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역사의 역사' 를 쓴 결정적 이유"
역사 서술의 역사(history of writing history)
『역사의 역사』 펴내
“가제본 아닌가요? 진짜 유시민 책 맞아요?” 돌베개에서 『역사의 역사』 표지를 공개하자 대다수의 독자가 놀라워했다. 역사책이긴 한데 어쩐지 예술책 같은 장정. 디자이너는 왜 이런 표지를 기획하고 출판사는 왜 이런 디자인을 수용했을까. ‘유시민 책’ 같아야 출판 시장이 더 반응할 텐데 말이다. 혹여 궁금한 독자가 있다면 책 제목에 숨겨진 힌트를 읽자. 역사’의’ 역사.
2013년 이후 전업 작가로 살고 있는 유시민은 2년 전, “높은 수준의 지적 긴장감을 갖고 써야 하는 책은 좀 덜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역사의 역사』 를 쓴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유시민은 역사 교사인 아버지 덕분에 일찍이 많은 역사서를 탐독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부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에드워드 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 최근 그가 특히 즐겁게 읽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까지. 그는 흥미로운 역사의 사실을 읽는 일이 즐거웠고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기쁨을 누렸다. 유시민에게 역사의 매력은 “사실의 기록과 전승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데(17쪽)”있었다.
유시민은 『역사의 역사』 를 ‘역사 르포르타주(reportage)’로 받아들여 주길 기대한다. 그는 “역사가 무엇인지 또 하나의 대답을 제시해 보려는 의도는 없다. 위대한 역사가들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생각과 감정을 듣고 느껴봄으로써 역사가 무엇인지 밝히는 데 도움될 실마리를 찾아보려 했다”고 말했다. “훌륭한 역사는 문학이 될 수 있으며, 위대한 역사는 문학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 작가 유시민을 파주 돌베개 출판사에서 만났다.
‘역사의 역사’를 여행하는 패키지 투어
얼핏 여행서를 쓰신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역사의 역사』 는 왜 쓰셨나요?
생각은 종종 했었지만, 시작은 돌베개 대표님의 한 마디였습니다. 근 50년 동안 우리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역사서 중 하나가 에드워드 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잖아요. 제가 대학생 때 읽은 책이니 무려 50년 가까이 꾸준히 읽혔는데, 유럽사를 토대로 한 책이라 우리 독자들이 읽기엔 부담이 있지 않나, 생각했어요. 대표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나 한국 독자에게 맞는 책을 쓰면 좋지 않을까, 의견을 나눴어요. 제가 역사학자가 아니고 ‘역사가 무엇인가’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라, ‘역사가들이 본 역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역사책에서 찾아보자고 생각했어요.
발생사를 먼저 짚으셨어요.
역사가 뭔지 이해하려면 발생사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어떤 사람에 관해 알려면,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공부를 했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역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최초의 역사서라고 말하는 책부터 최근 관심을 받기 시작한 역사서에 이르기까지. 실제 역사가들이 서술한 역사가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변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됐는지를 따라가 보는 일이 ‘역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가제도 ‘역사의 역사’였나요?
맞아요. 역사서에 관한 책을 쓰려니 저도 책을 다시 읽어야 했는데요. 역사가 입장에서 역사책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역사가들이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책을 썼는지를 들여다보려고 했어요. 역사책 자체에 대한 상세한 소개나 비평보다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관련해 그 역사책을 왜 주목해야 하느냐에 초점을 맞췄어요. ‘역사가들이 왜 역사책을 썼나, 왜 하필 그런 대상을, 왜 하필 그런 사건을 썼을까’에 감정이입을 해봤죠.
책의 타이틀이 ‘역사로 남은 역사가와 역사서를 탐사한 지식 르포르타주’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유시민이 바라본 역사서로 읽힐 텐데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지만 가장 큰 비중을 둔 부분은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해 독자들이 감을 잡길 바랐고요. 정보를 압축해서 전달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제가 역사책을 읽으면서 배운 것, 새롭게 느낀 것, 알고는 있었지만 중요한지는 미처 몰랐던 것들에 대해 썼어요. 역사책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한 서술이 아니에요. 저자가 글을 쓰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 감정을 살펴 읽어야 해요. 이 감정을 독자들과 나눠보고 싶었어요.
에필로그 제목이 ‘서사의 힘’인데요. 『역사의 역사』 를 읽을까 말까 망설이는 분들이 에필로그를 먼저 읽고 책을 읽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역사의 역사’를 여행하는 패키지 투어예요. 가이드가 있는 패키지 투어를 다녀보셨죠? 비행기를 타고 내리면 버스가 대기하고 있고, 호텔로 이동해서 짐을 풀고 나면 가벼운 차림으로 다시 버스를 타고 왕궁에 가고 박물관에 갑니다. 굉장히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다니죠. 크게 준비하지 않고 따라가도 도시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와 설명을 들을 수 있어요. 『역사의 역사』 는 이런 정도의 성격을 가진 책으로 볼 수 있어요. 아주 소소하고 자잘한 재미는 부족할 지도 몰라요. 어떤 한계가 있는 책일 수 있지만, 그 한계 속에서 어떤 유용성을 갖는 책으로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출판사에서 예약 판매를 했는데, 예스24 주간 베스트셀러 1위를 하셨어요. 예약 판매에 부담이 크셨다고요.
목차만 보고 책을 샀을 때, 독자의 예상과는 다른 책이 될 수 있잖아요. 부담스러웠지만 출판사의 결정이었으니까 따랐죠. 걱정이 되긴 합니다.
역사서를 읽다 보면 도저히 공감이 안 되는 책들도 많지 않나요?
있죠. 많습니다. 그런 책들은 읽기도 힘들고 공감도 되지 않아요. 책에도 이런 제 감상을 솔직하게 썼어요. 어떤 책은 굉장히 훌륭하고 공감도 크지만 접근하기 어려웠어요. 도시로 치면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거죠. 정확한 지도도 없고, 안내문도 없고. 그런 책들도 있어요. 하지만 분명 나에게 맞는 역사서는 있거든요. 『역사의 역사』 를 읽다가 그렇게 느끼는 책이 있으면, 긴 시간을 두고 도전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감정을 전달하는 역사서라야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책에 소개한 역사서가 18권입니다. 이 역사서를 소개하기 위한 공부도 다시 하셨을 텐데요. 좀 더 쉽게 소개하고자 노력한 부분이 있다면요?
노력이라기보다 어떤 주안점이 될 수 있을 텐데요. 제가 많이 느낀 점은 역사책을 쓴 사람도 ‘사람’이라는 거예요.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사마천 등 그 옛날 2000년, 2500년 전 역사가들도 정말 똑같더라고요. 그들은 글을 파피루스에, 우리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쓸 뿐 크게 다른 게 없어요. 모두 ‘감정’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 쓴 책이죠.
역사가들도 어떤 감정, 욕망으로 책을 썼다는 의미인가요?
맞아요. 그들도 인간적인 욕망이나 소망, 감정을 갖고 역사책을 썼어요. 평소 자주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타인의 감정을 눈여겨보면 나와 타인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 감정들이 역사책 속에도 있어요. 직접 드러나지 않았을 뿐인지, 어떤 장면을 묘사한 대목을 보고 있으면 제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수많은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똑같이 살아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나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덧없는 것인지를 아는 데 도움이 돼요. 우리는 유한한 존재잖아요. 초기의 역사가들을 보면 자기 존재를 남기고 싶은 욕망이 아주 강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여기서 눈여겨볼 건, 이들이 역사에 오래 남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욕망 때문이 아닌 ‘작업의 탁월성에 있다는 사실이에요. 역사가들이 역사 서술을 왜 했을까요? 잘 따져보면 자기 욕망, 갈망을 충족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어요.
예를 들어 주신다면요.
사마천의 저작들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마천의 『사기』는 인간 혁명의 보물창고이자 결국은 평범한 얘기들인데요.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꼭 가치가 있거나 행복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동시에 그것이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도 드러나고요. 사마천이 묘사한 인간 군상을 보면 권력, 서열, 관계, 상속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요. 현대 시대에 가장 큰 권력은 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있지만,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면 소소한 권력 관계가 엄청 많잖아요. 회사로 따지면 거래처도 있을 것이고 팀장도 있고 사장도, 고객도 있을 텐데 다 권력 관계예요. 내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상대가 있고 그렇지 못한 상대가 있죠. 사마천의 저작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권력 관계에 대응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역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갑질을 할 수 없어요.
역사서를 통해 갑을 관계를 고민할 수 있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역사서를 꼭 읽어야겠어요.
『사기』를 읽고 나면, 내가 권력 관계에서 갑의 이미지에 있을 때 그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많이 느끼게 돼요.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비굴하지 않게 한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권력 관계에 대처하는 법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사기 열전』 을 경영자들이 많이 읽죠. 읽어야 하고요.
‘감정에 들어간 역사서’ 생각해보지 못한 정의입니다.
많은 역사가들을 살펴보면 굉장히 거만한 사람도 있었고, 사마천 같은 자애로운 사람도 있었어요. 역사서를 읽다 보면 역사가들의 성격이 느껴져요. 그 성격이 반영돼서 글이 나오기 때문이에요. 역사는 그냥 학문이 아니에요. 과학도 아니고요. 어떻게 보면 완성된 형태의 역사는 문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완성된 형태의 역사서는 단순한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전달해야 해요. 감정을 전달하는 역사서라야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거든요. 영국의 사학자 토인비가 “위대한 역사가는 위대한 예술가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잖아요. 토인비 역시 굉장히 많은 역사책을 읽고 나서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거장의 말은 정말 허투루 해석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웃음)
유시민의 책이라서 이 책을 볼 독자가 많을 거라 예상됩니다. 어떠신가요? 방송 활동을 하고 계시지만, 결국 본업은 ‘작가’시잖아요.
근 3년간 강연을 다니지 않았지만, 가끔 무서운 독자를 만나요. “유시민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는 분들이에요. 정말 무서워져요. 왜냐면 전 다 알고 있거든요. 어떤 책들에서 중복되는 이야기, 과거와 달라진 저의 시각. 이런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무서워져요. 그래서 제 책을 모두 읽는 분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제가 겁을 덜 내면서 살 수 있는데요. 다행히 제 책을 읽는 분들이 다 같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인문 쪽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 관심이 높은 분들도 계세요. 어떤 독자들은 자기계발 측면에서 제 책을 읽어주시고요. SNS나 블로그를 보면, 각자 좋게 읽어주신 책들이 다 달라요. 그래서 독자들이 제게 뭘 원하냐?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다만 “책을 계속 내달라”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데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계속 써야겠구나 싶어요. 굉장히 감사하죠.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작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 않나요?
물론 그렇죠.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는 필자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아요. 독서계나 출판 비평 같은 분야에서는 진지한 필자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요. 제게 『나의 한국현대사』 는 굉장히 진지한 작업이었어요. 제가 역사학과 출신이 아니니까 인정을 못 받겠지만 학술적으로도 의미가 좀 있다고 봐요. 또 인문학 책으로 『청춘의 독서』 도 꽤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대중성이 높은 형태로 쓰긴 했지만, 다분히 학술적인 면, 비평적인 면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받아들여 주진 않는 것 같아요. (웃음) 아마도 제 사실상의 첫 책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다이제스트 성격을 띄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지만요. 그래서 저는 다른 욕심을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는 독자들에게 평가 받는 사람이니까, 미디어셀러 비슷한 취급을 받아도 연연해하지 말자,라고 생각해요. (웃음)
서운한 감정이 설핏 비쳐지는데요. 이번 책 『역사의 역사』 로 어느 정도 상쇄되지 않을까 싶어요. (웃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있어 보이게 쓰고 싶었어요. (웃음) 멋들어진 현학적인 문장도 쓰고 싶었고요. 제가 글을 쓸 때 독자들을 많이 생각하는 편인데, 이번 책만큼은 내가 쓰고 싶은 데로 한번 써보자고 생각했어요. 있어 보이는 문장을 잘 쓰는 필자들이 있잖아요. 사실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저도 그런 문장을 싫어하지 않아요. 좋아하는데, 책을 써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생각할 수 없잖아요. 가수가 자기가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만 할 수 없는 것처럼요. 음원도 팔리고 행사 요청도 와야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거니까, 진짜 만들고 싶은 음악도 만들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도 만들잖아요. 사실 제게도 그런 갈등이 없지 않았어요.
충돌하셨던 거네요. 내가 쓰고 싶은 데로 쓰고 싶은 마음과 독자를 생각하는 마음이요.
비슷해요. 근데 내가 쓰고 싶은 데로 쓰는 게 안 되더라고요. 오랫동안 그렇게 안 썼으니까 머릿속에선 가능할 것 같았는데 실제 써보니 안 되는 거예요. 하지만 다른 책에 비하면 문장이 그리 쉽게 읽히진 않을 거예요. 제가 단문을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긴 문장도 많이 썼어요. 저도 써보고 싶었거든요. (웃음)
북 디자인이 굉장히 화제입니다. 저자로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표지나 디자인 같은 경우는 출판사에게 맡깁니다. 그들이 전문가잖아요. 저에게 자꾸 표지를 보여주셨는데 저는 디자인에 안목이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좋더라고요. 출판사로부터 듣기론 제목과 저자, 내용에 맞춤한 디자인을 고민했다고 합니다. 전작들과 다른 새로운 면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 책의 격을 정직하게 표현하고자 했다는 기획 의도를 들었습니다. 독자분들이 다양하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디자인도 책 내용도요. 저는 보면 볼수록 멋진 것 같습니다. (웃음)
『역사의 역사』 를 읽고 나면, 내게 맞는 역사책 한 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자로서 기대하는 바가 아니실지요?
바라는 바죠. 이 책은 이미 역사에 어느 정도 호기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 주로 읽지 않을까 싶어요. 역사책을 읽는 방법이 궁금했던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어 주실 것 같고요. 모든 역사책이 그렇지만, 이 책 역시 저자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읽으면 훨씬 흥미롭게 다가올 거라 생각합니다.
글 | 엄지혜 사진 | 신화섭
유시민 저 | 돌베개
역사가의 생각과 감정, 역사 공부의 재미와 깨달음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저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게 한다. [도서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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