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 버킷리스트_부여
누구나 부여에서는 주인공이 된다
백제의 흥망성쇠가 깃든 부여에서의 한 걸음이 황홀하다. 백마강의 억새길, 삶과 죽음의 경계인 나성에 오르면 백제의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부여 백마강억새길 |
아름다운 때에 이르러 전설처럼 사라진 백제… 황혼처럼 물든 부여 백마강의 억새가 그처럼 찬란하다
(좌)부소산성의 낙화암, (우)백마강 너머 부여 대재각 |
“구드래나루터에서 황포돛배 타고 모두가 가슴에 담는 것이 낙화암, 때도 모른 채 떨어진 꽃잎 때문이라고”
궁남지의 주경과 야경 |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과 흙탕물 속에서 잠자던 향로에 백제인이 염원하고 이루고자 한 극치가 새겨져 있다”
매 순간의 주인공을 품어주는 부여
우리의 삶은 한 편의 영화, 주인공은 틀림없는 나. 그러나 주인공도 그 주변의 인물도 이 삶이 희극인지 비극인지는 내내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삶은 그렇게 두 갈래로 처음부터 결정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주인공은 ‘너’라는 말을 무수히 들었다. 그런데 아니다.
부여에서 나는 번번이 누군가의 들러리가 되었고 그 시간을 피할 수 없었다. 부여의 곳곳이 너무도 아름다워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다. 덕분에 나는 그의 시간에 조연이 되었고, 이름 없는 엑스트라로 스쳐갔다. 그래도 내 삶은 온전 하다. 어느 날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질 존재라는 그 지극하고 당연한 이치를 받아들였다. 깨달은 그 순간에는 삶이 허무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스쳐가는 조연, 엑스트라, 그 무수한 타인이 이 세상의 애잔한 주인공으로 다가왔다. 어디 사람뿐인가. 바람의 한숨, 포슬포슬한 흙, 도시의 비둘기, 짓궂은 냄새를 퍼뜨리는 아름다운 은행나무가 사람보다 못할 리 없는 주인공이다.
부여 임천 가림성 느티나무, ‘성흥산 사랑나무’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
백제의 흥망성쇠가 깃든 부여에서 나는 그렇게 유한하고 무한한 삶의 속성을 다시금 절절히 읽었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사비성)로서 성왕 16년(538)에 웅진(현 공주)에서 천도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도시’라는 슬로건 없이도 아름답고 신비로운 백제 문화가 발길 닿는 데마다 드러난다. 걷는 길마다 너무도 황송하여 하루 갖고는 부족한 여행길. 맨 마지막 목적지가 되어준 것은 인생사진을 남길 수 있다는 성흥산 사랑나무였다. 이른 아침부터 채비를 했건만 사랑나무를 찾은 것은 기자만이 아니었다. 한 걸음 차이로 사랑나무에 도착한 다음 사람은 몇 십 분을 사랑나무에 매달려 기념사 진을 촬영했다. 사랑나무의 원래 이름은 무엇일까? 누가 이 나무를 사랑나무라 했는가? 사랑나무의 수령은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두 팔을 힘껏 펼쳐도 담을 수 없는 나무의 둘레는 얼마큼일까? 주먹을 꽉 쥔 남자의 힘줄처럼 사랑나무의 굵은 뿌리가 땅 위에 도드라져 있다. 그 위에 서서 두 팔로 하트를 그리는 사람은 지금 인생의 주인공이다. 나는 멀찌감치 서서 사랑나무를 한번 안아보고 싶은 마음을 누른다.
사랑나무가 자리한 성흥산 정상부에는 백제의 사비 천도 이전인 501년에 쌓은 가림성(사적 제4호)이 남아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백제시대 성곽 중 쌓은 시기가 가장 확실하여 백제 산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지표가 되는 곳이다. 산성을 발아래 두고 아름드리나무 사이에 서서 부여를 한눈에 담는다. 성흥산의 가림성, 사랑나무가 된 가림성 느티나무의 이름을 읊조려본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매순간의 주인공 들을 품어주는 부여 속으로 파고든다.
보물을 찾으러 떠난 부여 여행길
국립부여박물관의 백제금동대향로 |
계획하지는 않았으나 이제 와 돌아보니 부여에서는 결국 ‘보물’을 찾기 위한 여행을 했던 것 같다. 길마다 보물로 향하는 힌트가 떨어져 있고, 하나씩 담다 보면 결국 보물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눈을 밝게 뜨고, 두 다리 힘차게 이곳저곳을 누빌 수밖에 없다. 숨이 턱 막히는 첫 번째 보물을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만났다. 여느 유물들 사이에서도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그것을 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옮긴다. 아, 드디어! ‘백제금동대향로’가 눈앞에 나타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데 감히 그런 말조차 꺼낼 수 없을 만큼 숨 막히게 아름답다.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백제’ 라는 수식어를 얼마나 많이 갖다 썼는가. 왜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는지 눈앞에 보물을 마주하니 이해가 간다.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능산리사지 일대의 모습 |
어쩌면 이러한 감동은 박물관에 오기 전 ‘백제왕릉원’을 먼저 들른 덕일 수도 있다.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나성 등 4개 지구는 백제역사유적지 구에 포함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중 능산리고분군 일대를 백제왕릉원으로 칭하며 이곳에서 능산리사지, 나성 또한 만날 수 있다. 능산리고분군은 해발 121m의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 중턱에 자리하며 모두 7기의 백제시대 무덤이 분포되어 있다. 그 너머에는 백제 위덕왕 14년 (567)에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된 사찰, 능산리사지가 자리한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의 금당, 서쪽 방에서는 온돌시설이 발견되었고 배수로에서 백제시대의 목간,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능산리사지석조사리감, 그리고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 향로의 발견 당시 모습을 고분군 내의 아트뮤지엄에서 사진 이미지로 보았다. 흙탕물 속에서 잠자던 향로가 깨어났다. 그 안에는 백제인이 염원한 세상, 이루고자 한 극치가 백제금동대향로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향로 꼭대기에는 봉황이 앉았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악사, 불사의 신선, 날개 달린 물고기 등 상상의 동식물이 신비로운 세계 속에 살아 있다.
사비성(현 부여)을 수호하기 위해 쌓은 나성을 걷는다 |
거대한 절터, 능산리사지를 더욱 가까이 보기 위해 나성에 올랐다. 수도 사비성을 수호하기 위해 쌓은 나성은 둘레 8km의 외곽성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단위유산 중 하나로서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출현한 도시 외곽성의 가장 이른 예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나성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능산리고분군 |
방어시설이자 도시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외곽성으로서 나성. 한편으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로 나성을 보는 시선도 흥미롭다. 나성을 경계로 죽은 왕들의 무덤인 능산리고분군과 왕들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왕실 사찰을 건립하여 선왕을 추모한 것이다. 백제의 비상한 재능은 예술로 발현되어 주변 국에 아낌없이 전파되었으니 그 넉넉함과 너그러움은 일찍이 삶과 죽음에 대한 이치를 깨달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곁에 생생히 존재하는 백제의 시간
부소산성 삼충사. 성충·흥수·계백 세 명의 충신을 모신 사당 |
부소산성에 오르기 전 관광안내센터에 들러 지도를 하나 챙긴다. 낙화암 정상의 백화정까지는 20~30분 정도 소요된 다는 말도 챙겨듣는다. 백마강의 절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부소산성은 백제 사비기 왕궁의 배후산성, 즉 산을 뒤로하고 축조된 성이다. 부소산성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로 당시에는 사비성이라 불렀다.
백제 때에는 부여 일대의 평야를 ‘사비원’, 금강을 ‘사비하’라 고도 했다. 부여 시내를 관통하는 금강은 백마강으로도 익숙하다. 부소산성 정상부에 오르면 백마강의 절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전설이 흐르는 낙화암은 부소산성 정상부에 자리한다. 백제가 멸망하며 당대의 후궁과 궁녀들이 몸을 던져 자결한 곳으로 <삼국유사>에는 ‘타사암’으로 기록되었으며, 후대에 이르러 ‘삼천’이라는 문학적 표현을 빌려 백제의 멸망을 은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부소산성 낙화암, 바위 위의 백화정은 백제 여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
부소산 정상은 해발 106m로 가볍게 걷기 좋지만 낙화암을 비롯해 백마강 절벽에 자리한 고란사, 부소산 제일 꼭대기에 위치한 사자루, 성충·흥수·계백 세 명의 충신을 모신 사당 삼충사 등 들러볼 곳이 많다. 오직 낙화암, 백화정만 헤아리며 산성을 올랐던 기자는 부소산성에서만 만 보가 훌쩍 넘는 걸음을 걸었다.
백마강가 절벽에는 고란사라는 작은 절이 깃들어 있으니, 낙화암에서 죽은 여인들을 추모하고자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란사 바로 아래로는 구드래나루터 선착장이다. 그 시절 왕족처럼 풍류를 즐겨볼 시간이다. 선착장에서 황포돛배를 타고 백마강을 흐른다.
지금 우리 곁에 없지만 생생히 존재하는 백제의 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바람 한숨에 너울대는 백마강의 코스모스와 태양빛을 닮은 억새의 출렁임을 배경으로 지금 우리는 부여에서 삶의 명장면을 찍고 있다.
AROUND · 부여
먹는 연꽃 주문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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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 어귀에 자리한 ‘백제향’에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는 예쁜 연꽃차와 흔하지 않아 더욱 멋스러운 연꽃빵을 만날 수 있다. 새벽 꽃망울이 터지기 전의 연꽃으로 만드는 차는 한폭의 그림이다. 커다랗고 둥근 그릇 속에서 환히 피어난 연꽃차는 세 명이 먹어도 충분한 양. 은은한 향기가 입 안에 감돌고, 특허까지 받은 연꽃빵과 같이 먹으니 적당한 단맛과 함께 기분까지 업된다. 백제향에서 직접 재배하는 생연꽃과 연꽃액상차를 넣어 만든 연꽃빵은 부여를 기억하기에도 그만인 선물 되겠다.
백제향
- 위치 : 충남 부여군 부여읍 사비로30번길 17
- 전화 : 041-836-8729
현지인도 외지인도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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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상을 휩쓴 부여 대표 맛집이다. 메뉴에 돌쌈밥, 그냥 쌈밥이 있는데 돌솥 밥을 먹고 싶으면 ‘돌쌈밥’으로 표시된 음식을 주문하면 된다. 부여 관광명소가 대부분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지만 단일 규모가 엄청나서 한 군데를 돌아보 더라도 꽤 많이 걸어야 한다. 그러다 끼니때를 놓쳤다면 ‘구드래돌쌈밥’을 찾자. 싱싱하고 깨끗한 각종 채소에 구수한 돌솥밥, 기호에 따라 불고기, 주물럭, 편육 등으로 맛있고 든든한 한 끼를 채운다.
구드래돌쌈밥
- 위치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나루터로 31
- 전화 : 041-836-9259
궁남지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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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를 대표하는 관광명소들은 시내에 밀집해 있다. 그중 궁남지는 주경은 물론 야경 명소로도 으뜸이라 늘 많은 사람이 찾는다. 주변으로는 가볼 만한 카페도 많으니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기에도 좋다. ‘at267’은 잘 가꿔진 야외 정원과 함께 궁남지의 풍경을 카페 안에서도 볼 수 있다. 과일 듬뿍 넣은 상그리아를 홀짝이며 내년에는 연꽃으로 만발한 궁남지를 보러 오리라 다짐해본다.
at267
- 위치 : 충남 부여군 부여읍 서동로 56
- 전화 : 041-835-0267
글 정상미 사진 이효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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