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와 파전, 언제부터 먹었을까? [명욱의 술 인문학]
막걸리와 파전이 짝을 이룬 시기는 1970년대로 추정한다. 부산 동래파전의 선풍적인 인기와 더불어 상경한 노동자들이 막걸리에 파전을 곁들이면서 ‘막걸리와 파전’이란 공식이 생겨났다. 게티이미지뱅크 |
한국인에게 가장 추억 어린 술이라고 하면 어떤 술일까? 어떤 이에게는 1980년대 성행했던 호프집에서의 생맥주일 것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고된 노동이 끝나고 대폿집에서 한잔 들이켜는 소주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술과 다르게 토속적이며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술이 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늘 동네 양조장에서 만들던 술, ‘막걸리’다. 막걸리는 2002년까지 ‘지역 판매 제한’이라고 하여 막걸리를 생산한 동네에서만 팔아야 했다. 남의 동네에서 만든 막걸리는 우리 동네에서 팔지 못했고, 우리 동네에서 만든 막걸리도 남의 동네에서 팔지 못했다. 그래서 면 단위마다 양조장이 있었고, 동네 막걸리만 마셨다. 막걸리가 소주와 맥주와는 다른 ‘우리 동네의 술’, 그리고 ‘고향의 술’이라는 이미지가 가장 강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막걸리는 비가 오는 날 가장 많이 팔린다. 여름 장마 때는 아예 대형마트에서는 부침가루와 막걸리를 세트로 팔 정도다. 많은 이들이 언급하기로는 농번기에 비가 내리면 일손을 멈춰야 했고, 그래서 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고 한다. 휴식과 같은 술이 막걸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런 공식은 나왔을까? ‘비가 오면 막걸리’라는 공식기록은 1970년 9월 5일 신문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땀 흘리는 한국인, 적도림 개발과 望?(망향)’이란 기사로, 적도 부근의 정글을 개척하던 한국인 노동자들을 다뤘다. 모진 육체노동에 늘 힘들어했지만 비 오는 날만큼은 일을 쉴 수 있었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일에 쫓겨 덮어두었던 고향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는 것. 고향의 술인 막걸리가 여기에 빠질 수 없었고, 추억 속에 숨겨진 기억이 막걸리를 불렀다. 서울로 상경해서 일하던 수많은 노동자에게도 적용됐다. 건축붐이 불던 1970∼80년대에는 건축 노동자들은 비가 오면 일손을 놔야 했고, 고향 생각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노동주인 막걸리로 손이 갔다. 이를 감안하면 ‘비 오는 날에는 막걸리’라는 공식은 1960년대 이후에 생겼으며, 1970년대 건축붐이 불면서 붐이 널리 퍼졌다고 생각된다.
참고로 ‘파전과 막걸리’는 1970년대 이후 생긴 용어다. 원래 파전보다는 빈대떡이 막걸리와 좀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빈대떡은 녹두를 갈아 돼지기름에 지진 음식으로, 기름과 고기가 부족했던 시절 나름 고급요리였다. 기록을 보면 1930년대부터 빈대떡집이 서울을 중심으로 많이 생겼다. 이곳에서 팥죽, 국수, 그리고 소주와 막걸리를 함께 팔았다.
파전이라는 메뉴가 막걸리의 짝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시기는 1970년대 이후라고 본다. 당시 부산 동래지역의 부침개인 ‘동래파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이 동래파전의 인기는 전국적으로 ‘파전’이라는 이름을 알렸으며, 이어 전국의 민속주점들이 막걸리와 함께 파전을 내놓으면서 본격적으로 ‘막걸리와 파전’이라는 궁합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당시 건축붐으로 서울로 올라온 노동자들이 노동주, 서민주, 고향의 술인 막걸리에 파전을 곁들이면서 대중화됐다고 본다.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교수
●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는…
숙명여대 미식문화최고위 과정,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객원교수. SBS팟캐스트 ‘말술남녀’, KBS 1라디오 ‘김성완의 시사夜’의 ‘불금의 교양학’에 출연 중.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 ‘말술남녀’가 있음.