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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기의 연인을 위한 호수

권태기는 남들 얘기인 줄만 알았다. 한 지붕 아래에서 한솥밥을 먹은 지 30년쯤 되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사랑할 줄 알았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함께 살아온 세월이 길어질수록 대화의 시간과 손잡는 횟수가 크게 줄었다. 권태기 극복을 위한 2박 3일의 짧은 여행을 아내에게 제안했다. 아내의 동의 아래 ‘충북의 호수 여행’을 테마로 정했다. ‘진짜’ 바다만 빼고 여행의 모든 것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충주시 살미면 신당리 악어봉에서 바라본 악어섬. 악어 몇 마리가 충주호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

여행에도 강약조절이 필요하다. 여행이 만족스러우려면 여행 목적이나 동행의 취향에 맞춰 동선을 잡아야 된다. 우리나라 호수 여행지의 백미로 꼽히는 충주호를 우리의 첫 번째 여행지로 정했다. 처음이 시원찮으면 다음 여정을 계획대로 이어가기가 어렵다.


“충주호”하면 유람선 관광을 빼놓을 수 없다. 유람선 선착장도 여러 곳이다. 그중 단양 장회나루(043-421-8616)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이 가장 인기 있다. 단양팔경에 속할 만큼 빼어난 풍광을 보여주는 옥순봉, 구담봉 아래를 반드시 거쳐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주시 동량면 화암리의 충주나루(043-851-7400)에서 출발하는 충주호관광선을 이용했다. ‘내륙의 바다’ 충주호의 진면목을 감상하고 싶었다. 선착장을 출발한 배는 약 30분 만에 제천시 한수면 한천리 앞의 충주호 한복판에 도착했다.


유람선의 정면에는 월악산 영봉(1,097m)이 우뚝했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사람들마다 “우와~”하는 탄성을 연발했다. 짜릿한 전율마저 느껴졌다. 머릿속까지 뻥 뚫린 것처럼 상쾌했다. 감동어린 눈빛의 그녀가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았다. 그 날 저녁에는 팔짱까지 끼고 산책하면서 충주시 중앙탑사적공원의 멋진 야경을 함께 감상했다. 첫 번째의 여행지 선정은 성공적이었다.

산막이옛길의 쉼터 중 하나인 병풍루. 괴산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기에 좋은 쉼터와 전망대가 곳곳에 있다

충주호 호반의 전망 좋은 펜션에서 기분 좋게 하룻밤을 보낸 뒤 괴산 괴산호로 향했다. 자동차로 약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칠성호’로도 불리는 괴산호는 괴산댐으로 생긴 인공호수이다. 괴산댐의 준공 이후 달천 변의 여러 산마을들은 섬마을처럼 고립되었다.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산막이마을도 그중 하나였다. 마을 주민들은 새로 생긴 호숫가를 따라서 괴산읍내로 오가는 지름길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산막이옛길은 오랫동안 주민들만 간간이 이용하던 길이었다. 요즘에는 괴산군 최고의 관광명소가 자리 잡았다.


산막이옛길은 편안하고 정겹다. 가파른 비탈길이나 거친 돌길 구간이 거의 없다. 줄곧 맑고 고요한 괴산호를 옆에 끼고 걷는다. 평소 아내는 동네 뒷산도 힘들다며 산행하기를 싫어했다. 그러던 사람이 “산막이옛길은 딱 내 취향”이라면서 발걸음도 가볍게 저만치 앞서 걷기도 했다. 힘들지 않으니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많아졌다. 경치 좋은 곳마다 데크로드, 전망대, 쉼터 등이 설치돼 있어서 우리의 걸음을 수시로 붙잡곤 했다.


출발지인 주차장에서 산막이마을까지의 거리는 편도 4km에 불과하다. 2km를 더 가서 연하협구름다리까지 걸어도 약 1시간 30분~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숨 한번 헐떡거리지 않고 기분 좋게 걸었다.


출발지로 되돌아올 때에는 연하협구름다리에서 500m쯤 더 가야 만나는 굴바위농원 선착장에서 대운2호(080-200-6745)에 몸을 싣고 선상유람을 즐겼다. 걸을 때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영화 속의 장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유람선은 산막이옛길의 종점인 신랑바위 앞에서 뱃머리를 돌렸다. 우리가 잠깐 걸어본 연하협구름다리의 아래를 지나고, 산막이마을 선착장에도 들렀다가 출발지 근처의 차돌바위 선착장에 도착했다. 우리가 2시간 넘게 걸었던 길을 유람선은 약 30분 만에 도착했다. 배 타고 산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괴산호와 산막이옛길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진솔한 대화는 그윽한 솔향기를 타고

초평저수지는 선뜻 내키지 않은 여행지였다. 낚시꾼들의 성지로 워낙 유명하기 때문이다. 붕어, 잉어, 가물치 등의 대물을 노리는 강태공들이 즐겨 찾는다. 나도 한때는 바다낚시를 즐기던 강태공이었지만, 여전히 민물낚시와 민물고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평저수지를 선택한 것은 농다리, 초롱길, 하늘다리 때문이었다. 지네발 모양의 28개 교각으로 이루어진 진천 농다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옛 다리 중 하나이다. 고려 초에 처음 놓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동양에서도 가장 오래된 다리라고 한다.


농다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본격적으로 초롱길 탐방에 나섰다. 초평저수지와 농다리의 첫 글자에서 이름을 따온 초롱길은 농다리에서 초평붕어마을까지 이어진다. 종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와도 총 8km, 약 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곳의 대표 별미인 붕어찜을 맛보는 즐거움만으로도 한번쯤 걸어볼 만하다.


농다리에서 1.9km 떨어진 ‘생거진천 하늘다리’를 건너면 ‘아이유’, ‘전지현’ 할머니가 컵라면이나 간식거리를 파는 매점 쉼터에 도착한다. 내 인생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큼 맛있는 컵라면을 맛봤다.


하늘다리에서 초롱길의 종점인 초평붕어마을까지의 거리는 3km쯤 된다. 붕어마을 근처의 저수지 풍경은 매우 이국적이었다. 동남아시아의 수상가옥 같은 방갈로가 물 위에 빼곡하게 떠 있다. 이 수상방갈로는 밤낮없이 손맛을 맛보고 싶은 강태공들이 주로 이용하지만, 가족이나 연인, 부부들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아직 민물낚시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우리 부부는 “나중에 꼭 애들과 함께 수상방갈로에서 하룻밤 머물며 낚시 한번 해보자”고 약속했다. 물론 밤새워 낚싯대를 드리워도 손맛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특별한 공간에서 온 가족이 함께 쌓은 추억은 평생토록 잊히지 않을 성싶다.


하루 동안 산막이옛길과 초롱길을 모두 걸었다. 잠자리는 보은 삼가저수지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의 속리산사내리야영장(043-544-5453)으로 정했다. 법주사 초입의 울창한 솔숲에 자리한 이 야영장은 더없이 훌륭한 캠핑사이트였다.


소나무의 그윽한 향기는 온몸을 휘감았고, 새들의 지저귐은 어떤 음악보다 귀를 즐겁게 했다. 참나무 장작이 만들어 놓은 숯불에 소시지를 구워 맥주 안주로 삼았다. 서로에게 미안하고 서운하고 언짢았던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앞으로 더 사랑하겠다고 서로에게 약속했다.


구수한 누룽지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친 뒤에 삼가저수지로 이동했다. 속리산 남쪽 기슭의 만수계곡에서 흘러든 물을 저장하는 이 저수지는 충북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한다. 하지만 호반도로가 짧아서 저수지 자체는 즐길 거리도 없다. 마땅히 휴식할 데도 없었다.


삼가저수지 근처의 불목이옛길을 걸었다. 저수지 주변의 속리산면 삼가리, 구병리 주민들이 법주사 초입의 상판리 사이를 오갈 때에 이용했던 산길이다.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근래 복원된 길은 퍽 한적했다. 출발지인 삼가리에서 종점인 속리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앞까지 걷는 동안에 한 사람도 마주치지 못했다. 불목이재 정상과 삼가리 사이에 가파른 계단이 있다는 정보를 파악한 아내는 아예 포기하고 운전사를 자처했다. 홀로 걷는 길이었지만 외롭거나 지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색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가졌다. 내내 실타래처럼 엉켜 있던 생각들도 가닥가닥 추슬러졌다.

아내를 행복하게 만든 ‘진짜’ 생선국수

정이품송 앞의 주차장에서 다시 만난 아내와 함께 마지막 여행지인 대청호로 향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점심식사부터 먼저 하기로 했다. 정이품송 주차장에서 31km 떨어진 옥천군 청산면의 찐한식당(043-732-3859)이 목적지이다. 제대로 된 생선국수를 먹고 싶다는 아내의 뜻에 따라 선택한 맛집이었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냉면 그릇에 가득 담긴 생선국수는 맛과 양이 모두 만족스러웠다. 평소 내 절반도 안 될 만큼 적은 양의 음식을 섭취하던 아내는 생선국의 국물 한 방울 국수 한 가닥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그릇을 비웠다. 아내는 “이제 어딜 가서 뭘 보든 상관없어. 나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하며 오수를 청했다.

옥천읍 청산면 찐한식당의 생선국수와 생선튀김. 때로는 맛있는 음식 한 그릇이 큰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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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는 소양호, 충주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인공호수이다. 아무리 바쁘게 쏘다녀도 다 둘러보려면 사나흘 이상 걸린다. 나는 욕심내지 않고 딱 한군데의 비경만 보기로 미리 작정했다.


부소담악. 충북 호수12경이자 옥천9경에 속하는 비경이다. 일찍이 우암 송시열 선생이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듯한 절경이라 해서 ‘소금강’이라 이름 붙였던 곳이다. 원래는 금강변의 좁고 길쭉한 산줄기였다. 대청댐이 세워진 뒤로 위쪽의 산등성이만 남기고 모두 물에 잠겼다. 대청호의 수면이 낮아지면 길쭉한 병풍바위가 되고, 물이 가득 차면 위태롭게 점점이 떠 있는 섬들로 탈바꿈한다.


부소담악 가는 길은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의 황룡사 앞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거기서 600m쯤 가면 호수 전망대인 추소정에 올라서게 된다. 짧은 그 길에서 꽃구름 타고 두둥실 떠가는 듯한 꽃길도 지난다. 우리는 때마침 부처님 머리처럼 몽실몽실 피어난 불두화 꽃길을 걸었다.


부소담악의 절경은 추소정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좁고 거친 벼랑 위로 길이 이어지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걸어야 된다. 사실 부소담악의 병풍바위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배를 타는 것이 최상책이다. 추소정 건너편의 호숫가에 위치한 미르정원(010-5450-8507)에서는 입장객들을 배에 태워 부소담악 일대를 둘러보는 서비스도 제공한다.


배를 타고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부소정 위에서 살짝 훔쳐본 부소담악은 훗날을 기약할 만큼 아름다웠다. 아내도 “행복한 여정이었다”며 환한 낯빛을 보였다. 이 여행의 효과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권태기의 늪에 빠져나온 것만은 틀림없는 듯했다.

충주댐과 가까운 남한강 변에 우뚝 솟은 충주 탑평리칠층석탑 (국보 제6호).

글, 사진 양영훈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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