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증을 통해 일상을 들여다보다
『정신과 영수증』 재출간 기념 낭독회
『정신과 영수증』이라니.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이 제목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대다수가 ‘신경정신과 영수증’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정신의 영수증’이라고 읽는 것이 맞다. 이 책의 저자인 정경아는 광고카피라이터와 브랜드 마케팅 일을 했으며 현재는 이름을 만들어 주고, 이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름재단의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 정신은 그런 그녀의 예명이다.
책 안에는 영수증을 통해 일상을 들여다보는 습관을 지닌 한 여자의 일상이 담겨 있다. 사실 이 책은 2004년에 이미 출간됐다. 그러니까 12년이 흘러 2016년, 재출간된 것이다. ‘영수증으로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소재가 많은 독자를 이 책으로 이끌었고,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이 책을 찾는 이들이 여전히 많아 이렇게 재출간까지 이뤄지게 됐다. 지금은 저자도, 독자도 그 당시보다는 나이를 먹었지만 아마 그 시절, 스물다섯 살의 정신과 그녀의 이야기가, 그리고 그 책을 읽었던 과거의 자신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수증 모으는 여자
영수증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받고 지갑에 넣는 사람들도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기 마련이고, 받기도 전부터 ‘영수증은 버려달라’는 말을 하루에도 수없이 하곤 한다. 그렇게 늘 보게 되는 영수증이기에 우리는 영수증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영수증 안에는 꽤 많은 것들이, 그것도 굉장히 세세하게 담겨 있다. 어디에서 구매했는지 알 수 있는 자세한 주소와 함께 몇 월, 며칠, 몇 시에 무엇을 샀는지 적혀 있으므로 우리는 그 영수증 한 장만 봐도 그날을, 그 순간을 떠올리곤 한다. 저자에게는 그런 영수증을 모으는 습관이 있다. 그녀는 영수증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그려내기도 한다.
지난 1월 16일, 『정신과 영수증』 재출간을 기념해 열린 행사는 조금 특별했다. 저자가 2001년에 쓰고, 2004년에 빛을 본 책이 2016년, 독자들의 목소리로 다시 세상에 흘러나오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저자 정신은 “책을 써놓고 나서 그것이 덮여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여러분이 펴주셔서 감사하다”라고 말하며 이 자리가 마련되기까지 자신에게 도움을 줬던 주변 사람들에 대해 하나하나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어서 “오늘 행사는 열 번의 읽기를 하고 짧고 굵게 끝내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전에 낭독하기로 예정된 독자들과 그녀의 지인들이 한 명씩 나와 각자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골라 읽어 나갔다.
누군가는 이 책을 보며 반짝였던 20대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이 책이 힘들었던 시간을 위로해줬던 존재이기도 했으며, 지난 시절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 한 권의 책은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며 여러 개의 의미를 만들어냈다.
책 안에는 그녀를 옆에서 늘 지켜봐 온 지인들이 쓴 축사가 담겨있다. 지인들이 나와 그 축사들을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읽는 시간도 마련됐다. 문화전문지 <페이퍼>에서 글을 쓰고 있는 정유희 기자는 “정신이 낭독회에서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폭로해달라고 부탁을 했다”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10년인가 15년도 더 된 일인 것 같은데, 어느 날 정신이가 영수증 다발이랑 원고 뭉치를 들고 저희 집에 왔어요. 어떤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했다며 굉장히 흥분해서 저에게 의견을 묻더군요. 저는 원고를 훑어보고 찬물을 확 뿌렸어요. 아이디어는 획기적이었지만 그 당시에 정신 씨는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온전하지 않았고 비문도 많았어요. 달리고 싶어 하는 말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는 형국으로 스톱을 걸어놓고 제안을 하나 했죠. 제가 글을 쓰고 있는 매거진 <페이퍼>에 매달 원고를 한 꼭지씩 보내서 한번 연재를 해보자는 것이었어요. 편집부에서 원고를 수선해주고 그렇게 하다 보면 조금씩 문장에 대한 것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제안했는데 덥석 물더라고요. 그래서 <페이퍼>에 ‘정신과 영수증’을 연재하게 됐고 그 이후에 출간하게 된 것입니다.”
영수증은 필름의 한 조각
낭독이 끝나고, 독자가 저자에게 궁금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다음에도 『정신과 영수증』이 다시 출간될 수 있는가’라고 한 독자가 물었다. 정신은 “원래 매년 내려고 했는데, 그건 어려울 것 같고 가족이 생기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질 것 같다. 나중에 가정을 이뤘을 때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있었던 이야기를 쓰고 싶다”라고 답했다. ‘하루에도 영수증이 굉장히 많이 생기는데, 그중에 특별히 선정되는 영수증의 기준이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처음에 이 작업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영수증을 보면 필름의 한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 하나하나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앞뒤의 연결성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꼭 그날 매일매일 적는 건 아니고 모아 놓았다가 개별 이야기와 전체 이야기의 균형을 만들어가고 있다”라는 답을 전했다.
이날의 자리가 빛나 보였던 것은 그녀, 그리고 그녀의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많이 참석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맺고 있는 끈끈한 관계 덕분인 것 같았다. 정신과 비슷한 에너지를 풍기는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이 책이 처음 출간된 해에도, 그리고 재출간된 지금도 여전히 그녀 곁에 함께 하고 있었다. 한 독자가 ‘이렇게 좋은 친구분들을 어떻게 만나게 됐는가’라고 물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 책의 사진을 찍어준 사이이다와 화가 나난씨는 학교 후배였어요. 학교에서는 일년 차이가 가장 군기가 세다고 하는데 이분들이랑은 서로 케미가 너무 잘 맞았어요. 그렇게 바로 아래 학번 후배들과 친구가 됐고, 또 그 시절에 알게 된 사람이 여기 오신 장윤주 씨예요. 저희가 대학생이었을 때 장윤주 씨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당시 장윤주 씨를 만나고 한눈에 알아봤죠. 이상하다는 것을요(웃음). 홍진경 씨와 알게 된 건, 장윤주 씨가 어느 날 저에게 홍진경 씨를 소개해주고 싶기는 한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한다고 하는 거예요. 둘이 너무 똑같은데, 그렇기 때문에 스파크가 잘못 튈까 봐 걱정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다가 이 책의 디자인을 맡은 민선 언니가 홍진경 씨를 소개해줘서 만나게 됐어요.”
낭독회의 대미는 이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 시간까지 앞당겨온 방송인 홍진경이 장식했다. 행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가 도착했다. 정신은 “이분을 소개할 때 항상 ‘상당히 지적인 사람’이라고 소개한다”라며 “홍진경 씨 축사를 받고 나서 깜짝 놀랐다. 필력이 좋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축사를 받았을 때 받아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찬사가 많아서 너무 감사했다. 홍진경 씨의 축사를 들으며 낭독회를 마치겠다”는 말을 전했다.
“아홉 살에도 열네 살에도 스물셋에도 내가 찾던 사람. 그 나이엔 어디에 살았느냐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실제로 그런 질문을 막 해댔었다. 글리세린을 섞은 듯 쉽게 증발하지 않는 정신의 이야기들은 뒤틀어져 엉거주춤 힘겨운 숨을 내쉬던 나를 촉촉히 펴주었다. 어떤 해는 정신을 한 번도 못 보고 지나가도 정신을 모르던 시덥잖은 날들에 비하면 아름답다.” (홍진경의 축사 中)
정신 저 | 영진닷컴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면 오늘 산 물건과 영수증을 꺼냅니다. 물건은 제 자리에 놓아두고, 영수증은 꺼내어 시간과 가격, 장소 위에 자신의 기록을 더해 갑니다. 그것을 살 때의 기쁨과 슬픔, 그날의 날씨,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한 사람들과 들려오던 음악에 관하여. 그녀가 스물여덟 즈음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서른 살 쯤에 결혼을 준비한다면 그동안 가져왔던 것과는 또 다른 영수증을 가지게 되겠지요. 이러한 상상을 하면서 기록한 이야기들입니다.
[도서 상세정보]
[추천 기사]
- 요시모토 바나나 “자신에겐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