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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타계…한국문학 '광장' 연 거목 쓰러지다

기념비적 소설로 분단, 현대사 성찰…후배 문인들에 큰 영향

'광장' 204쇄 발간, 문학 교과서 최다 수록

최인훈 타계…한국문학 '광장' 연 거

23일 별세한 최인훈 작가

23일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난 작가 최인훈은 한국 현대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거목(巨木)이었다.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발발로 월남한 그는 전후 전근대적인 상황과 양대 이데올로기의 틈새에서 부딪치는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고자 치열하게 고뇌했다.


다채로운 형식의 소설과 희곡, 평론, 에세이들을 발표하며 한국 현대문학의 테두리를 확장했다. 그의 문학 세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낡지 않은 문제의식과 세련된 양식의 전범으로 평가받는다.


문학계는 그를 "근대성에 대한 관심,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새로운 형식의 탐구를 바탕으로 '신이 죽은 시대, 신화가 사라진 시대에 신비주의와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기의 방법론으로 개발한 내면성 탐구의 절정에 선 작가", "문학작품을 썼다기보다 차라리 '문학을 살았다'라는 표현에 적실한 작가"로 평한다.


불세출의 문학평론가 김현은 일찍이 그를 두고 "뿌리 뽑힌 인간이라는 주제를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 확대시킨 전후 최대의 작가"라고 상찬한 바 있다.


무엇보다 그가 한국문학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기념비적 소설 '광장'이다.


4·19 이후 1960년대 벽두에 발표한 이 소설은 당대 지식인,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줬고,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읽히며 후배 문인과 젊은 독자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해방-전쟁-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는 주인공 이명준의 깊은 갈망과 고뇌를 그리며 남북 간 이념-체제에 대한 냉철하고도 치열한 성찰의 깊이를 드러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항대립을 극복하려는 한 개인의 역정은 반세기가 넘도록 여전한 분단 현실에서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을 던진다.

최인훈 타계…한국문학 '광장' 연 거

그뿐만 아니라 삶의 일회성에 대한 첨예한 인식, 개인과 사회·국가 간의 긴장과 갈등, 인간의 자유와 사랑과 같은 본질적 주제에 대한 폭넓은 성찰은 이 소설을 한국 현대문학사 최고의 고전으로 꼽게 한다. 출간 이후 현재까지 통쇄 204쇄를 찍었고,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최다 수록 작품이라는 기록도 있다. 2004년 국내 문인들(시인·소설가·대학교수·평론가 등)이 뽑은 '한국 최고의 소설'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8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 작품을 두고 "4·19는 역사가 갑자기 큰 조명등 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 생활을 비춰준 계기였기 때문에 덜 똑똑한 사람도 총명해질 수 있었고 영감이나 재능이 부족했던 예술가들도 갑자기 일급 역사관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광장'은 내 문학적 능력보다는 시대의 '서기'로서 쓴 것"이라며 자기를 낮췄다.


'광장'에 이어 그는 전망이 닫힌 시대의 존재론적 고뇌를 그린 '회색인',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면서 파격적 서사 실험을 보인 '서유기', 신식민지적 현실의 위기의식을 풍자소설의 기법으로 표현한 '총독의 소리' 연작, 20세기 자체를 전면적으로 문제 삼으며 동시대인의 운명을 큰 시각에서 조망한 대작 '화두'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시대를 통찰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많은 문학청년이 그의 영향을 받아 작가로 나설 수 있었고, 연구자들은 그의 작품을 토대로 진지한 연구와 평론의 세계를 열정적으로 열어갈 수 있었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는 1976년 '최인훈 전집'을 정리하여 발간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15권을 냈다. 문학과지성사 측은 2008년 이 전집 신판을 내면서 "생존 작가의 전집이 이렇듯 오랜 기간 판과 쇄를 거듭하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판형으로 제작돼 독자 앞에 선보이는 일은 우리 문학사에서 일찍이 어느 작가도 경험하지 못한 유례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최인훈 타계…한국문학 '광장' 연 거

그는 작품에 완벽주의를 추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광장'을 비롯해 여러 작품을 판을 바꿀 때마다 끊임없이 고쳐 쓰고 덧붙이는 등 개작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2008년 전집 신판을 낼 때도 '광장'의 일부를 고쳐 썼는데, 당시 이런 말을 남겼다.


"정신력이 살아있는 동안에 한 글자라도 좋은 모습으로 후대의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습니다. '광장'은 4ㆍ19 직후에 쓰인 것이기 때문에 역사에 무언가를 증언한다는 생각으로 숨 가쁘게 썼는데 이번에는 좀 더 문학성을 보강한다는 취지로 새로 썼습니다."


그는 2003년 계간지에 발표한 단편 '바다의 편지'를 끝으로 새 작품을 내지 않았지만, 2008년 기자들에게 "한 권 분량의 새 작품집을 낼 만한 원고를 갖고 있다"며 "말로 무언가를 적는 것이 마음대로 가자고 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실험한, 심미적이면서도 전위적인 작품일 것"이라고 밝혔다.


2009년 대중과 만난 자리에서는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은퇴란 없다. 지금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해 식지 않는 창작열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돌연히 찾아온 암을 이기지 못하고 신작을 세상에 내보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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