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림 “반지하에 살면서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다섯 번째 시집 『반지하 앨리스』 펴내, 슬픔의 끝장을 보려고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내 인생의 반은 이미 지하로 갔다’고 시인은 말했다. 몸의 절반이 땅 속에 묻힌 채 살아온 10년의 세월, 절망이 찾아든 순간도 있었지만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네가 나를 이해 못 하고 /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없어도 / 우리라는 구름 울타리가 있어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 “쓸쓸한 나와 같은 너를 찾아 / 슬픔에 목메며 / 슬픔의 끝장을 보려고 /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던 시인은 슬픔의 끝에서 희망을 길어 올렸다.
신현림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반지하 앨리스』에는 해가 들지 않는 공간으로 내몰리는 삶의 고단함, 그럼에도 생을 지속하는 이들을 향해 건네는 위로가 담겨있다.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를 시작으로 『세기말 블루스』, 『해질녘에 아픈 사람』, 『침대를 타고 달렸어』를 거치며 ‘당대의 제도권적 여성 담론을 뒤흔든 가장 전위적인 여성 시인’으로 손꼽혀 온 신현림. 늘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고 미적 지평을 갱신해 온 그녀의 이야기는 『반지하 앨리스』로 이어진다. 8년 만에 찾아온 이번 시집에서는 “절망을 넘는 도발적인 아름다움과 위로와 저항정신”을 보여준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활동으로 주목 받기도 한 시인은 지난 8월, 시집과 같은 제목의 사진전 ‘반지하 앨리스’를 열었다.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으로 큰 호평을 받았지만, 전시회가 끝난 뒤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후배 작가에게 사진 모티브를 도용당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 다시 한 번 절망이 찾아온 순간에 만난 신현림 시인은 여전히 의연했다. 반지하에 불시착했으나 희망을 놓지 않았던 앨리스다웠다.
반지하에 살면서 세상이 다르게 보였어요
8년 만에 나온 시집입니다.
5권중에 3권은 계속 8년 간격으로 시집이 나왔어요. 『세기말 블루스』 이후에 나온 시집들이 그렇게 됐네요. 그런데도 두 권 분량의 시가 또 있어요. (써 놓은) 시도 많고, 사진도 많아 고민이 될 때가 있어요. 이걸 언제 다 내나 싶어서.
그만큼 편집 과정도 쉽지 않으셨겠어요.
시집 제목이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제목이 두 번 바뀌어 순서도 전부 바꾸고 시 편수가 많아 힘들었죠. 줄인 것이 90편이었는데 줄이고 또 줄여서 68편이 실렸어요.
시집을 빨리 내고 싶다는 조급함은 없으셨어요?
연륜으로 조급함을 내려놓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요. 나이 듦의 장점이나 소중함, 가치라고 할까요. 청춘 자체는 조급성이 특징이에요. 삶의 최고 목표가 돈이나 명예가 아니잖아요. 목표는 인격의 성장이에요. 인격의 성숙함. 그걸 통해서 세상에 사랑을 다 주고 가는 거죠. 사랑과 물질을 나누는 사람으로 사는 일이 정말 중요한데, 그런 진정한 목적이나 가치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많다는 느낌이에요. 자본주의에 실용주의에 찌든 자신을 한발 떨어져 멈춰 서서 돌아봐야만 세상이 좋게 바뀝니다.
이번 시집의 제목을 보면, 반지하라는 공간과 앨리스로 지칭되는 인물들의 의미가 중요한 것 같아요.
반지하에는 이중적인 해석이 있어요. 반지하는 서민의 상징이면서, 제 인생의 반은 이미 지하로 갔다는 뜻이죠. 지금 청춘들도 반지하로 가고 있죠. 그래서 「반지하 앨리스」라는 시에서 진정한 소통을 그렸어요. 나와 같이 반지하로 간 세대와 (지금) 반지하로 가고 있는 세대가 차를 마시면서 관계의 진정한 소통을 꿈꾸면서 썼어요. 어떻게 보면 반지하는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는 공간이에요. 어느 학자가 이야기하길, 건물이나 집 안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인생의 94%라고 해요. 그만큼 자연과의 교감을 잃어버린 삶이죠.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사과밭 사진관』이라는 사진집에도 그 내용을 썼었어요. 내가 왜 사과밭으로 갔는지. 그리고 넷째 시집에서 애머슨의 말을 인용했는데 “인간은 우주의 광대한 힘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그 힘에 눈을 뜨면 누구나 행복해진다”는 거였죠.
앨리스의 의미는 어떤가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오신 거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해요. 다들 그런 꿈 있잖아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어린 왕자』 같은 책을 한 권 내고 싶은 꿈이요. 시대를 넘어 누구나 공감하고, 감동하는 동화적인 작품을 쓰고 싶은 거죠. 제가 쓴 동시 「초코파이 자전거」도 교과서에 실려 있는데, 딸아이를 키우면서 썼던 이 시들이 지금도 좋거든요. 『어린 왕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변하지 않는 삶의 지혜가 녹아 있고 상상력이 충만한 책이잖아요. 그래서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경우에는 앨리스가 맞닥뜨리는 황당하고, 낯설고, 기이하고, 신비로운 세계가 삶의 본질을 꿰뚫고 가는 상상력이라 깊이 공감되잖아요. 저도 반지하에 살면서 바라보는 세상은 또 다르게 보였어요. 서민들은 거주지를 통한 괴로움을 평생 겪지 않나요?
2년마다 이사 다니는 일이 쉽지만은 않죠.
거주 문제만큼 힘든 게 없지요. 하지만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지는 말아요. 가진 게 없으면 없는 대로 심플하고, 집중력이 커져요. 힘든 상황에서도 마음의 창문을 하나 만들어야 돼요. 꿈꾸고, 숨 쉬고, 마음껏 상상력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마음의 비밀 문을 만드는 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이자 비법이 아닌가 생각돼요.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라는 연작시도 실려 있어요. 제목과 달리 내용에서는 희망이 엿보이는데요. 바꿔서 이야기하면 ‘나는 자살하고 싶었다’는 뜻이기도 해요.
또 다른 시집 제목 후보였죠. 삶에 지칠 대로 지치면 자살은 많이들 생각하지 않나요? 누구나 ‘자신을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절망감’이 들 때가 있죠. 젊은 날에 저도 자살을 많이 생각했어요. 지금은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그때는 ‘자식도 없이 마흔을 맞는다는 게 무엇일까’ 싶기도 했고요. ‘이렇게 아이도 없이 살다가 가도 되나’ 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때 메모해뒀던 걸 쓴 거예요. 또 우리나라는 저출산 고령화로 제일 먼저 사라질 나라라는 뉴스가 오늘 나왔더군요. 문제의 가장 큰 뿌리는 심각한 빈부 격차, 신성함과 사람들 사이의 따스한 믿음과 연민조차 무너진 현실입니다. 그걸 뼈아프게 느낍니다.고요히 따스한 혁명이 필요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님을 살게 한 것은 무엇인가요?
자식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겠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사랑으로 돌아오는구나, 나만 알다 가면 뭐 하나’ 하는 절실한 깨달음 속에서 제가 중요시 여기는 상상력이 넘치는 창작이 있기 때문이죠.
끝까지 문학을 포기하지 않으신 이유도 있겠죠?
저는 천직이에요. 시도 그렇고 사진도 그림도 다 운명이라고 느껴요. 운명을 받아들이고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창작을 하게 되네요. 젊은 날의 초심을 앞으로도 계속 밀고 갈 거예요.
진정한 성공은 깨끗하게 이름을 남기는 것
「백 년 의왕 사람」에서 “눈보라 치는 길을 가 봐야 / 추운 사람들을 잊지 않는다”고 쓰셨어요. 삶이 편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게 된 것도 있을까요?
당연해요. 마음의 위안을 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어려워 봐야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돈만 모으고 자기만을 위해 살면 뭐해요. 그런 사람들 하나도 안 부러워요. 일부러 고난과 청빈을 택하는 삶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은 고귀해요. 가난한 자를 기억하고, 자신이 가진 물질을 나누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밥을 굶는 아이들과 미혼모, 청년세대와 노인들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나 불로소득자들은 누군가의 땀과 노동에 감사하고, 나눠야 할 책무가 반드시 있어요. 저도 청빈하게 살면서 지혜를 얻고, 배우는 삶과 사랑과 물질을 나누는 삶을 추구하고 애씁니다.
지난 8월에는 ‘반지하 앨리스’라는 이름의 사진전을 여셨어요.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두드러졌던 것 같은데요. 작가님께서 직접 머무르셨던 곳들인가요?
네. 반지하집에서 십 년을 살았고, 유랑민처럼 떠도는 인생이죠. 항상 시대적인 고민을 안고 있어요. 제 고민 중에 하나는 빈부 격차를 줄여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하고 자살을 막는 거예요. 삶의 의미나 목적을 다시 세우는 목소리를 내야 된다는 작가적 의무감이 있어요. 도처에서 신성함과 자기정체성과 양심을 잃어버리고 인간성을 상실한 모습들이 많이 보이잖아요. ‘내가 왜 인간인가’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답을 찾아 <반지하 앨리스>에 담았어요. 이번 전시회에서는 사진과 같이 그림을 선보였는데 평이 좋았어요.
전시회장을 찾은 분들의 호평이 이어졌던 것 같아요.
“역사적인 장소나 추억의 장소, 사람을 기억하는 장소에서 만나는 사과를 담아낸 ‘사과, 날다’ 등 지난 12년 동안 세상과 인간존재의 성찰을 지속적으로 펼쳐온 작가의 사과여행과도 이어지면서 또 다른 지평을 보여준다. 일상이미지에 사과작업을 더함으로써 일상과 기억 속 이미지를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전혀 엉뚱하게 이어 붙이는 그녀만의 특징도 나타나 있다”는 평이었죠.
말씀하신 ‘사과여행’과 관련해서 사진 모티브를 도용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이번 일은 예술이 모티브와 정신까지 포함하며, 작가적 양심과 기본 자존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줍니다. (도용한 사람은) 주목 받은 젊은 작가라는데, 지금까지 보여준 작가 자세는 교만하고 수준이 낮은 게 아닌가 싶어 논쟁의 가치도 없다고 봐요. 큰 담론을 가지고 시작한 제게 계속 피해와 상처를 주기에 제 페이스북에 올려봤고 큰 여론이 있었어요. 관객이 예술을 완성한다는 뒤샹의 의견처럼 여론으로 이 문제를 풀고 싶었어요. 댓글 여론을 통해 도용의혹사건의 주인공인 36세 여성작가가 해당 작업을 접고, 도의에 어긋난 태도를 반성하고, 큰 깨달음이 있길 기도합니다. 접고 사과할 때까지 저만의 기록으로 계속 남길 겁니다.
13년 동안 사과를 모티브로 작업해오셨잖아요. 도용 사실을 아신 건 언제였나요? 작업을 중단하라는 이야기를 전하셨죠?
3년 전에 들었고, 찾아보고, 충격 받고 아팠죠. 지인을 통해 ‘하필 왜 사과이고, 왜 던지느냐’는 항의를 2번이나 전했었어요. 수업시간에 ‘신현림이 사과를 가지고 작업하는데’라는 말도 나왔다는데, 리서치도 안 했는지 그 작가는 무시했어요. 리서치는 작가로서 기본입니다. 하다가라도 중단했어야 양심 있는 작가죠. 이 자체가 이미지의 모방과 도용이고, 죄의식의 실종, 도덕불감증이라 보여집니다.
두 작업 사이의 유사성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여요.
제 사과는 하나의 우주이자 생명이고 사랑이라는 컨셉인데, 장소마다 다니면서 사과 던지며 찍는 게 저와 똑같아지니, 기가 막히죠. 사과 개수로 진실을 가리려 하지만, 뻔히 모티브 도용의혹으로 관객은 본다는 겁니다. 외국에 보여주려고 준비했단 소문도 들었는데, 13년 작업한 작업을 약탈하는 것과 뭐가 다르며, 얍삽한 짓이 아닌지 묻고 싶어요. 소재는 누구나 찍을 수 있지만, 모티브의 오리지널리티는 지켜져야 합니다. 예술은 모티브에서 시작해서 정신의 영역까지 다 안고 있어요. 2007년 처음 사과작업을 보여줬을 때 이런 작업은 제가 처음이라고, 사과던지기 등 20년 넘게 꾸준히 해보시라고 어느 큐레이터 선생님은 용기를 주셨죠.
상대 작가가 사과를 하면 일이 마무리될 텐데, 쉽지 않네요.
‘도용하는 사람은 죄의식이 없어서 계속 도용한다’는 아는 디자이너 선생님 말씀이 잊히질 않네요. 왜 예술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있어요. 도의적 책임을 다하고, 예술이 정직한 노동임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세상을 선하게 바꿔가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읊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있는 분명한 이유의 하나는 도덕성을 지키는 일입니다. 모티브 도용혐의가 걸린 작업은 접어야 상식이죠. 역지사지하여 남을 아픔을 알고, 깨우치고, 새 각오로 다시 살길 기도합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작가로서 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자신의 이름을 깨끗하게 남기는 일일 겁니다.
사랑과 행복의 방법을 생각해야 돼요
『반지하 앨리스』에는 현 시대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습니다. 「쿨한 척하는 디지털 당신」, 「물음 주머니」를 보면 작가님의 눈에 비친 이곳이 어떤 모습인지 짐작하게 돼요.
정치적 적폐부터 없애려는 노력이 있어 세상에 빛이 보이기도 합니다. 나약하고 서툴고 모여 사니 부조리한 일들 투성이입니다. 빈부격차, 경쟁이 깊어질수록 버티기 힘든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꿔보려는 노력으로 한판 붙어 싸워볼 만한 세상입니다. 결국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 싸움이 드넓은 사랑으로 나아가길 꿈꿔봅니다.
‘현실을 외면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죠.
시인에게 있어서 현실에 대한 인식은 절대적이에요. 자기 안에 갇힌 언어 놀이하는 후배들을 볼 때가 있는데, 누구의 영향인지 참으로 안타까워요. 이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이 있지 않으면 앞으로의 문학도 걱정이 돼요.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지금 이 세계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문학이 왜 있는 건지요. 본질을 꿰뚫고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촛불집회, 세월호 참사에 관한 작품들도 눈에 띕니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시면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세월호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을 꺼내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우리는 거대한 죽음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어요. 바다를 보면 기쁘기보다 먼저 아픕니다. 이후 촛불혁명의 응원을 받아 대통령이 당선됐고, 시민들의 열망을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 잘 아시고, 열심히 뛰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촛불혁명을 통해서도 드러났지만 적폐가 쌓이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면 누구라도 심판을 받아야죠. 그런 변화가 지자체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10년간 국민으로서 아프고 꿈꿨던 일을 시인으로서 『반지하 앨리스』에 시대정신을 절실히 담았어요.
이번 시집에서 작가님이 꿈꾸시는 세상의 모습도 확연히 보이는 것 같아요.
‘왜 우리는 더 행복하지 못할까, 더 사랑하지 못하고 있을까, 덜 슬프지 못할까, 더 친절하게 대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에 대한 성찰과 커다란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거죠. 점점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까 우리가 너무 긴장해 있어요. 저도 긴장할 때가 많아요. 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죠. 모든 걸 놓아두고 나만이 아닌 우리 모두 더 사랑하고 행복할 방법들을 생각해야 돼요. 디테일하게 세워야죠. 그건 버킷리스트와도 통할 거예요. 내가 살아서 할 일들인 거죠. 제가 늘 생각하는 게 ‘나만 알다 죽으면 뭐 하나’라는 거예요. 나눠야죠. 물질도 나누고 사랑을 다 주고 가야죠.
시선집을 출간하실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작은 출판사를 설립하신다고요.
‘사과꽃’이라는 이름을 7~8년 전에 지었고, 참 많이 망설였어요. 남의 자본으로 2권 내 본 경험이 있어요. 어려운 때 작은 출발을 하네요. 1인 출판의 작고 야무진 구멍가게라 할까. 무조건 제 창작 우선이다 보니, 이 시대의 경쟁과 속도를 따라갈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제일 먼저 한국대표시를 재정리하는 101권의 책으로, 11월안에 1차분 출간예정입니다. 김소월의 시로 시작하여, 훌륭한 평론가 분들께 해설을 부탁해놨어요. 디자인 틀은 우리나라 최고의 북디자이너 중 한 분이 견본 초벌을 보여주신 상태예요. 내년에 또 2차분 맡을 평론가를 주변 교수와 시인들과 의논하여 정하려고요. 스테레오 타입으로 아무 비판 없이 답습하는 방식은 싫습니다. 존경하는 선배님들과 상의하고, 제대로 엄정하게 만들려 합니다. 만만치 않은 이 작업은 제 오래된 꿈이고, 겁나고 매력적인 모험이며 사명이에요. 조용히 알차고 소박하게 천천히 해볼게요.
글 | 임나리 사진 | 한정구(AM12 Studio)
신현림 저 | 민음사
“쓸쓸한 나와 같은 너를 찾아/ 슬픔에 목메며/ 슬픔의 끝장을 보려고/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처절한 고백은 삶의 고통과 아픔에 몰입하는 대신 함께 슬퍼할 사람을 찾고 그 슬픔을 견딤으로써 오히려 슬픔의 끝장을 보는 힘이 된다. [도서 상세정보]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