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유배의 이유, 강진
강진만생태공원. 짱뚱어와 농게, 칠게가 부산스럽게 누비고 다니는 모습에서 싱그러운 생명력이 느껴졌다 |
현대인에게 여행은 셀프 유배다.
스스로 자처한 유배는 자유와 사색을 준다.
강진 여행에선 그게 가능했다.
●다산처럼 먹고 마시기
우리나라에서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 하면 생각나는 지역은 남양주와 강진이다. 남양주는 다산이 태어난 곳이면서 묘소가 있는 곳이다. 남양주와 우열을 가릴 순 없겠지만, 다산의 학문 생산성을 본다면 강진 쪽이 더 큰 비중을 갖는다.
사의재 저잣거리 |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한 다산은 강진에서 무려 18년을 지냈다. 다산에겐 유배가 엄청난 불운이었지만 후대엔 행운이었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비롯해 자그마치 500여 권의 책을 강진에서 집필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정약용을 빼고 강진 여행을 이야기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1801년 유배를 온 다산은 작은 주막집에 옹색한 뒷방을 얻어 지냈다. 이 주막집의 이름이 사의재(四宜齋)다. 생각, 용모, 언어, 행동을 올바로 하는 이가 머무는 집이라는 뜻이다.
다산이 즐겨 먹었던 아욱국 |
사실 사의재 주막(동문매반가)에 온 이유는 아욱국 때문이었다. 다산은 주모가 끓여 준 아욱국을 좋아했다. ‘가을 아욱국은 사립문을 닫고 먹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맛과 영양이 뛰어난 채소다. 쌀뜨물에 멸치를 우려낸 육수에 된장과 고춧가루를 풀고 다진 마늘과 아욱을 한 움큼 넣고 푹 끓이면 아욱국이 완성된다. 간도 적당하고 뜨거운 정도도 딱 좋다. 아욱국을 후루룩 마시니 어쩐지 마음이 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다산이 즐겨 먹었던 게 아닐까. 유배의 화를 삭이느라고. 이건 순전히 내 추측이다.
막걸리를 부르는 바지락전 |
밥도둑 간재미찜 |
주막엔 한 가지 룰이 있다. 이모나 아주머니, 사장님 같은 호칭 대신 ‘주모!’라고 불러야 한다고. 살짝 취기가 돌 때 용기를 내어 “주모!”를 외치니 어쩐지 호탕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주모가 내어주는 매콤한 간재미찜과 강진만에서 잡은 바지락으로 만든 바지락전, 고소한 죽순 반찬은 막걸리와 궁합이 잘 맞았다. 남도식 묵은지는 말할 것도 없고.
여름날의 다산초당 |
다산 하면 역시 차를 빼놓을 수 없다. 얼마나 차를 사랑했는지 정약용은 스스로 ‘차가 많이 나는 산’이라는 뜻의 다산(茶山)을 호로 정했다. 주막집에서 지낼 때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지내던 다산은 외가의 도움으로 만덕산에 있는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은 싱그러운 숲길이다. 댓잎이 부딪히는 소리에 기분마저 좋아졌다. 다산초당은 저술의 산실이었다. 다산은 여기서 학생을 가르치고 글을 썼다. 만덕산엔 야생 차나무가 많았다. 다산은 차나무의 어린잎을 따서 덖고 비비고 말렸다. 계곡물을 떠서 차를 우려내어 찾아온 손님에게 대접했다. 차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유배가 끝나 남양주로 돌아가고 나서도 강진에 있는 제자들에게 차를 올려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시헌은 다산의 가장 어린 제자였는데, 후대인 이한영에 이르기까지 100년 넘게 다산의 집안에 차를 만들어 보냈다.
다산은 뒷산의 물을 끌어들여 인공연못까지 만들었다 |
수원 화성을 설계한 건축공학자이기도 한 정약용이 다산초당 한 채에만 만족했을 리 없다. 계곡을 끌어다가 다산초당 옆에 작은 연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서 작은 섬도 만들었다. 자신의 공간을 아기자기하게 꾸미면서 유배의 서러움을 이겨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코로나 시대 우리가 집안 꾸미기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산초당 인근엔 수백 년 된 나무의 뿌리가 흙 위로 뻗어 나와 엉켜있는 ‘뿌리의 길’이 있다. 얽히고설켜 서로 지탱하는 뿌리가 평범한 백성처럼 느껴져서 다산은 뿌리를 밟지 않고 지나다녔다고 한다. 초당에서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길은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지만 크게 힘들지 않아 쉬엄쉬엄 걸으며 사색하기 좋다. 초봄이면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 레드카펫을 만드는 길이다.
땅의 생명력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 강진만생태공원으로 갔다. 탐진강과 강진만이 만나 형성된 개펄에는 1,131종의 다양한 생물이 산다. 이름만 들어도 까불 것 같은 짱뚱어, 다리놀림이 재빠른 농게와 칠게가 부산스럽게 개펄을 누비고 다닌다. 갈대 군락지는 개펄 좌우로 약 661m2(20만평)나 펼쳐진다. 새하얀 고니 조형물은 겨울마다 이곳을 찾는 천연기념물 큰고니를 형상화한 것이다. 새들도 겨울이면 강진으로 ‘머무는 여행’을 온다.
보드라운 바람이 부는 강진만엔 작은 섬 8개가 흩어져 있다.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가우도는 출렁다리로 연결되어 접근성이 좋아졌다. 7개의 무인도 중에서 죽도에 들어가 봤다. 코로나 이전엔 카약 투어 등의 방법으로 죽도에 들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마을 어촌계를 통해 작은 배를 예약하면 오갈 수 있다. 섬 꼭대기에 올라가서 강진만의 시원한 풍경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후박나무숲이 너무나 울창해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해안만 휘휘 둘러보았다. 코로나 이전처럼 갯벌에서 바지락과 쏙을 잡아 보는 체험을 하고 싶었는데…, 늘 뭔가가 아쉬운 시기다.
백운동 원림 왕대나무숲 |
●선비들의 까르페디엠
월출산으로 향했다. 월출산은 북쪽의 영암군과 남쪽의 강진군을 나눈다. 영암 쪽에서 보면 기묘한 바위산이고, 강진에서 보면 숲이 울창한 흙산이다. 월출산은 남도의 비옥한 평야 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서 높이가 809m밖에 안 되는데도 유난히 도드라진다.
천년간 홀로 폐사지를 지켜 온 석탑 |
범상치 않은 산세 때문에 사찰도 많이 들어섰다. 월남사지는 월출산을 병풍으로 삼아 고려시대 창건된 월남사의 터다. 새파란 대지엔 삼층석탑만 덩그러니 서 있다. 황량한 폐사지에선 상상력을 동원하면 융성했던 과거가 그려진다. 잃어버린 절을 복원하고 융성했던 불교문화와 불타 버린 역사를 소환해 보았다. 폐사지를 묵묵히 지키고 서 있는 석탑만이 쇠락해 가던 모습을 아련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월남사지 주변엔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름이 월남이다. 월남에서 가까운 곳엔 숨은 계곡인 경포대가 있다. 강진 경포대(鏡布臺)는 2km에 걸친 계곡이 무명베를 펼친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강릉의 경포대(鏡浦臺)와 한자가 다르다. 내비게이션에 경포대를 치고 무작정 달리다 보면 뜬금없이 동해안으로 갈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백운동 계곡, 한여름에도 손이 시릴 정도로 차다 |
다산이 반한 곳이 한 곳 더 있다.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백운동(白雲洞). 백운동에 다녀온 다산은 그림 같은 풍경에 반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백운첩을 완성했다. 영원히 잊힐 뻔했던 백운동원림과 별서(別墅)정원은 다산의 백운첩 덕분에 복원될 수 있었다. 별서 정원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구불구불하고 좁은 물길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긴 조선의 선비들. 은거하면서도 오늘 하루를 멋지게 살아낸 선비들이야말로 ‘까르페디엠(Carpe diem)’ 정신을 실천한 욜로족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든 백운옥판차 포장지. 한반도를 꽃으로 새겼다 |
선비들의 운치라면 차를 빼놓을 수 없다. 월출산의 남쪽 월남마을엔 너른 차밭이 있고 근처에 ‘백운옥판차 이야기’라는 찻집이 있다. 다산의 제다법을 그대로 전수받아 운영하는 곳이다. 주인장은 이렇게 말한다. “일제강점기에 잠깐 일본차로 둔갑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 차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백운옥판차라는 한국 최초의 차 상표를 만들었습니다. 독립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한반도 문양의 꽃문양을 넣었습니다.” 백운옥판차가 만들어진 1920년대는 일본의 물품들이 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시대였지만 한편으론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도 벌어졌던 때다.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우리 차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마시면 차 맛이 달리 느껴진다.
하멜이 갇혀 노역했던 전라병영성 |
●호모 비아토르를 위한 유배
강진과 관련이 깊은 사람 중엔 하멜이 있다. 네덜란드인인 하멜은 동인도회사의 직원으로 나가사키로 항해하다 제주도에 표류하게 되었다. 하멜과 일행은 효종을 알현하면서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애원했지만 거절당하고, 강진 병영면 전라병영성에 갇혔다. 외국인 최초의 유배였다.
전라병영성은 조선시대 전라도 육군의 총지휘부였다. 초대 병마절도사(지금으로 치면 육군 사령관)인 마천목의 꿈에 나타난 눈자국을 따라 성을 축조하였기에 전라병영성을 ‘설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압송된 하멜은 8년 동안 허드렛일을 하며 병영면의 초가집에서 살았다. 이 초가가 있는 병영면 마을의 담장이 독특하다. 납작한 돌을 빗살 무늬로 쌓아 올려 이른바 ‘하멜식 담장‘을 보여 준다. 담장은 꽤 높은데, 아무래도 키가 큰 네덜란드인이 짓다 보니 이렇게 높은 담장이 형성됐으리라 추측된다.
병영면 마을의 담장은 빗살무늬가 특징이다. 게다가 유난히 높다 |
시대를 건너뛴 여담으로, 예전에는 넥센 히어로즈(키움 히어로즈의 전신)의 2군 구장이 강진에 있었다(지금은 화성으로 옮겼다). 선수들은 2군으로 내려가게 되면 ‘강진으로 유배 간다’라고 자조했단다. 서울에서 먼 데다 산과 바다로 고립되어서 훈련 말고는 할 게 없어서였다고.
현대인에게 여행은 셀프 유배다. 무릇 우리는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니까 말이다.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면서 선비처럼 오늘 하루 재미있게 살아 보는 것. 가능할까? 강진군은 대안을 내놓고 있다.
강진군은 6박 7일 동안 강진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농가체험프로그램인 푸소(FU-SO: Feeling-Up, Stress-Off)를 운영한다. 농가에 머물면서 숲을 거닐고, 강진에서 난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고, 흙의 촉감을 느끼며 청자도 빚어 보면서 여행의 멋과 맛을 ‘천천히’ 알아 가라는 의도다. 짧은 시간에 많은 걸 해보라는 여행은 아니다. 복잡한 도시 속에서 온갖 중독과 빠른 템포에 찌들고 닳고 닳았던 마음 한구석을 강진에서 치유해 보자. 이런 여행은 강력한 진통제 같은 효과는 없더라도 서서히 효과를 발휘할 거라고 생각한다.
회춘탕 |
▶회춘은 아무나 하나, 회춘탕
바다(海)를 뜻하는 해산물과 하늘(天)을 뜻하는 닭(새)고기가 들어갔다고 해서 해천탕이라고 하는 이 음식을, 강진에서만큼은 회춘탕이라고 부른다. 마량에서 많이 잡히는 전복과 문어, 15호는 될 법한 큰 토종닭과 인삼, 은행이 가득 들어간다. 육수는 엄나무, 느릅나무, 당귀, 가시오가피 등 열 가지가 넘는 한약재를 우려 내어 회춘의 의미를 더한다. 다 먹고 나면 남은 육수에 찹쌀밥과 녹두밥을 넣어 죽을 만들어 먹는데 이게 또 별미다. 죽이 약간 심심하다 싶으면 토하젓을 조금 얹어 먹는다. 하천 오염으로 민물새우가 별로 없어 지금은 더 귀한 음식이 되었다. 12만원인 회춘탕은 성인 다섯 명이 둘러앉아 먹으면 적당하다. 그런데 음식이 좋으니 술이 자꾸 당겨서 결과적으로 회춘은 멀어졌다.
▶젓가락을 위한 자리는 없다, 돼지불고기
병영면에 가면 돼지불고기 거리가 조성돼 있다. 그중에서 설성식당은 돼지불고기 한정식으로 유명한 곳이다. 새마을금고 달력만 덩그러니 걸려 있는 방에서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아 있으면 직원 둘이 상을 들고 들어온다. 홍어, 편육, 조기구이를 비롯해 반찬이 십수 가지이고 결국 자리가 모자라 2층으로 쌓아 준다. 젓가락 놓을 공간도 없을 정도로 모든 음식이 빽빽하게 올려져 있다. 이 중에서도 주인공은 따로 있다. 연탄불에 재빠르게 볶은 돼지불고기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적당한 매운맛’과 ‘불향’이 잘 조화돼 있어서 젓가락이 자주 간다. 한정식의 1인분 가격은 고작 1만원. 푸짐한 밥상 앞에선 뾰족했던 마음도 누그러지는 것 같다.
글·사진 김진 에디터 천소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