보물을 떠올려 볼 수 있는데, 바로, ‘미션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입니다.
이 오프닝 주제곡의 원곡은 랄로 쉬프린(Lalo Schifrin)이 했답니다. 랄로 쉬프린은 미션임파서블의 주제곡 뿐 아니라 70년대 80년대에 많은 영화의 음악을 담당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던 영화음악 작곡가입니다.
007의 주제곡과 미션 임파서블의 주제곡은 모두 재즈 오케스트라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선 공통적입니다만, 영화에 얹힐 때는, 007은 - 녹음이야 다시 한다지만 - 원곡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는 감이 있는데, 미션임파서블의 경우는 편곡을 많이 변형해서 사용한다는 점이 사뭇 다릅니다. 어느 때에는 록 밴드 버전으로 바꾸기도 했고, 어느 때에는 약간의 일렉트로닉한 요소들을 집어넣기도 했지요. - 이 역시 오프닝만 모아놓은 팬 영상을 쉽게 찾으실 수 있어요.
들어서 재밌기로는 시리즈의 개별 영화마다 편곡을 바꾸는 게 재밌지 않나 싶은데, 오리지널을 중시하는 분들이라면 ‘오프닝은 원곡 그대로 시작하고 영화 중에 다시 나오거나 하면 그 때 편곡을 바꾼 버전을 쓰는 게 낫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외에 제가 기억하는 주제음악을 가진 시리즈 영화는, 터미네이터, 본 아이덴티티, 해리포터, 등이 있는데, 영화의 제작비 규모나 흥행정도가 대단한 영화들이라 주제음악도 당연히 잘 만들었겠지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한편으론, 시그니쳐나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주제음악들이 시리즈에 속한 각각의 영화들을 끈끈이 이어주는 데에 기여해서 관객들이 영화보는 재미에 일조한 면이 적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예컨대, ‘어벤져스’ 같은 영화는 시리즈 영화이고 제작비도 엄청나고 흥행도 잘 되었지만 그 주제음악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요. 기억이 안난다고 나쁜 음악이 들어갔다는 것은 아니고, 영화관람의 포커스가 달라지는 점은 분명히 있다는 거지요. 홍보의 포커스도 그렇구요.
한국영화 중엔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시리즈 영화는 없습니다. 어린이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 말고, 강우석 감독이 ‘투캅스’나 ‘공공의 적’을 시리즈로 만든 적은 있는데, 영화는 그렇다치고 주제음악이 기억에 남는 경우는 더더욱이나 없는 걸로 기억됩니다. (제가 기억 못하는 것일 수도 있구요. 취향이 좀 편향된 사람이라..ㅎㅎ)
헐리우드와는 판이 좀 다르니까 일대일로 비교하긴 힘듭니다만, 점차 기획자 영화가 많아지는 추세이니 언젠가는 한국영화 중에서도 꽤 긴 수명을 가진 시리즈 영화가 나오긴 하겠지요. 시리즈라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서두에 요즘엔 특정 블록버스터의 시즌이 없어졌다고 했는데, 블록버스터가 한두 편이 아니고 시리즈로 만들어질 수 있는 판이라면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많이 커진 판일 테니, 기왕이면 그런 판이 되는 게 좋아서요.
여튼, 그 때에 007이나 미션임파서블처럼 기억에 강하게 박히는 주제음악을, 만드시는 분들이 ‘시그니쳐’, ‘아이덴티티’ 측면에서 접근해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선 그 음악이 오랜 시간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으론, 원곡이 좋으면 좋고, 시리즈가 진행될 수록 다양한 버전들이 나오는 건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