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주지 않고는, 전북 완주
만경강, 살얼음 위를 총총 걸으며 강물을 마시던 작은 새들, 장막을 펼치듯 날아오르던 신천습지의 큰기러기들, 만경강 철교의 낙조, 한옥과 어우러지던 디지털 아트의 색감, 마음을 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완주 풍경.
만경강의 허파로 불리는 신천습지는 회포대교에서 하리교까지 2.4km에 걸쳐 형성됐다 |
“어제와 오늘은 다르지 않지만 작년과 올해는 아침부터 달라서 기도를 더 오래 해야 했다”라는 시 구절*이 있다. 시간은 흐르는 거라서 어제와 오늘은 다를 텐데도 시인은 다르지 않다고 했다. 오늘과 비슷한 어제가 지났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데 2023년이 된 지 벌써 석 달 차라고 하면 뒤통수를 누가 살짝 때린 것 같다. 어이쿠.
만경강의 시작을 기억해
나는 흐르는 강물 앞에 서 있다. 오래전 읽은 시 구절이 불현듯 만경강 앞에서 생각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작년과 올해가 다르지 않다면 그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작은 샘에서 시작된 만경강이 다른 물줄기와 만나지 않는다면? 갑자기 크고 좁아지는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강은 철새를 품지 못하고, 바다라는 새 이름도 얻지 못할 것이다. 끊임없이 ‘흐름’은 강의 기도일 것이다. 인간의 기도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만경강이 살얼음을 깨며 나아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4개의 천이 만나 사수강
만경강의 본래 이름은 ‘사수강(泗水江)’이다. 크게 4개의 천(전주천·삼례천·고산천·익산천)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강을 뜻한다.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늘날의 이름이 되었으니 만경의 경(頃)은 ‘백 이랑’, 즉 만경강은 백만 이랑을 지닌 풍요로운 강을 의미한다. 백만 이랑에서 빼앗은 쌀은 도대체 얼마의 양일까? 두 글자의 이름에서 가늠조차 되지 않는 일제의 야욕이 드러난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 후손들은 지난 역사를 잘 기억해야 한다. 만경강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 잘 기억하고, 강이 강으로서 흐를 수 있게 인간은 그의 할 일이 있겠지. 그래서 자분자분 만경강의 이야기를 들으러 걸어보기로 했다. 강의 기도가 시작되는 첫 번째 공간, 발원샘(밤샘)이다.
동상면 사봉리에 위치한 만경강 발원지, 밤샘 |
샘물에서 강으로
스마트폰에서 지도 앱을 확대하고 확대하면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실핏줄 같은 강줄기가 보인다. 아니, 강줄기가 되기 전의 샘물이다. 이곳을 찾아가려면 내비게이션에 ‘밤샘교’를 입력하면 된다. 동상면 사봉리에 위치한 밤샘교에서 밤샘까지는 1.5km, 만경강 발원지로 잘 알려진 터라 중간중간 이정표도 잘 세워져 찾기 어렵지 않다. 편백나무, 때죽나무, 졸참나무가 우거진 숲 안쪽에 반가운 밤샘이 보인다.
길이 80.86km, 유역면적 1504.35㎢로 호남평야를 적시는, 완주-전주-익산-김제-군산을 거쳐 서해가 되는 만경강이 이곳에서 시작된다니. 수북이 쌓인 낙엽을 적시며 나아가는 물줄기는 첫걸음을 뗀 아기처럼 경이롭기만 하다. 무수한 삶을 일구고, 무수한 추억의 배경이 되는 만경강은 밤샘을 발원지로 동상·대아저수지와 합류해 고산면으로 큰 줄기를 이루며 뻗어 나간다.
만경강 상류의 세심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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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강과 대숲이 우거진 풍경
오성교 아래 만경강이 기다란 제방에서 쉬어가는 모양새다. 대나무 숲이 우거진 세심정 아래에는 자라 바위, 또는 거북 바위로 불리는 큰 바위가 강 위에 우뚝 솟아 있다. ‘만죽선생서공 유허비’로 비석 아래에도 ‘세심정(洗心亭)’ 세 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만죽 서익 선생은 호를 만죽으로 지을 만큼 대나무와 만경강의 산수를 아꼈다고 한다.
세심정과 인근의 고산향교에 이르기까지 대숲이 형성된 것이 선생의 뜻인가 보다. 만경강 위에 우뚝 솟은 신비로운 바위와 후대에까지 전해지는 아름다운 시조를 남긴 선비, 서익. 유허비가 세워진 바위에는 봄기운이 전해지는지 살얼음이 녹고 있고, 그 둘레를 따라 작은 새 두 마리가 총총히 걸으며 연신 강물을 마시고 있다. 만경강이 있어 다행인 풍경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 정재율,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 ‘라스 우바스’ 중
만경강에 기댄 뭇 생명
고산면에서 삼례읍으로 향하는 만경강은 강의 생명력을 뽐내듯 신천습지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용진읍 회포대교에서 삼례읍 하리교까지 2.4k m에 걸쳐 형성된 신천습지는 만경강의 허파다. 습지 곳곳에는 만경강의 유속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모래톱이 작은 섬처럼 자리한다.
모래나 자갈이 모여 형성된 하천 지형을 모래톱이라고 하며, 강 한가운데 만들어진 퇴적 지형은 하중도로 부른다. 신천습지에 이르러 만경강의 폭은 크게 넓어지고 완만한 경사에 유속이 느려지며 습지 곳곳에 모래톱과 하중도가 형성된다. 덕분에 다양한 식물군락이 분포할 수 있고, 멸종위기종에 이르는 철새들이 머물며 활발히 먹이 활동을 하는 순환을 이루는 것이다.
신천습지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들 |
희귀한 철새들이 모두 여기에
그동안 흔히 보았던 새라면 청둥오리, 백로뿐이었는데 신천습지에서 처음으로 큰기러기를 보았다. 멸종위기조류 2급인 큰기러기는 부리가 검정색으로 끝부분에 황색 띠를 두르고 있다. 몸은 짙은 갈색, 다리는 주황색이다. 큰기러기와 크기가 비슷해 닮은 듯 다른 청둥오리는 겨울 철새에서 이제 텃새가 되었다. 수컷은 목 부분에 짙은 녹색을 두르고 있으니 큰 기러기와 잘 구분해보자.
어디 이뿐인가. 신천습지에는 물닭, 홍머리오리, 흰목물떼새, 잿빛개구리매 등 이름도 낯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새들이 관찰된다. 해가 질 무렵에는 하늘 을 수놓는 새들의 무리가 바쁘다. 습지와 들판에서 밤을 보내는 새들끼리 자리 이동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너희도 퇴근을 하는 거니?’ 한편 만경강은 국내 최대 황새 월동서식지로 운이 좋다면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이자 천연기념물인 황새도 두 눈에 담게 될지 모른다.
만경강은 호남평야의 젖줄로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수탈지로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14년에 삼례읍에는 만경강 철교가 세워지고, 거대한 양곡창고가 속속 들어섰다. 호남평야에서 수확한 곡물을 안전하고 빠르게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신천습지는 모래톱과 하중도가 많아 다양한 수생식물이 분포하고, 철새와 텃새들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
퍼져나가는 문화의 흐름
만경강을 가로지르는 길이 476m의 철교는 지난 2011년 철로의 기능을 마치고, 2013년 ‘구 만경강 철교’로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붉은 해를 머리에 인 철교 위에는 비비정예술열차가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 만경강 위에 자태를 드러낸다. 만경강의 낙조를 관찰할 수 있는 특별한 전망대이자, 카페와 레스토랑으로도 운영하는 이색 공간이다.
오늘날 삼례읍의 양곡창고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1920년대 건축된 7동의 양곡창고는 지난 2013년 삼례문화예술촌으로 개관했다. 만경강처럼 삼례문화예술촌도 끊임없이 흐르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완주를 여행한다면 꼭 들러볼 곳이기도 하다. 현재 삼례문화예술촌 개관 10주년을 맞이해 한국화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김현정 작가의 <계란 한 판, 결혼할 나이> 특별전(~4.9)이 열리고 있다. 여성에게 씌운 독특한 사회 굴레를 특유의 재기발랄함으로 풍자한 작품은 하나하나 신선하고,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개관 10주년을 맞이한 삼례문화예술촌 |
완주 핫플레이스 오성한옥마을
바야흐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문화가 되고 있는 시대다. 일찍이 완주의 오성한옥마을이 그러했다. 자연을 갤러리로 들여온 과감함과 그 어떤 호텔보다 세련되고 흥미로운 한옥스테이의 묘미를 전하고, 서까래 아래에서 책장을 넘기는 평화를 맛보게 한다. 아원고택은 경남 진주의 250년된 한옥을 오성한옥마을로 옮겨 이축한 데 이어 지난해 10월 미디어아트 전시 공 간과 ‘서당’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한옥을 선보였다.
오성한옥마을에 한옥스테이 ‘서당’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
전남 함평에서 조선시대 말기까지 서당으로 쓰인 고택을 옮겨온 것인데 대청의 들어열개(문)를 올리자 마당의 종남산이 눈앞에 산수 를 그려놓은 듯 가깝다. 소양고택도 지난해 7월 혜온당, 제월당에 이어 ‘여일루’의 문을 새롭게 열었다. 경북 포항의 100년된 고택을 이축한 것으로 ‘광복의 화창한 봄날’을 그 이름에 담았다. 오성한옥마을 건너에는 오성제(저수지)를 중심으로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소양문 화생태숲에는 자음과 모음으로 만든 한글다리부터 이제는 성지가 된 BTS소나무도 만날 수 있다. 마음을 주지 않고는 못 배길 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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