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송원근
동화 같은 사랑
진 웹스터의 명작 소설 <키다리 아저씨>가 무대에 올랐다. 소박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클래식한 작품은 감성을 건드리며 여심을 훔치는 중이다. 특히나 184cm의 큰 키의 송원근은 키다리 아저씨의 비주얼로 딱 들어맞는 캐스팅이자, 가슴 설레는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호평을 얻었다. 그가 말한 동화 같은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아름다운 동화
<키다리 아저씨>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쓰릴 미>를 통해 2인극에 호감이 생겼을 때, 남자와 여자의 2인극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어요. 개인적으로 공부가 되지 않을까 싶었죠. 제루샤의 말로 인해 그의 감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제르비스가 감정을 잘 표현해 줘야만 해요. 이런 점에서 상대방의 호흡과 밀도를 느낄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사실 <키다리 아저씨>의 대본만 읽었을 땐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데 상당히 서정적이었고, 여주인공 제루샤의 발랄함 그리고 제르비스의 젠틀함이 매력적이었죠. 뮤지컬 넘버도 좋았고요.
그동안의 출연작과 비교했을 때, <키다리 아저씨>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사소한 이야기가 즐겁지만 슬프게 다가와요. <키다리 아저씨>는 정말 유명한 이야기잖아요. 뮤지컬은 소설보다 볼 것과 느낄 것이 많아졌어요. 대본을 읽으면서 ‘이렇게 찡한 이야기였어? 이렇게 유쾌하고 발랄한 작품이었어?’ 하고 혼자 놀라기도 했어요. 반전이 있다고나 할까요. 요즘엔 마음을 보듬어 주는 작품이 많지 않잖아요. 그래서 <키다리 아저씨>는 상당히 신선해요.
신성록, 강동호 배우와 다른 본인의 제르비스가 지닌 매력은 뭐예요?
우선 처음으로 남자 배우 중에 키가 제일 작아요. (웃음) 제가 봤을 땐 성록이나 동호가 제목처럼 키가 크다면, 전 자꾸만 작아지는 느낌이 들어요. 하하하. 성록이는 장난스러운 만화 캐릭터에 가깝고 동호는 순수 청년이에요. 그런데 저는 상당히 사무적인 제르비스죠. 사실 저는 <키다리 아저씨>의 첫 등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첫 등장에서는 등을 돌린 채 책상에 앉아 무엇을 써 내려가죠. 사무적인 제르비스가 제루샤의 편지로 인해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첫 등장에서 제르비스는 완전히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요.
이유는 단 하나에요. 제루샤가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를 궁금해하면서 엉뚱한 편지를 보내요. 제르비스는 그 편지를 읽으면서 ‘나 늙었대(She Thinks I'm Old)’라는 넘버를 부르며 처음으로 관객을 향해 얼굴을 보여주죠. 사실 캐스팅보드를 통해 오늘의 제르비스가 송원근이라는 건 알지만, 키다리 아저씨가 사실은 젊은 남자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충분히 재미있는 요소이지만 유치하거든요. 이런 공연의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싶었어요.
<키다리 아저씨>는 제루샤의 편지로 이야기가 진행되잖아요. 그래서 제르비스가 제루샤의 호흡에 맞추는 것이 중요했을 듯싶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거저 먹는 것 같아요. 사실 제르비스는 제루샤의 감정을 받고 표현하니까요. 소설은 제루샤의 편지로만 쓰여 있지만 뮤지컬은 제르비스의 감정선도 중간중간 잘 심어놨죠. 제르비스가 제루샤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제르비스가 제루샤의 어떤 모습 때문에 마음을 열고, 언제부터 여자로 느끼면서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름다운 동화가 됐다고 생각해요.
사랑의 중첩
제르비스가 제루샤와 인연을 맺은 후 느꼈을 가장 두드러진 감정은 무엇일까요?
폭발적으로 한 감정이 ‘확’ 터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쌓여가는 것 같아요. 제루샤가 편지 끝에 쓴 ‘사랑을 보내며’라는 말을 읽고 묘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나, 그녀가 아프다는 편지를 받았을 때 그리고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를 알기 위해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부분까지. 제루샤의 편지는 제르비스의 마음을 야금야금 긁죠. 마치 빡빡했던 무언가가 조금씩 헐거워지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편한 유대감이 생기고 이후에는 사랑으로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제루샤와 제르비스가 친해지는 과정에서 제르비스가 ‘연애를 글로 배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르비스가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상당히 유치한 말로 고백해요. 고백이라곤 한 번도 안 해본 어린아이처럼. 멋있게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제르비스는 귀족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답답하게 살았을 거에요. 사랑도, 고백도 많이 해본 사람이 아니죠. 그래서 서툴러야만 했어요. 사랑에 서툴고 매사 진지하게 살아온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사랑을 느끼면 어린아이처럼 천진해지고 장난스러워지잖아요.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어설프고 어색하고 마음처럼 안 되니까요. 제르비스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이니까 상당히 재미있더라고요.
제루샤의 편지 중에서 가장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편지는 뭔가요?
제루샤가 락 윌로우라는 곳에서 생활하면서 보내준 편지요.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보내라는 강요였지만 제루샤는 가족에게 이야기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써서 보내잖아요. 제르비스가 방학이 되어 갈 곳이 없는 제루샤에게 락 윌로우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했을 땐 제르비스의 마음이 어느 정도 열렸다고 생각했어요. 그 상태에서 그녀의 허당스러움이 가득한 편지를 읽었을 땐 너무 귀여운 거예요.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다 알다니! 마치 여자친구가 오늘은 뭘 했는지 하나하나 알려주는 느낌인 거죠. 이런 이야기들이 적혀 있는 편지를 읽으면서 ‘사랑에 빠질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결국 제르비스는 편지로 제루샤를 향한 사랑을 자각하게 되는 거네요.
사실 제르비스의 모습으로 직접 제루샤를 만났을 때 마음을 많이 열어요. 편지로 만난 제루샤를 실제로 만났을 땐 느낌이 너무 다른 거죠.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시간을 보내니 이성으로 끌렸다고 생각했어요. 제르비스는 첫 만남 이후에도 ‘나는 후원자야’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지만 그녀를 향한 호감은 계속 커지죠. 사실 사랑을 느끼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키다리 아저씨>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상상도 못한 사랑이죠. 제르비스는 일부러 계획하지 않았지만 제루샤를 만나러 가요. 또 좋아하지 않는 조카 줄리아를 핑계로 제루샤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죠. 엇갈릴 수 있는 상황에서는 혼자 속앓이도 해요. 정말 상상할 수 없었는데 사랑이 찾아온 거에요. 운명이 아니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글 박보라, 사진 김호근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5호 2016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