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에 맛이 앞서는 도시, 전주
누구나 전주를 떠올리자면 입맛을 다신다. 예스럽고 고즈넉한 멋의 가장 한국적 도시지만, 멋에 맛이 앞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보니 그렇다. ‘나만 그런가?’ 하겠지만 결국 가장 직접적인 자극은 시청각보다는 미각이다. 한국의 맛이라면, 역시 전주를 제일로 꼽는 것이 상식에 가깝다.
전주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간직한 곳이다. 여기서 한식의 전통적인 미식여행이 시작된다 |
●곡선 처방
10여 년 전, 전라선 KTX가 개통됐다. 그쯤부터 수도권에서 전주로 여행을 하기가 쉬워졌다. 전주 교동, 풍남동 한옥마을이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전국에 한옥들이 모여 있는 곳은 많지만, 규모도 크고 무엇보다 전주라는 전통 도시의 매력 덕분에 여행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와 처마가 이리저리 이어진 곡선 아래 숨어 있는 골목이 전주 한옥마을의 매력 포인트다. 이리저리 돌다 갑자기 끊기는 막다른 골목이다. 요즘 사방격자 도시 아파트 단지에 익숙한 세대가 이 ‘불편한’ 마을을 찾는다.
경기전을 끼고 전주향교, 한벽당, 전동성당을 품은 이 평평하고 너른 마을을 오목대와 이목대가 둘러쌌다. 그 간극을 백년 고택들이 채우고 있다. 실핏줄 같은 골목이 이를 연결하니 비로소 마을 자체가 숨을 쉰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곡선미를 자랑하는 한옥 지붕 아래서 대대로 살아온 우리에겐 정말 숨통이 트이는 ‘곡선 처방’이다. 수직 스트레스에 대한 백신 같은 곡선을 눈으로 받아 마음에 항체를 형성한다.
‘전주에서의 밥 걱정’이야말로 재벌이나 연예인 걱정하는 것만큼 부질없다. 그렇다고 맛있는 것을 꼽으라면 난감해진다. 곰곰이 따져 봐야 한다.
●이러나 저라나 전주
본격적인 전주 먹방여행의 출발이다. 동문 사거리에서 출발해 한옥마을에 들어서면 길은 좁아지고 위장은 넓어진다. 칼국수, 도넛, 회오리감자, 지팡이 아이스크림, 비빔밥 크로켓(고로게) 등 주전부리가 널려 있다. 초여름을 맞아 졸졸 흐르는 전주천 개울 옆에는 ‘한벽루’가 있다. 평상에 올라타 칼칼한 ‘오모가리’를 앞에 두고 소주를 마시는 이들로 가득하다. 오모가리는 원래 뚝배기란 뜻의 전주 방언인데 민물고기 매운탕으로 통한다. 도심 한복판에 개천변 평상 술판이라니. 한상 차려 걸터앉아만 있어도 절로 흥이 난다. 어둑해질 무렵. 어느새 나도 우리가 됐다.
전주 천변의 오모가리탕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다 |
한벽루는 50년째 한옥마을 전주천변에서 오모가리탕을 줄곧 해온 노포다. 화려한 상차림에 더불어 각종 민물고기 매운탕과 민물새우탕을 끓여 내온다. 부드러운 시래기도 넉넉히 들었고 따로 밑국물을 잡아 국물의 풍미가 좋다. 서늘한 강바람 불어오는 평상에 앉아 매콤시원한 탕 한 그릇에 식사를 겸해 한 잔 걸치기 딱 좋다.
전주의 명물 콩나물국밥 |
세계적 명성의 전주 비빔밥 |
한정식, 비빔밥은 물론이며, 콩나물국밥(운암콩나물국밥), 피순대(조점례피순대) 등 전주를 대표하는 메뉴부터, 칼국수와 콩국수(베테랑분식)에 물짜장(영흥관), 석갈비(교동석갈비) 등 단품 메뉴도 한가득이다. 삼천동, 평화동, 서신동, 효자동 등에는 전주식 막걸릿집들이 몰려 있다.
전주의 밤을 밝히는 전주 막걸릿집 |
서신동 ‘옛촌막걸리’는 내공이 보통 아니다. 바깥에 어디 방송프로에 소개된 집이라 붙여 놓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집은 뉴욕타임스, NHK, 중국CCTV 등에 나온 집이다. 체험 상차림을 고를 수 있어 막걸리를 많이 마시지 않아도 음식을 착착 내온다. 고기나 생선, 해물, 반찬 등을 상이 떡 벌어지게 차린다. 삼천동 막걸리 골목 ‘다정집’은 그날 장을 봐온 찬거리로 맛있는 안주를 내는 집이다. 관광객보다 시민들이 즐겨 찾는다.
거한 상차림이 싫다면 존득한 족발 맛집도 있다. 효자동 ‘권씨네족발’은 전주 족발 맛집으로 소문난 집. 국내산 생족을 특제 간장에 부들부들 삶아 내 족발 특유의 야들한 식감을 최대한 끌어낸 맛으로 유명하다. 취향에 따라 앞다리와 뒷다리를 고를 수 있으며 집에서 담은 깻잎지에 싸 먹으면 궁합이 좋다. 커다란 족발에 비빔막국수와 신동진흑미주먹밥을 곁들인 파티메뉴도 있어 숙소에 가져가서 먹기에도 딱이다.
‘영흥관’은 50년째 영업해 온 중식 노포. 전주 명물인 물짜장을 잘하는 집. 물짜장은 춘장을 쓰지 않고 각종 해물과 채소를 전분소스로 볶아 낸 면이다. 그래서 ‘쉐지아쟝(水炸醬)’이다. 매콤한 소스에 손반죽으로 더욱 쫄깃한 면을 비벼 먹으면 전주여행의 즐거움이 더하다. 바삭하게 튀겨 낸 두툼한 고기튀김에 달큼한 소스를 끼얹은 탕수육을 곁들이면 더욱 좋다.
한옥마을은 풍남문 남부시장과 이어지고 또 객사길로도 이어진다. 전주 원도심 중앙 객사길은 상권이 밀집한 곳이다. 요즘은 카페와 식당이 그득한 ‘객리단길’로 불리며 한옥마을과는 또 다른 매력을 풍긴다. 전주국제영화제 거리로부터 이리저리 이어진 길에는 눈여겨 찾아볼 곳이 꽤 많다. 서울 명동처럼 이름난 국수와 보리밥을 파는 집, 메밀국수로 소문난 집, 갈빗집 등 수십 년을 이어 온 노포들이 여전히 건재하고 바리스타와 소믈리에가 차린 트렌디한 커피숍과 와인 레스토랑 등이 생겨나 공존하고 있다. 이러나 저러나 전주다. 맛이야 두 번 말해 무얼 할까. 한옥마을 고택에 누워 배를 두드리며, 이른 풀벌레 소리에 잠을 청하면 그것이야말로 행복의 포만이 아닌가.
여름으로 넘어가는 한옥마을, 오목대에서 한눈에 담을 수 있다 |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트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