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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길] 호수, 산, 숲에 안긴 괴산 산막이옛길

청정 자연 속 수변 길…가족이 함께 걷기 좋아

연합뉴스

꾀꼬리 전망대와 괴산호 [사진/전수영 기자]

(괴산=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산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산막이옛길. 아름답고 깨끗하게 보존된 자연은 이미 그 이름 속에 있었다. 길은 정겹고 아늑했다.


'산막이'란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였다는 뜻이다. 산봉우리들이 장막처럼 가로막은 곳에 길이 났으니 그 길은 얼마나 소중한 소통의 통로였을까. 괴산댐이 생기기 전 괴산군 칠성면에 있는 산막이 마을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 바깥세상과 연결됐다. 1952∼1957년 괴산댐이 건설되면서 길은 구간 구간 수몰됐다.


한국전쟁 중에 착공된 괴산댐은 한국의 자본과 기술로 지어진 최초의 수력발전댐이다. 흔적처럼 남아 있던 옛길은 2011년 원 그림 위에 덧그림을 그리듯 과거 모습을 살려 복원됐다. 산책로 구간 대부분을 나무 데크와 야자수 매트로 만드는 등 친환경 공법으로 조성해 자연미를 잃지 않도록 했다.


소백산맥 서쪽에 위치한 괴산은 산지가 많다. 큰 산이 30개를 넘는다. 남한의 한가운데인 충청북도 중심에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군이지만 평야는 좁다.


산과 강,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산막이옛길의 아름다운 경치는 그런 괴산 풍광의 백미로 꼽힌다.


괴산(槐山)의 '槐'는 느티나무를 의미한다. 그만큼 괴산에는 느티나무가 많다. 수령 1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110그루 정도 되고, 수령 300년 이상이 50그루나 된다. 충북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괴산 오가리 느티나무는 수령이 약 900년이다. 산막이옛길에도 느티나무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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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호 옆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지는 데크길 [사진/전수영 기자]

산막이옛길은 괴산댐이 만들어낸 괴산호 둘레를 따라 나 있다. 호수 수면은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고, 길옆에 자란 느티나무의 앙상한 가지 끝에서 겨울눈이 찬바람을 이기고 있었다.


원주지방환경청 소속 박인숙 자연관광해설사는 여름이면 느티나무들이 길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겨울에는 소나무 가지에 눈이 내려앉은 풍광이 운치 있다고 말했다. 사계절 모두 아름답다는 것이다.


산막이옛길은 산막이옛길주차장에서 시작해 물레방아∼산막이마을∼산막이나루∼삼신바위∼연하협구름다리∼굴바위나루∼원앙섬∼신랑바위까지 이어진다. 거리는 약 7㎞이고, 편도에 2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신랑바위까지 가지 않고 삼신바위나 연하협구름다리까지만 걷다가 되돌아 나와 산막이나루에서 배를 타고 출발점인 산막이옛길주차장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연하협구름다리까지 걷고 산막이나루로 돌아와 배를 타게 되면 7㎞ 이상을 걷게 된다.


아이, 어른이 함께 걸을 수 있을 만큼 길이 편안해 바람 차가운 겨울일지라도 걷기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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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바위 [사진/전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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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삼신바위까지 걸어갔다가 돌아 나와 산막이나루에서 배를 타고 나왔다. 이 구석 저 구석 기웃거리며 쉬엄쉬엄 걸어서인지 출발점까지 돌아오는 데 3시간 가까이 걸린 것 같다.


괴산호 둘레와 연하협구름다리는 자동차로 둘러봤다. 오지였던 산막이옛길에는 역사 유적은 별로 없지만 인간 삶의 희비를 느낄 수 있는 흔적들이 많았다.


고인돌 쉼터, 연리지, 소나무 동산, 소나무 출렁다리, 연화담, 노루샘, 사랑목, 호랑이굴, 여우비바위굴, 아름다운 미녀 참나무, 앉은뱅이 약수, 병풍루, 괴산바위, 꾀꼬리 전망대, 마흔고개, 다래숲 동굴, 진달래 동산, 물레방아, 가재연못, 노수신적소(수월정), 느린 우체통 등이다.


이곳들에 얽힌 사연이 푯말들에 간략히 적혀 있었다. 사연을 읽다 보면 길동무들 사이에 어느새 대화의 꽃이 피어난다.


바람이 부드러워서인지 초겨울인데도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길 주변 습지에 생긴 살얼음은 계절이 깊은 겨울로 향해가고 있음을 보여줬다.


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소나무가 특히 눈에 많이 띄었다. 괴산호의 푸른 물이 보이는 언덕에는 40년생 소나무가 1만 평 정도의 군락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산림을 대표하는 침엽수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줄기가 굵고 높은 소나무들의 존재는 경관의 품격을 높인다.


한국의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이 장엄한 소나무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소나무는 햇볕만 있으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소나무가 강인한 한국인의 심성과 닮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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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두레학교 구정희 할머니가 쓴 시 [사진/전수영 기자]

어른들을 위한 놀이터인 양 좁고 길게 설치된 소나무출렁다리는 옛길에 아기자기함을 더했다. 소나무동산에는 괴산 두레학교 할머니들이 쓴 시를 보여주는 푯말들이 늘어서 있었다.

새싹


봄이 오니 즐겁다


우리 마당에는 싹이 파릇파릇


하루하루 다르다


사람은 한번 가면 고만인 걸


봄이 되면 새싹은 파릇파릇 올라온다


우리 남편 간 자리 그대로


봄이 되어 남편 돋아나면 좋겠다


구정희 할머니(1939년생)


내 딸 복순이


웅덩이에 빠진 노루


복남이 따라 집에 왔다


여름에는 세똥 먹이고


겨울에는 사과 먹이고


이제는 시집 보내야지


복순아 멍멍이 복남이 한태


시집 갈래


에이 이년 또 똥 잔뜩 쌌네


시집은 무슨


한복희 할머니(1937년생)

세상의 걱정과 나쁜 기억을 괴산호수에 다 버려서 잊으라는 망세루에서 '멍 때리기'도 잠깐, 길을 재촉했더니 1964년까지만 해도 호랑이 발자국이 발견됐다는 호랑이굴이 나왔다.


호랑이 흔적이 있는지 찾아보라는 박인숙 해설사의 명령(?)에 순순히 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동굴 속에서 날카로운 '어흥∼' 소리가 터져 나와 귀청을 자극했다. 무심결에 놀라 굴속을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헛웃음만 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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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비바위굴 [사진/전수영 기자]

여우비바위굴은 길 바로 옆에 있었다. 젊은 남녀가 여우비를 피하려다 사랑에 빠졌다는 속설을 낳은 곳이다. 상상력을 자극할 만큼 깜찍하고 작은 굴이었다.


산막이옛길은 이처럼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정겨운 곳이 많아 다채로운 느낌을 줬다. 또 제1경 환벽정, 제2경 망세루, 제3경 병풍루, 제4경 삼신바위 등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선정된 곳이 9개였다. 이른바 삼막이옛길 9경이다. 실제로 모두 풍광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9경에 속하지 못했지만 가장 인상 깊은 곳은 꾀꼬리 전망대였다. 바닥이 투명 유리로 만들어져 있어 물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재미있는 곳이었는데 꾀꼬리집처럼 작고 어여쁜 망루였다.


산막이옛길은 2007년부터 5년에 걸쳐 복원됐다. 조성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질 정도로 사랑받는 길이 됐다. 감염병 사태가 터지기 전에는 연간 방문객이 150만 명을 넘었다.


요즘도 주말에는 3천여 명이 이곳을 찾는다. 그래서인지 20세대 정도가 거주하는 산막이마을에는 현재 원주민이 몇 안 산다고 한다. 대신 식당, 카페, 펜션 등의 운영자들이 새 주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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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협구름다리 [사진/전수영 기자]

산신바위는 댐 건설 전에 경치가 빼어나고 강물이 빠르게 흘러 살여울이라고 불리던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신바위에서는 연하협구름다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2016년에 지어진 이 구름다리는 차가 다니지 않는 도보전용으로, 산막이옛길에서 유일하게 달천을 건널 수 있는 다리다. 괴산호로 흘러드는 강이 달천이다. 산신바위에서 바라보는 연하협구름다리는 아련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반면 연하협구름다리 위로 직접 올라서면 달천과 괴산호, 이를 둘러싸고 있는 산봉우리들이 장엄한 멋을 보여준다. 발밑을 흐르는 달천은 깊고 푸르고 넓었다. 연봉으로 이어진 산들은 이곳이 왜 산막이라고 불리는지 새삼 실감 나게 한다.


걷기를 마친 뒤 산막이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나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겨울 호수의 물살을 가르는 뱃전에 앉아 있으면 옛길을 품은 괴산호의 정취가 온몸으로 밀려드는 듯하다. 특히 환벽정이 꼭대기에 서 있는 바위 벼랑은 작은 선경이었다.


많은 사랑을 받는 길이어서인지 산막이옛길은 여러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3회 연속 한국관광 100선, 환경부 지정 생태관광 20선, 3년 무병장수 길, 우리나라 3대 명품길 등이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과 함께 산막이옛길은 3대 명품 길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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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막이옛길 입구와 산막이나루를 왕복하는 작은 배 [사진/전수영 기자]

산막이옛길의 매력은 이 길에서 끝나지 않는다. 옛길을 내려다보는 등잔봉(450m), 천장봉(437m), 삼성봉(550m)까지 가는 등산로 코스 2개가 산막이옛길과 연결된다.


옛길에서 올려다보면 등잔봉에서 삼성봉까지 능선이 손에 잡힐 듯하다. 부드럽고 완만한 능선은 어서 올라오라고 손짓한다.


소나무가 많은 이 일대에 봄이면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다고 한다. 산행의 유혹은 산막이옛길을 걸은 뒤 돌아서는 '뚜벅이'들에게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산막이옛길은 충청도 양반길과도 연결된다. 높은 산과 맑은 물이 함께 하고, 흙길이 고스란히 보존된 양반길은 9개 코스, 총 85㎞다. 산막이옛길이 끝나는 데서 양반길이 시작된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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