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장 한장 책장을 넘기 듯… 큰산 굽어보다
장흥으로 문학 산책
“저기 쓰여 있는 ‘큰산’이 어디를 말하나요?”
“공원이 있는 바로 이 산입니다.”
“구룡봉이 정상인가요?”
“정상은 아닌데 풍경은 최고죠. 이곳에서 길 따라 올라가면 나옵니다.”
장흥 여다지해변엔 바다를 끼고 문학작품을 읽을 수 있는 ‘한승원 문학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
전남 장흥 천관산문학공원엔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소설가·수필가·아동문학가의 글을 자연석에 새겨 넣은 50여개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이 지역 출신 문학가 한승원·이청준·송기숙을 비롯해 구상·안병욱·문병란·박범신 등 유명 작가의 글이다.
그중 유독 장흥 출신 작가들의 글에 눈이 간다. 이청준이 쓴 ‘인문주의자 무소작씨의 종생기’에 나온 ‘큰산 꼭대기 구룡봉에서 바라본 세상은 끝없이 넓었다. 작은 동산 같은 그의 마을 뒷산 너머로 남해의 푸른 바다가 아득히 하늘로 이어져가고 북으로는 수많은 산이 부연 연무 속으로 겹겹이 멀어져가고 있었다.’라는 구절이 문학비에 새겨져 있다. 한승원의 문학비에도 ‘이 관내 모든 학교의 교가 속에 이 장엄한 산이 우뚝 솟아 있듯이 내 육체와 영혼 속에 이 산이 들어와 우뚝 솟아 있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천관산문학공원의 이청준 문학비. |
크고 장엄한 산에서 바라본 장흥
장흥의 바람과 산, 바다, 흙, 사람 등 모든 것이 크든 작든 이청준, 한승원 등 이곳에서 태어난 문학가에게 영향을 주었을 테다. 장흥 곳곳에 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을 둘러보기 위해 문학공원을 찾았는데 단순한 호기심이,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장흥을 대표하는 작가 이청준과 한승원의 문학비에 거론되는 ‘큰산’과 ‘장엄한 산’이 어딘지 궁금했을 뿐인데 결과는 천관산 산행이었다. 산을 자주 타는 이들이 하는 ‘그리 힘들지 않고, 얼마 걸리지 않는다’는 말에, ‘분명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이 어떤 풍광에 빠져들었는지’를 느껴보고 싶어 발은 이내 흙길을 밟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 필요도 없다. 문학공원을 보러 왔기에 이곳에서 탑산사를 거쳐 아육왕탑, 구룡봉에 오른 뒤 연대봉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가다 다시 문학공원으로 내려오면 된다.
장흥 출신 이청준, 한승원 등 문학가들의 작품을 전시한 천관문학관. |
20분 정도 오르니 큼직한 돌 아래 공간이 있는 반야굴을 만난다. 험하진 않지만, 가파른 산길을 쉬지 않고 올라와 잠시 숨을 돌린다. 이곳이 꽤 영험한 곳인지 안에는 무속인들이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다. 문학공원에서부터 이어진 돌탑이 이곳에도 세워져 있다. 문학공원은 천관산이 있는 대덕읍 주민들이 아이디어를 내 조성했다. 문학가들에게 직접 문구를 받아 자연석에 새겨 문학비 공원을 건립했다. 또 등산로에 다양한 크기의 돌탑도 쌓았다. 장흥을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학가들이 있다는 그들의 자부심이 그대로 전해진다.
숨을 돌린 후 10여분 오르면 산 중턱의 절집 탑산사다. 오르는 길은 숲길이어서 뒤를 돌아봐도 아래 풍경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데, 앞이 트인 절 마당에 오르니 대덕읍의 들판과 바다, 다도해 풍광이 펼쳐진다. 산 아래 풍경뿐 아니라 천관산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인 다양한 기암괴석들도 능선을 따라 도열해 있다. 천관산은 다양한 모양의 기암괴석이 주옥으로 장식한 천자의 면류관처럼 솟아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었다. 언제부터인지,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호남 5대 명산 중 하나로 꼽힌다. 몇 번째인지 줄 세울 수 없지만, 그만큼 멋진 풍광을 품은 것만은 확실하다.
천관산 사자 얼굴 형태의 기암괴석. |
이를 알 수 있는 시작점이 탑산사에서 보는 풍광과 기암괴석이다. 암사자인지, 수사자인지 모르지만 바위 중간에 뚜렷이 새겨진 째진 눈과 넓적한 코, 입술의 사자바위와 머리가 툭 튀어나온 거북바위가 눈에 띈다. 절 뒤편으로는 범종처럼 생긴 종바위와 용머리바위 등 이름을 들으면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바위들이 있다.
천관산 기암괴석 중 하이라이트인 ‘아육왕탑’. |
기암괴석 중 하이라이트는 절에서 나와 구룡봉 방향으로 가면 나온다. 절에서 나오면 나무데크를 만나는데 구룡봉 방향을 바라보면 돌탑을 쌓아놓은 듯한 바위가 아찔하게 서 있다. ‘아육왕탑’으로 불린다. 인도를 통일한 아육왕이 부처 사리를 봉안하며 세운 8만4000개의 탑을 ‘아육왕탑’이라 하는데, 그중 하나라는 얘기가 부처 일대기와 설법을 한글로 번역한 ‘석보상절’ 등에 전해진다. 자연적인 돌탑인지, 사람이 세운 돌탑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위태롭게 형태를 유지하며 서 있는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것만은 분명하다.
구룡봉까지는 나무 계단을 오르면 된다. 20여분 정도 올라 이름대로 아홉마리 용이 노닐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구룡봉에 이르면 주위를 가리는 것이 없다. 천관산 정상 연대봉의 높이가 723m이니 구룡봉은 700m 정도 될 듯싶다. 봉우리는 아홉마리 용이 머물렀을 정도로 넓고 평평한 바위이고 그 아래로는 절벽이다. 바위 군데군데에는 공룡 발자국인 듯한 모양의 파인 자국이 있다.
장흥 여다지해변엔 바다를 끼고 문학작품을 읽을 수 있는 ‘한승원 문학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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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 걸터앉아 숨을 돌린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이 남쪽으로는 바다가, 반대편으로 능선이 이어진다. 문학공원 비석에 새겨진 ‘하늘로 이어진 푸른 바다와 멀어져 가는 산들의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거기에 더해 다도해가 이어져 있다. 천관산이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속하는데, 바다가 없었다면 저 섬들이 끝자락을 차지했을 듯싶다.
반대편 능선을 따라 돛대를 세워 놓은 듯한 진죽봉과 구정봉 등 웅장한 바위 봉우리들이 정상 연대봉까지 이어진다. 구룡봉에서 능선을 따라가다 만나는 환희대에서는 ‘겹겹이 멀어져가는 산들’의 모습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바다에선 섬들이 파도치듯 이어져 있다면 환희대에선 천관산 봉우리뿐 아니라 북쪽으로 솟은 산들의 너울을 볼 수 있다. 능선에선 억새들이 슬슬 파도칠 준비를 하고 있다. 억새밭을 지나 연대봉까지 가거나, 탑산사를 건너편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닭봉 쪽으로 향해 문학공원으로 내려가면 된다. 3∼4시간 정도이면 작가가 바라보며 느낀 그 풍경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
전남 장흥 선학동은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 배경이 되는 마을이다. 관음봉 산줄기가 학이 날갯짓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
들판, 바다에서 느끼는 작가의 향기
‘포구에 물이 들면 관음봉의 산 그림자가 거기에 떠올랐다. 물 위로 떠오르는 관음봉의 그림자가 영락없는 비상학의 형국을 자아냈다. (중략) 선학동은 날아오르는 학의 품 안에 안긴 마을인 셈이었다.’
선학동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 촬영 당시 주막으로 사용한 양철 건물이 남아 있다. |
산행이 버겁다면 한 마리 학이 떠도는 들판으로 향하면 된다.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 배경이 되는 선학동이다. 이 소설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으로 제작됐다. 회진면 산저리였던 마을이 ‘선학동 나그네’의 배경이 되면서 선학동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다를 막은 제방을 쌓았기에 소설처럼 마을에 물이 찼을 때 관음봉이 비친 모습을 볼 순 없다. 그래도 제방 근처 영화 촬영 때 주막으로 사용한 양철 건물에서 보면 관음봉의 모습이 학이 날갯짓하는 듯하다.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은 소설 속 얘기처럼 학의 품에 안겨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진목마을엔 이청준의 생가가 있다. 이 마을은 고향집이 빚쟁이의 손에 넘어간 얘기를 듣고, 이청준이 광주에서 고향에 내려간 기억을 담은 자전적 소설 ‘눈길’의 배경이 됐다.
장흥 북쪽의 안양면 여다지해변에선 바다를 끼고 문학작품을 읽을 수 있는 ‘한승원 문학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600m에 이르는 해변 산책로엔 한승원의 시 등 작품들이 돌비석에서 새겨져 있다. 책을 들고 다닐 필요 없이 바다를 보다 싫증이 나면 문학작품 한 편을 읽으며 천천히 걸으면 된다. 바다와 어우러진 살아 있는 시화 한 편을 품을 수 있는 길이다.
낙지와 키조개 관자, 돼지고기 등을 섞어 얼큰하게 끓여 먹는 낙지삼합. |
장흥의 갯벌에서 자란 키조개 관자와 들판에서 자란 한우, 산에서 캔 표고버섯이 어우러진 키조개삼합. |
장흥에서 몸의 허기는 삼합으로 채우면 된다. 홍어와 돼지고기 삼합이 아니다. 장흥의 갯벌에서 자란 키조개 관자와 들판에서 자란 한우, 산에서 캔 표고버섯이 주인공인 키조개삼합이다. 키조개의 부드러움이 혀를 자극하고, 한우의 감칠맛이 입안을 맴돈 뒤 느껴지는 느끼함을 표고버섯이 잡아준다. 한우만 먹을 때보다 더 많이 먹게 되는 이유가 버섯이 느끼함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 잘났다고 튀기보다 서로 어우러져 맛이 깊어진다. 최근엔 낙지삼합도 이름이 알려지고 있다. 낙지와 키조개 관자, 돼지고기 등을 섞어 얼큰하게 끓여 먹는다.
장흥=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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