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위로하는 소리, 트럼펫 (Trumpet)
악기들마다 그 악기만의 고유의 음색이 있습니다. 그 음색들은 그냥도 예쁜 소리이긴 하지만, 어느 순간에 마치 내 기분을 안다는 듯이 들리는 때라도 있으면, 그때의 느낌과 기억은 상당히 오래 갑니다. 마치 뼈에 기록되기라도 한 것처럼, 어쩌면 평생 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 중에, 특히나 저처럼 인스트루멘탈 음악을 주로 듣는 사람들 중에는 특별히 선호하는 악기가 있기 마련인데, 이번엔 그 중에서 트럼펫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 저는 전혀 다룰 줄은 모릅니다만, 그래서 개인적인 환상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뭐 어떻습니까.
보통 설명하기로는 트럼펫의 음색을 ‘영웅적(Heroic)’이라고 합니다. 시끄러운 와중이라도 그 사이를 뚫고 나와서 기어이 귀에까지 도달하는 음색을 지녔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옛날엔 군대에서 지휘 상황을 알리는 용도로도 자주 쓰였고, 현대 군대에선 상징적인 의미로 제식에 사용하는데, 그 때문에 영화에서는 주로 군대 음악에 자주 쓰였습니다. (밸브가 달린 트럼펫은 아니고 하나의 키(key)만 연주할 수 있는 원시적인 모양이긴 합니다만)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hyan)’ 는 내용 자체가 군대에 관한 이야기라서 사운드트랙도 매 트랙마다 군대 음악을 연상시키는 트럼펫 멜로디가 빠짐없이 나옵니다.
영화 ‘7월 4일생 (Born on Juli fourth)’은 군인이 되었다가 퇴역해서 반전운동가가 되는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입니다. 사운드트랙의 첫 번째 트랙은 트럼펫으로 시작하는데, 그 음색 때문에 군대와 관계되었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는 합니다만, 전형적인 군악풍의 음악으로 진행하지는 않지요.
위의 두 음악은 모두 일전에 말씀드린 적 있는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음악감독을 했습니다. 윌리엄스는 해군 군악대 근무 경험이 길었다고 하던데, 그래서인가 트럼펫을 포함한 브라스 앙상블(brass ensemble)을 참 잘 사용합니다. 그 유명한 ‘스타워즈(Star Wars)’의 인트로도 그렇고, ‘슈퍼맨(Superman’이니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이니 ‘인디애나 존스(Indiana Jones)’니하는 윌리엄스가 참여한 영화의 주제음악들은 ‘영웅적’인 트럼펫의 음색을 아주 잘 사용한 예들인데, 너무나 잘 사용하고 머릿속에 남아서인지 ‘전형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미지를 좀 확장시키게 되면, ‘군대’, ‘전투’, ‘투쟁’이나 그와 연관시킬 수 있는 내용의 영화라면 트럼펫이 들어간 음악을 사용해서 ‘어떤 저항을 이겨낸 승리’와 비슷한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굳이 직접적인 군대에 관한 영화가 아니어도 트럼펫의 인트로를 가진 영화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록키(Rocky)’ 의 이 유명한 주제는 그런 ‘승리’의 느낌을 잘 전해주는데, 거기엔 트럼펫의 음색이 효과적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 링크한 군대 트럼펫 중에 두 번째인 국립묘지에서의 트럼펫은 그냥 ‘영웅’이라기보다는 ‘영웅이었던’, 혹은 ‘상처입은 영웅’ 같은 사람에 대한 기념이나 추모의 느낌이 더 강합니다. 상당히 애수에 가득찬 음색이에요. 연주하는 상황도 그렇고, 그렇게 연주하는 관습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기도 해서 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 의 엔딩롤에서의 음악은 이런 의도로 일부러 그 음악을 약간 편곡한 곡을 씁니다.
‘추모’, ‘(상처입은) 영웅이었던’이라는 트럼펫의 이미지도 좀 확장시키면, ‘과거에는 영광스러웠지만 지금은 아닌’ 어떤 사람이나 상황, ‘과거엔 찬란했지만 빛바랜 현재’나, ‘그래서 지금은 외로운’ 이미지를 주나 봅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주인공이나 내용이 좀 차분하거나 쓸쓸한 느낌을 주는 영화에 트럼펫 음악이 나오게 되면 정말이지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지요.
‘엔젤아이즈(Angel Eyes)’에는 과거를 모르는 남자가 기억을 되찾는 계기로 트럼펫을 연주하는 장면이 있어요.
‘발 킬머의 집행자’라는 다소 흥행을 염두에 둔 번역제목인 ‘Salten Sea’는 트럼펫 주자였던 주인공이 아내의 복수를 하는 내용인데,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에 트럼펫 솔로곡이 나옵니다.
이런 애수나 회상조의 트럼펫 음악은 자칫 공감을 얻지 못하면 ‘청승’이 되기 쉽습니다만, 공감만 잘되면 ‘위로’같은 느낌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모베터블루스(Mo’ Better Blues)’는 이런 면에서는 가장 유명한 경우일 것입니다. 실화는 아니지만 이런 삶을 산 재즈 연주자는 많지 않나하는 이미지가 얹혀서, 들으면 주인공의 트럼펫 독주가 영화 앞부분을 상기시키면서 많은 감동을 줍니다.
얼마전에 봤던 ‘본 투 비 블루(Born to Be Blue)’는 실제 인물이었던 재즈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Chet Baker)의 이야기입니다. (이건 사실 재기를 하는 주인공에 의한 위로와 다른 복합적인 감정이 좀 섞여있는 결말이긴 합니다만)
저한테 트럼펫의 음색은 ‘영웅’, ‘승리’ 쪽보다는, ‘회상’, ’애수’, ‘고독’의 이미지가 강한데요, 특히나 솔로 트럼펫일 경우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잔뜩 힘이 들어가지 않은 (사실은 힘을 뺀 것처럼 들리기 위해선 상당한 수준이어야 합니다 ) 트럼펫 음악을 듣고 있으면 기분도 차분해지고, 어쩌다 기운 빠지는 일이라도 있는 날이면 말씀드렸던 위로해주는 것 같은 느낌때문에 기분도 나아지고 그래요. - 굳이 설명하자면, ‘너만 이런 건 아니야’, ‘그래 지금은 일단 감상적이라도 좋으니 푹 우울해지고 그 다음에 기분을 좀 전환시켜’하는 것 같은 말을 건네온다고나 할까요. 읽으시는 분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청승인 혼자만의 설명입니다만, 속는 셈치고 그럴 땐 트럼펫 솔로곡을 들어보세요. 기분이 나아지실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